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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당장 조직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원봉이 조국을 뺏은 일본 강도와 투쟁하겠다고 찾아낸 대안은 폭력이었습니다. 마침 죽마고우 강세우가 밀양에서 삼일만세운동을 하고 중국으로 왔는데 김원봉은 언제까지 공부만 할 수 없으며 직접 행동이라도 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급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1919년 11월 9일, 동지 13명과 황상규의 지도하에 지린 중국인 판(番)씨 집에서 밤새워 토론했습니다. 현재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한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열혈 지사들이 “조선을 통치하는 적의 시설물을 파괴하자”, “적의 군주 이하 각 대관과 모든 고관을 암살하자”. 이렇게 끊임없이 파괴와 암살로 폭력을 행사해서 일본 강도의 조선 통치를 방해하면 동포들도 애국심을 환기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민중적인 폭력을 일으킬 테니 의로운 피를 흘려 조국 광복의 대업을 성취하자고 상의했습니다.
이들은 조선 독립과 세계평등을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을 결성했습니다. 활동 지침 공약 10조를 제정하고, ‘칠가살(七可殺)’, ‘오파(五破)’라는 행동 대상도 정했다. ‘칠가살’ 암살 대상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타이완 총독(타이완 총독도 친일파로 약소민족을 억압), 매국노. 친일파거두, 적 염탐꾼, 반민족 토호열신입니다. 파괴 대상 ‘5파’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왜적기관입니다.

의열단은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단장 ‘의백(義白)’에 선출된 김원봉은 비밀히 의열단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베이징, 톈진, 난징, 홍콩 등지를 오가며 단원을 모집하고 고성능 폭탄을 입수하여 이룽양행(伊隆洋行) 선박회사를 통해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이룽양행 사장 쇼우(George Lewis Shaw, 1880~1943)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입니다. 일제를 증오하여 그는 자신과 회사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회사 2층에 임시정부 교통국(交通局) 안동지부(安東支部)를 설치해 주었습니다. 임시정부의 물품이나 의열단이 사용할 폭탄도 자신 소유의 기선에 실어 운반했습니다. 경비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한국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였다고 합니다. 임시정부나 의열단 요원들은 이륭양행 선박을 이용해 상하이, 만주와 한국을 왕래하고 위험에 처하면 그의 집에 숨기도 했습니다.
1920년 9월 14일 부산에서 박재혁(朴在革, 1895~1921)이 고서(古書)상인으로 위장하여 부산경찰서 하시모토 경찰서장을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경찰서장은 죽이지 못했지만, 이 거사는 의열단원들이 죽음으로 정의를 실행하는 출발점입니다.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崔秀峰, 1894~1921)이 밀양경찰서에 폭탄 2개를 던지고 사형 선고받았습니다. 1921년 9월 중순 김익상(金益相, 1895~1942)은 전기공으로 위장해 총독부 건물에 침입해 폭탄 3개를 던지고 경찰의 추적을 피해 중국으로 왔습니다. 광둥 항공학교에 입학하려고 광저우에 왔는데 내전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네요. 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오성륜(1900~1947), 李鐘巖(이종암 1896~1930)이 일본 침략을 책화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1929) 대장 암살도 시도하다가 미수에 그쳤습니다.
의열단 이름은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고, 김원봉이 전체 과정을 극비리 진행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조차도 행동이 진행되는 구체적인 상황을 몰랐습니다. 의열단 사무실이 상하이에 있었지만, 김원봉은 야간에 극비로 드나들고 경찰의 눈을 피해 매일 밤 단원들의 처소로 옮겨 다니며 잠을 자야 했습니다.
의열단은 목표 달성을 위해 너무 잔혹한 수단을 동원한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지요. 임시정부 인사들조차 의열단의 과격한 수법이 정치적 효과보다 피해가 크다고 비난했습니다. 때로는 변절자가 생겨 의열단의 행동계획이 일경에 발각돼 실패로 끝나기도 합니다.
의열단 행동이 세간 비판에 직면하자 류자명(柳子明,, 1894~1985)이 역사학자 신채호(申菜浩, 1880~1936)에게 부탁해서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과 투쟁 방법을 대외에 천명하는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의열단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종속으로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이 의열단의 행동목표와 항일투쟁 노선을 정당화시켰습니다. 단원들은 ‘조선혁명선언’도 폭탄이나 총과 함께 무기처럼 소지하고 다녔습니다.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후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1876~1949)와 유학자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의열단 고문을 맡았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