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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요?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가명으로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김원봉에 대해 워낙 논쟁이 많은지라 교실에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년 래도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차례 자료를 올리겠습니다.
김원봉이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결정적인 영향은 쑨원의 국공합작이었습니다. 1924년 1월, 김원봉은 국립 광동 대학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 대표대회를 방청했습니다. 강당 2층이 외국인 방청석입니다.
국공합작 선포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쑨원은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과 협력하고 노동자 농민을 도우면서 혁명을 완수하겠다고 김원봉과 회의를 방청하던 의열단 재무부장 권준(权晙, 1895~1959)은 물과 기름같은 성질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해서 혁명을 완수한다는 내용에 충격을 받고 우리 독립운동 진영도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고 합나다.
김원봉은 그동안 자신이 추진해 온 의열단 노선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의열단 창립 이후 약 5년 동안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암살과 파괴로 일제를 타격했습니다. 자신은 배후에서 조종하며 일제와 투쟁을 지속했으나 실패한 점도 많았습니다. 어떤 조직적인 투쟁이 필요하다고 절감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김원봉은 비밀리 쑨원을 방문했습니다. 쑨원은 김원봉에게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조국 독립운동을 하는 데는 군사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군사지식을 보유한 지도자가 병력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이길 수 있으니 원한다면 광저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체계적인 군사학을 공부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쑨원의 권고에 따라 사관학교에 입학한다면 김원봉은 의열단의 활동을 중단하고 노선을 변경해야 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동지들과 장시간 토론했는데 부단당 김상윤(金相润, 1897~1927)은 극구 반대했습니다.
김상윤은 '의열단 창립 이후 5~6년간, 의열단은 크고 작은 수백 건의 행동을 실행해서 일제에 압력을 가했다. 의열단의 이름도 세상에 알려졌고, 김원봉의 명성도 대단한데 굳이 일개 사관 학생 신분으로 중국 사관학교에 입교해서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렸습니다.
김원봉은 확고한 결심을 되돌리지 않았습니다. 김원봉은 의열단원 모두가 황푸군환학교나 중산대학에 입교해서 훈련과 교육을 받고 핵심적인 민족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혁명은 일종의 제도 변혁이다. 일제 요인 몇 명을 암살하고 일제의 통치 기구 몇 개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제도를 변혁할 수 없다'. 제도를 변화시키려면 일반 대중을 인솔해서 투쟁해야 하는데 김원봉은 자신이 먼저 군사적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의열단 재기를 기대했던 김상윤은 혼자사 샤면(厦门)과 만주를 왕래하면서 자금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이 나서 푸젠(福建) 취안저우(泉州) 설봉사(雪峰寺)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