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중국한인역사] 중국 국난을 돕는 조선의용대 결성

기사입력 2023.10.24 15:18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s url

    1937 7월 7일,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3일이 지난710일,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들을 초청했습니다. 민족주의 계열의 김구, 좌파 계열의 김원봉, 무정부주의 계열의 류자명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은 두둑하게 지원할 테니 한중 연합 항일전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1698198778408.png

     

    중화부흥사(中華復興社, 藍衣社) 간사로 일하는 김원봉의 황푸군관학교 동기생 캉쩌도 김원봉에게 한국청년들을 중국군대에 파견해서 군사훈련을 받게 하자고제의했습니다.

     

    김원봉은 신속히 행동을 취했습니다. 긴급히 광저우 등지에서 100 명의 한국청년을 모집해 1937 9월, 난징의 중앙군사학교싱즈(星子)분교로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싱즈분교특별훈련반에서 훈련을 시작한지 채 한 달도  되어 일본당국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본은 장제스가 외교관례를 깨트리고 비밀히 추진한 일이라고 노발대발항의했습니다. 

     

    한인 훈련반은 후베이(湖北) 장닝(江寧)진으로 옮겨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그동안 일제는 중국의 중부권과 연해지역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장제스는 전민족이 힘을 모아 일제에 저항해야 할 시기임을 파악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선언하여 항일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합법적인 지위를 확보받고 한커우(漢口)에 정치부 사무실을 설치했습니다.

     

    국민당정부가 난징을 떠나 우한으로 피난할 때, 김원봉도 조선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인솔해 우한으로 옮겨갔습니다. 주요도시는 대부분 일제가 차지하고 우한이 유일한 중국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우한은 항일도시로 변했습니다. 

     

    국제적인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해방 운동가들이 우한에 집결하여 진심으로 중국이 우한을 보위하기를 희망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정의의검이라고 불리는 소련공군의용대도 출동하여 일본전투기의 우한공격을 저지했습니다. 

     

    1938년 7월 7일, 중일개전 1년을 맞아 김원봉은 중국항전의 지원군무장부대(조선의용대) 결성계획안을 중국군사위원회정치부에 제출했습니다. 군사전투력은 중앙군관학교장 닝분교에서 훈련을 마친 한국청년 90 명과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분교에서 훈련을 받은 김구파 한인 청년 92명을 포함해 약 180여명었습니다. 김홍일(金弘壹, 1898~1980)이 이들을 인솔하여 우한의 한중학교에 수용시켰습니다.  


    장제스는 조선의용군은 단독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중국군대안에서 활동한다.”, “조선인에 대한 모든 지휘와 명령권은 중국에 속한다.”, “조선인은 정찰과 구호사업에 종사하고 일부는 군대에서 복무하되 군 복무시는 반드시 전구 사령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등의 조건으로 조선의용대성립을 승인했습니다. 


    1698199123178.png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립기념 사진

     

    193810월 10일, 본대와  제1분대, 제2분대로 편성해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했습니다. 김원봉, 김성숙, 류자명, 최창익 등 5명이 조선의용대지도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의용대설립초창기에는 정치부 제2청에 소속되어 캉저가 담당하여 군비처우는 국민당군대와 같았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창립된지 13일 되던 날 일본군이 우한을 점령했네요. 우한이 함락되기 이틀전 조선의용대 제1지대 70여명은 중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일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진행중인 제9 전구 창사(長沙)로 이동했습니다.

     

    제2지대 73명은 제5 전구 리종런(李宗仁, 1891~1969)사령부가 소재하는 후베이성의 라오허커우(老河口)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우한을 떠나기 직전, 조선의용대 2 지대 일부 대원들은 폐허가 된 우한시내의 도로와 벽에 항일표어를 쓰고 카드를 걸었습니다. 

     

    图片2.png

     

    국민당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 제3청 장궈모뤄(郭沫若, 1892~1978 )가 자동차를 타고 우한을 빠져나갈  때, 우한일본조계지의 주민들은 이미 빠져 나가고 시내는  마치 텅 빈 묘지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의용대친구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아스팔트 도로 벽에 역청으로 글을 쓰고 어떤이는 사다리에 올라가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궈무뤄 눈길을 끌었다.

     

    은 후방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향락을 즐긴다’, ‘병사들은 피와 생명, 장정들은  훈장’ 이런 표어 문구는 자신이 어제 작문한 것인데 벌써 벽과 도로에 올라앉아 보는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