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1945년 12월, 김원봉은 서울로 돌아왔으나 자신이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바랐던 광복이 되었고 그리운 조국이었으나 이게 어찌된 일인지요. 친일파 경찰에게 뺨 맞고, 중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수모를 당합니다. 테러 위협도 있었습니다. 조국 국토는 38선으로 양분되고 미소 양군이 주둔해서 한반도를 쥐락펴락했습니다.
완전 독립을 이루지 못한 조국이지만 그래도 김원봉은 대중적인 전국 조직을 결성해서 좌우합작과 민족 반역자 배제 등을 주장하며 민족이 단합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강한 정치적 신념을 내세웠습니다. 해방정국은 어수선했습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중국에서 수십년 한 항일운동 업적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조국은 마치 그의 업적과 노력이 없어도 해방되었다는 분위기인 데다 체포망까지 다가왔습니다.
1948년 4월, 김원봉은 체포망을 벗어나 남북협상 회의에 참석한 후 남하하지 않고 북한에 남았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같은 해 9월 국가검열상, 1952년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 중앙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직책을 두루두루 맡았습니다.
1956년 8월, 소련에서 호르쇼프(1894~1971)가 스탈린의 권력에 도전할 무렵, 최창익을 중심으로 한 연안파 인사들이 소련의 반스탈린 세력들과 연계해서 김일성의 리더십은 독재이며 반국민적 정책이라고 비난하면서 김일성 반대파를 형성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노동당의 최창익, 김두봉 등 연안파 인물들은 반당 반혁명 분자로 지목되어 대대적으로 숙청을 당했습니다.
1958년은 북한당국이 ‘당의 유일사상 체계확립’에 힘을 집중하고 세대교체를 단행했습니다. 조선노동당에는 새로운 젊은 간부들이 대거 등용되고 일제침략하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서고 북조선 체제 성립에 기여했던 ‘구세대’ 사람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외세와 결탁한 ‘반국가적, 반혁명적 활동’을 획책한 ‘나쁜 놈’들로 낙인찍혔습니다.
1957년부터 김원봉의 의열투쟁은 개인적 테러리즘이라고 깎아내렸습니다. 1958년10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서는 “반국가적, 반혁명적 활동 및 종파분자들과의 관계를 이유”로 김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직책에서 해임당하고 대의원 권한도 박탈당했습니다.
결국, 1958년 11월, 김원봉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되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조국의 국권 회복과 민족해방운동에 심혈을 쏟았던 김원봉은 자신이 배출한 연안파 혁명 인물들과 역사속 으로 사라졌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참고문헌 및 자료] 金在明, 「义烈团与金元凤」(上),『月刊京乡』, 1987년 11월. 金在明, 「<金元凤的苦恼与挫折」, 『月刊京乡』(下),1987년 12월.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주)문학과 지성사, 1994년 3월. 金荣范, 『革命与义烈』,景仁文化社,2010年4月. 宋建鎬, 『宋建鎬全集』15,한길사, 2002년. 면담 이정식/편집해설 김학준 수정중보 김용호,『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2006년 5월. 김광운, 「김원봉의 1945년 광복 이후 정치 행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8집. 님 웨일즈ˑ김산 지음, 『아리랑』, 동녘, 2011년 3월. <金元鳳安光泉握手, 北平本據로 組織>, 『조선중앙일보』, 1935년 8월 24일. 金学哲著, 『无名小卒』,辽宁民族出版社,1998년 12월. 郭沫若, 『洪波曲』,人民文学出版社,1979년 3월. 石源华, 『韩国独立运动与中国』,上海人民出版社,1995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