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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8월 유기석은 친구 심여추와 파진(巴金, 1904~2005)을 찾아갔습니다. 바진은 심여추가 소개한 北海沿 東興公寓에서 묶으면서 베이징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숙박객이 많지 않고 정원에는 회화나무 거목이 있는 아파트인데 바진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심여추)는 조선인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동향의 친구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더웠지만 청명한 달밤이었다. 우리들은 정원에서 바람을 쐬었다. 심(沈)은 아주 점잖은 사람이었고 같이 온 그의 친구(유기석)는 참으로 정열적이어서 나에게 수많은 조선인 애국지사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는 모습을 도도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조선 인민의 고난에 찬, 그러나 용감한 투쟁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조선인 혁명가에 대해 나는 시종일관 경의를 품게 되었다."
1926년3월 27일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國民日報』의 부간 「覺悟」에 바진이 쓴 한 통의 공개편지가 실렸습니다. 『高麗靑年』은 유기석과 심여추가 세계 각 민족의 공존공영을 기대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1926년3월 고려청년사를 조직하고 발간한 주간지입니다. 바진은 ‘L’군의 부탁으로 베이징의 고려청년사(高麗靑年社)가 창간한 주간지『高麗靑年』발간을 지지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밝히고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작년 베이징에서 고려 친구 ‘S’와‘L’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고려 민중운동의 상세한 상황을 자세하게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특히‘L’군에게 감사한다. 고요한 밤, 밝은 달이 하늘에 높이 걸려 있던 날, 그는 고려 민중 악전고투의 전경(全景)을 자세하고도 격분에 차서 제 눈앞에 펼쳐 보여주었다."
또 "유 군은 '우리들의 고투 진상을 중국 민중에게 알려 주십시오' 당신들이 스스로 간행물을 출판하여 우리 고투의 진상을 중국 민중이 알게 하면 그들이 이러한 정신에 감동할 것이며 잠에서 깨어나 각성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편지 말미에 강조했습니다.
1925년 말을 전후하여 유기석은 조양대학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고향에서 보내오던 학비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南, 1900~1930)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중국으로 왔습니다. 안정근(安正根, 1885~1949)이 안창남을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의 군벌 옌시산(阎锡山, 1883~1960)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유기석은 안창남의 통역을 하면서 옌시산 부대에 입대하여 일 년 정도 비행기 조종 기술을 배웠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