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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8)“민남(閔南)으로 가서 신 농촌을 건설하자”
기사입력 2023.12.05 10:58유기석이푸젠의 신 농촌건설에 참여하게 된 것은 단순히 사상적 출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상과 현실은 엇갈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번뇌와 환상이 뒤섞여 밤낮으로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좌로 향하면 거기도 불평등하고, 우로 향하면 거기는 금전만능이어서 돈 없는 가난뱅이는 어디를 가도 여전히 학대받는 사회였습니다.
상하이에서 몇몇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구동성으로 “민남(閔南)으로 가서 신 농촌을 건설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소련의 무산계급 독재정치를 반대하며 무정부 공산사회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중국 아나키스트들이었습니다.
상하이 노동대학 설립 준비를 하던 이정규(李丁奎, 1897~1984)가 푸젠의 농촌 자위운동에 참여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유기석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반대하는 반공산주의 이론을 확실하게 파악했습니다. 베이징 조양대학에 재학할 때, 중국 아나키스트 신세기파를 형성한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엔페이(蔡元培, 1868~1940) 등 교수의 지원을 받아 흑기 연맹을 조직했습니다. 흑기 연맹은 중문으로 된 『東方雜誌』를 발행하여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아나키즘을 보급했습니다.
어떻게 신 농촌을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도 듣지 못했지만, 유기석은 개인영웅주의, 자유주의, 소자산계급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아나키스트로 돌아섰습니다. 도산이 거듭 만류했으나 의연하고 결연하게 흥사단을 탈퇴하고, 미국 유학도 포기하고, 중국 국민당군 제2군 신분으로 푸젠 샤먼 선전원 양성소로 가서 사회학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푸젠의 남쪽, 민남 일대는 원래 지방색이 강한 데다 청말 이래 수십 년 동안 군대와 행정관리가 부패해서 치안이 극도로 혼란스럽고 각종 총기도 농촌에 나돌았습니다. 토비들은 산악지대뿐 아니라 평야 지대에서도 군대 이상 병력을 보유하고 오늘은 관군, 내일은 토비군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두목 편에 붙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공산당도 장시성(江西省)과 인접한 푸젠 농촌에서 토호나 지방 관료들과 결탁하여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습니다.
취안저우와 해발 5~600m의 산봉우리 사이에 북송 시기에 건축한 낙양교라는 유명한 다리가 있습니다. 교량에 사용된 돌 하나 길이가 약 3m로 전부 이렇게 큰 돌을 이용하여 만든 2km 교량입니다. 토비들은 산 위에 주둔하면서 시내에 나와 강탈하거나 인질을 잡고 갖은 못된 짓을 하며 민간인들의 낙양교 출입을 방해했습니다.
토비들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받으면서 단련된 농민들은 용기와 지모로 마을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취안저우 투링(涂岭)이라는 지역에 500여 명의 토비가 양식과 돈을 강탈하러 마을에 침입하자 농민들은 두 말없이 그들의 요구를 승낙하고 타작마당에 주연을 베풀어 접대했습니다. 농민을 깔보던 토비들은 보병총을 걸어놓고 진탕 먹고 즐겼습니다. 이 때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농민 한 3~4백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토비의 총을 뺏고 마을을 지켰습니다.
샤먼선전원 양성소는 무정부주의자 지방 행정가가 민남지역 젊은이들을 훈련해 농촌에서 날뛰는 토비와 공산당의 침투를 막으려고 시작한 훈련소였습니다. 중고등학교 졸업한 농촌 젊은이 100여명이 샤먼 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선전양성소 교육을 마치면 자기가 거주하는 농촌으로 돌아가서 민간 자위단을 조직하고 하급 간부를 맡을 인재들입니다.
이 운동은 중국 아나키스트 항일운동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한인 아나키스트 유기석, 이정규, 이을규, 이기환, 정화암 등이 구심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우리의 항일투쟁을 도와준 중국 측에 신세를 갚는다는 뜻에서 참여를 했지만, 이 민단 운동이 건실해지면 우리 항일운동에 대해서도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습니다. 이런 운동은 비록 직접적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혁명근거지를 마련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고 한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연결됩니다.
유기석 등 한인들이 참여한 푸젠 신 농촌 건설 운동은 정국의 불안과 자금 부족으로 실패했습니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 동지들이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는데 유기석은 손님 접대를 맡았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