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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범재 김규흥이 조선신문사를 설립하려던 광저우 웨슈구(越秀区) 주챵샹(旧仓巷)(1)

기사입력 2024.01.2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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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10 2012년 7월이었습니다. 옥천신문사 사장님과 연구  명이 광복절 67주년 특집으로 옥천의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으러 광저우에 왔습니다. 

     

    급하게 마련된 점심시간에 제가 동석을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김규흥께서 추노(邹鲁), 호한민(胡), 진형명(炯明), 오한지(吴汉)등과 신해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손중산의 혁명동지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때여서 추노, 호한민, 진형명, 오한지는 알지만 우리나라의 범재 김규흥은 첨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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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단이 남긴 자료 중에 자료중에 김규흥이 미국한인회에 보낸편지가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에 의하면 김규흥 가명은 김복이며, 광저우 주창샹에 있는 도강병원()에 조선신문사()를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중국지사들이 장소와 경비를 제공하고 범재는 한글 인쇄기만 구입하는 조건이었지요. 상하이에 인쇄기가 있다고 해서 돈을 마련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만 동포한테 사기를 당해 돈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중국인들과 이미 약속이 된일인지라 낭패할 수 없으니 대한국민회가 인쇄구입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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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료를 접하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퇴근 후 도강병원이 있었다는 주챵상을 찾았습니다. 캄캄한 밤, 휑한 골목, 여기 어디선가 있었을 도강병원, 신문사 설립 장소와 경비를 확보하고 인쇄기 도착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돈을 사기당했습니다.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범재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다하고 목소리마져 가라앉아 편지를 제대로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범재가 편지를 쓴 날은 1911년 3월 7일입니다. 저의 김규흥에 대한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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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신문사 이안재 사장은 이렇게 특집기사를 썼습니다.

    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로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김규흥 선생이 있습니다.

    선생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규흥 선생은 일제 강점기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선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초기 독립운동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지원하고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있도록 했던 분입니다. 아직 제도권 역사학계에서의 연구가 초기단계이기에 그 전무를 알 수 없는 김규흥 선생의 일대기를 그 후손과 연구가, 김규흥선생이 활동했던 중국 현지를 돌며 자료를 확보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바로잡는데 이번 기획취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생애 전체를   없는 김규흥 선생의 일대기를 다시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합니다. 아직 기성 역사학계의 본격적인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하긴 하지만 초기 독립운동을 이끌고,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독립운동가들을 중국 혁명세력과 연결하고 지원한 분이라는 데에는 역사학계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  김규흥 선생이 풍찬노숙하며 거인처럼 누볐던 중국대륙의 흔적을 더듬어 하나하나 조각을 맞추는 작업은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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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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