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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10월25일 충칭의 중앙일보에 실린 줘루(邹鲁)의 기고문입니다. 줘루는 중산대학 초대 교장입니다. 범재 김규흥과 중국동맹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제 침략하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망국민의 실상을 목도하고 돌아온 후 줘루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늘어나서 중산대학 교장 재임기간, 한국학생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돕기 위해 이씨 성을 가진 한인 한 명을 고용하여 한국 청년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도왔다고 합니다.
범재 김규흥이 고정 수입이 없을 때 줘루가 용돈을 대어 주었습니다. 광동정부의 고관이 되어 매월 200위안을 받았으나(당시 서민 한 달 생활비 8위안)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의하면 아랫사람 월급 주고 빌린 돈 갚고 나면 어머니께 드릴 용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정수입이 있어도 돈이 부족하면 늘 줘루에게 빌렸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줘루에게 돈을 갚으려고 하면 받지 않아 범재는 인삼밭 계약서 하나를 줘루에게 주고 매년 인삼밭 소출을 줘루에게 준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한 교수님이 확인한 바, 그 당시 한국에 김규흥에게는 인삼밭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재가 사기꾼이라고 비판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만 참고로 하시고 김규흥과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국인 줘루의 글을 읽어봅시다. 범재의 손자께서 풀어쓰신 글입니다.
조선의 광복을 회고하고 축하함
글쓴이 줘루(추노, 邹鲁,1885-1954), 1905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907년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신해혁명 후 1913년 선거에서 국회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2차 혁명 실패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면서 1914년 중화혁명당에 가입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 집행위원에 당선되었고 서산회의에 가담했다. 1927년 국민당 통합 이후 국민정부위원, 중앙특별위원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상 전동현『두 중국의 기원』(서해역사책방 16) 서해문집p 367 참조
조선의 건국은 기자(箕子)로부터 이미 수 천 년이 된다. 조선은 일본에 대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일본이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시초가 조선이 전해 준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일본은 이리와 같은 야심을 가지고 끝내 조선의 큰 적이 되었다. 즉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도와준다는 미명 아래 조선이 중국과의 관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마침내 1910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는 이미 조선과는 40여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전에 내가 중국 남쪽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김범재(金凡齋)라는 조선인 한 사람이 참가했다. 그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먼저 중국의 혁명이 성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
김범재 동지는 아주 성실했다. 나는 비밀 자료를 많이 갖고 있었는데, 전부 그에게 보관시켰고, 많은 정보도 전부 그로 하여금 전달토록 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옛날 옷과 관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김동지는 진영사(陳其美)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 때까지 나는 진선생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진선생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가 상세히 말해 주었고, 동시에 나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는 진선생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와 진선생은 마음속으로 깊이 사귀었다.
무창봉기 이후 나는 광동 북벌군의 병참총관으로 선두 부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상해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에게 잠잘 방과 많은 비품이 필요했는데, 진선생은 나 대신에 사람들을 시켜 완전하게 준비를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김범재 동지가 사전에 연락을 취해준 때문이다.
광복 이후 김동지는 광동성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고문이 되기 전에는 그의 용돈을 내가 대주었다. 또 그는 나의 돈을 꾸어 간 적이 있는데 고문이 된 후 얼마 안되어 계약서 한 장을 들고 와서 말하기를 “나는 여러 번 당신 돈을 꾸었는데, 내가 돈을 갚으려 하면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조선에 인삼 밭 하나를 샀는데, 이 서류가 바로 인삼 밭 계약서다. 앞으로 여기서 소출된 삼이 매년 당신에게 보내어 줄 것이고, 이 삼 밭은 바로 당신의 사업이니 그리 알아 주시오”하고 말했다. 그 후 김동지는 해마다 삼을 보냈지만 그 당시 나는 조선에 가 본적이 없었다. 어쨋던 나는 조선에 삼밭을 갖고 있었고 이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조선인과 교류가 많았고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아졌다. 민국 12년(1923년) 나는 국부 손문의 명을 받아서 국립 광동대학을 설립하고 멀리 월남, 대만 및 조선 청년의 입학생을 모집했고, 입학시험에 편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수업료 면제 대우까지도 하고, 또 의복과 책도 공급하여 조선 등의 청년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입학하도록 하여 조선의 광복 활동 인재를 많이 양성코자 했다. 국부가 서거하고 난 이후 나는 학교를 떠났지만 조선 학생들이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들었고 귀국한 조선 학생들이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수난을 당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민국 18년(1929년) 나는 전 세계 29개국을 돌아보고 귀국한 뒤 국내의 정치 상황이 안정되지 못함에 크게 상심하여 일본으로 가서 휴양을 했다. 그 때 황염배 선생이 저술한 조선에 관한 책을 보니, 일본의 조선통치가 우수하다 평하고 그로 인하여 조선의 교육, 공업, 농업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민생은 어떻게 안정되었는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것이 아주 이상하다 생각하여 조선으로 직접 가서 실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이때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발생하여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했고 나는 조선과 동북 3개성을 살펴보고 황염배 선생이 책에 쓴 내용이 실제와 같은지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바로 눈에 보이는 그 곳은 비인간적인 사회인지라, 이때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詩로 썼다.
집들은 납작납작하고
그 위로 넓은 하늘, 달은 휘영청 밝다.
길쌈은 별 것 없고, 사는 모습은 희미하다.
비쩍 말라, 뼈대만 남고 정신도 지쳤다.
간간이 들리노니 신음소리뿐이다.
길가에는 낡은 옷과 모자를 내다 놓고 팔아서 쓰겠다고 점포를 차렸구나.
몇 가지 중국 물건을 함게 파는 모습
내 마음이 상하여 눈에 계속 아른거린다.
부산에서 경성가는 기차를 타고 북으로 달리며 자주 창밖을 바라다보니 곳곳이 처참하고 황량하여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다시 오언(五言) 시를 읊는다.
기차는 부산을 떠나
북향하여 경성으로 달린다.
철로변의 민가 모양
내 마음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쪽이 찌그러졌는가 하면
서쪽도 내려 앉았구나.
황량하여 가시와 잡초더미지붕은 제대로 이지 못했고
네 벽은겨우 진흙 칠을 했구나
조그마한 서너자의 집이지만
한 가족이 들어가 사누나.
쓸쓸하게 세간은 없고
이리저리 잡초만 무성하다.
마소와 같이 잠자고
닭, 오리와 같이 밥을 먹는다.
산하는 그래도 예쁘고 미더우나
산사람을 살았다 할 수 없다.
벼와 밀 이삭은 실하지만
농사짓는 이가 먹을 수가 없네.
사는 모습이 어찌 이리 참혹한가
아 망국민의 슬픔이여
이로써 황염배선생의 글과 내가 본 것이 상반됨을 알 수 있다. 황선생은 자료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나중에 황선생의 서문에 보니, 그의 조선 방문은 일본인 초청에 의한 것이고, 그가 취재한 것은 도서관에서 얻은 것이고, 황선생이 어떤 지역을 방문하면 전부 일본인의 안내에 의했다 한다. 그래서 나는 황선생이 당시 조선의 망국인민 실상을 볼 수 없었음을 확실히 알았다.
열차가 경성에 도착하여 각지를 살펴보고 느낌도 많았고, 시도 몇 편을 썼는데 여기서 여덟 수를 기록한다.
산하는 예대로이지만 주인은 옛 주인이 아니로다.
남아 있는 궁궐은 빛에 바랬구나.
흥망을 보노라니 감개가 무궁하고
公子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네
– 경성의 저녁–
고궁에 곡식을 심다니, 자못 애처롭다.
웃음 띈 홍안은 다시 볼 수 없구나.
지난 날 가무 울림은 묻지도 마라
사슴만이 쌍을 지어 손님을 맞네
– 동물원으로 꾸민 옛날 창경궁을 방문함 –
창경이란 옛 이름을 아직도 가졌지만
짐승들과 놀이기구 어지러이 널렸구나.
구경 끝날 즈음 상심케 하는 전시물 하나.
지난 날 고국의 일을 말하고 있구나
- 창경궁의 조선의 옛 물건을 모아둔 박물관을 보고–
패배의 기분은 성안에 가득하고
나라 안은 해와 달이 다시 시작되네.
독립 향한 교두보는 찾을 길 없고
이 강물만 여전히 漢字 이름 가졌네
- 한강 다리위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
넓은 들판 군사들로 가득하다.
기병 보병 포병 공병 나누어져 있네.
삼엄한 보루는 기세등등한데
자세히 보니 한국군이 아니고 일본군이로구나.
- 들판의 군병을 보고 -
또 다시 박람회 열었다더니
땅과 물에서 나는 만물 다 모았구나.
문득 지난 날 이상한 기억이 생각나네.
만주 몽고 산물이 한국과 대만에 온 것인지.
- 9월에 경성에서 조선 박람회가 열렸다. 일본이 전에 동북 3성과 몽고 물산 전을 열면서 생산지 이름을 만주, 몽고 외에 조선, 대만으로 나란히 썼다. –
“다 함께 배우고 일으켜 동화하자!”
달콤한 말로 어찌 세인의 공감을 받겠나.
오래된 간격을 그리 쉽게 건너려 하다니
골목마다 울리는 음악 소리 못 듣는가?
- 일본 본토와 조선을 동화시키고자 일본은 조선에서 선전 활동에 열중한다. –
이완용을 매국노라 원망하는데
후영은 이등박문 찬양시를 썼구나.
지금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라 할 지경인데
이등을 다시 욕하고 말고 겨를이 없네
- 이번 경성 여행 시에 이완용이 이등박문에게 보낸 시를 보았다. 그 시에–
인생 백 가지 일 기약할 수 없으니
흰머리 되고 난 후 만남 또한 기이하다.
삼십년 전 그대에게 준 말 기억하오?
좋은 세월 다시 오면 만나자고요.
나는 경성 구경을 끝내고 평양으로 가서 기자릉을 참배했다. 기자릉을 보기 전에는 일본이 조선 인민을 고압적으로 다룬다는 것 만을 대단히 원망했다. 그러나 기자릉을 한번 보고 난 후에, 조선사람들이 능 주변 숲을 꾸민 기술과 그 웅장한 기세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능을 잘 보존하는구나 생각하니 불현듯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때 그 느낌을 한편의 시로 쓴다.
기자 나라에 와서 마침 기자릉을 참배하니
상나라 주나라 성하고 망함은 비교도 안 되네.
이 능도 숲이 우거져 오히려 기상 넘치고
대동강 물 휘이 돌아 구불구불 흘러간다.
모란봉 위에는 큰 나무가 푸르렀고
아름다운 산과 물 잘 보존했구나.
삼천 년 지난 지금 이곳에 내가 와서
계단을 밟고 올라 재배하니 감개무량하다.
길고 긴 역사 중에 흥망을 거듭해 왔으니
이 나라 문화도 일찍부터 열렸구나.
오늘에 와 기자를 성인이라 부르며
그 동안 몇 왕조를 이루었구나.
관리들 서로 의지하여 역사를 만들어와
삼십년 전 까지도 나라를 유지했는데
오늘 통치는 간데없고 오히려 능멸뿐이라.
소 말 노예처럼 채찍 받고 달리누나.
성인 기자의 영감 그대로
샘물은 여전히 솟아나고
기자의 기운도 바야흐로 솟아나니
원컨데 기자 샘은 마르지 말고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낼지라.
능 주위에 빽빽이 둘러 선 수 많은 나무들
이 능을 포근히 덮어 주듯이
천추만세 그치지 말고 이어지고저.
나는 조선을 둘러보고 조선인의 망국의 아픔을 목격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이에 따라 늘어갔다. 그 후 중화민국 20년(1931년)에 내가 다시 중산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 조선 청년의 입학을 더욱 지원했다. 그 때 이 모 선생으로 하여금 조선 학생 입학시키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한번은 의학원의 어떤 조선 학생이 일본 영사관에서 몰래 보낸 사람에게 체포되어 갔는데, 나는 직접 일본 영사관에 교섭하여 석방을 요청했지만 일본 영사관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영국 대사관에 교섭하여(일본영사관은 그 때 샤면의 영국 조계에 있었다.) 그 조선학생이 비로소 자유를 회복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 사람은 나에게 광주에 있는 조선혁명당 인사 및 운영 상황을 말하라고 요구했는데,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참나무 껍질로 몽둥이를 만들어서 나를 때렸다.(참나무 껍질로 사람을 때리면 상처는 나지 않으나 뼈가 부러지고 나아가 죽을 수도 있다.) 내가 발설하도록 고문을 하였으나 나는 아픔을 참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나는 풀려났는데, 내 몸은 이미 많이 상했다. 다행히 학장이 바로 와서 나를 구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치료가 늦었으면, 그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서남정무위원회를 맡고 있어서, 광동성에 오는 조선 당인과 그 조직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 당인과 조선 학생이 학교에 많았다.
노구교사건(1937.7.7) 이후 우리나라(중국)는 수천 년 간 볼 수 없었던 신성 항전의 깃발을 올려 대 일본 전쟁에 뛰어들었다. 조선 학생과 조선 당인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의 항일 진영에 참여하고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중국의 항전이 승리하고 독립운동이 마침내 성공했다.
이에 즈음하여 당(국민당)중앙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고 조선 인민과 중국 인민 모두 즐거워한다. 나는 수 십년 동안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그 즐거움은 재론의 필요가 없이 큰 것이므로, 이에 이 글로서 축하의 뜻을 표한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