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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신해혁명 성공 후 김규흥은 광동군정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광동성의 군사와 치안을 담당하는 최고 기구 广东总绥靖处(广东总经略处)의 참의(參議)인데 광동성 도독(현재의 성장직)이 관할하는 최고 군사기관의 고문이 된 것입니다. 그 이듬해는 광동성이 아닌 중앙정부의 호군사서(護軍使署) 고문으로 승진했습니다.

김규흥은 용기가 생겨 광동도독부 참모장 등중위안(邓仲元, 1866-1922)을 찾아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상의했습니다.
중화민국의 의원 뤄아치 뤄아치(罗蔼其)가 김규흥에 대해 쓴 글입니다.
“중국의 신해혁명은 당시의 일본 식민지 통치하의 조선인민에게 큰 용기를 북돋우게 했다. 멀리서 광동까지 온 조선혁명지사 김복(김규흥)은 광동군정부 당국과 조선의 독립에 관련해서 상의를 했는데 광동도독부 참모장 등중위안은 이 일을 그의 비서 뤄스양(罗师扬, 罗幼山)에게 맡겨서 처리를 하게 했다.”
뤄스양은 중국과 조선의 국경지역에 황무지를 개간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조선인민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근거지를 설치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개간은 명분이고 사실을 독립을 위한 농민병을 양성하는 방안인데 당국은 김규흥과 뤄스양, 뤄아치 등을 동북으로 보내 현지조사를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1912년 9월12일, 일행이 동북삼성에 도착을 했지만 그 때 임시총통직을 양위받은 위안스카이(袁世凯,1859-1916)가 정변을 일으켜 중화민국 당국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현지를 관할하는 도독도 핑계를 대면서 일을 못하도록 말려서 일행은 1913년 1월 28일 광동으로 돌아왔는데 총 139일이 소요된 탐방이었습니다.
이 때 동북지역 현장답사에 동행한 뤄아치가 현지 답사 소감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서 <壬子旅行记>를 남겼는데 김규흥이 중화민국 고위직에서 진행하려고 했던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나라를 잃은 망명객이지만 중국의 고관이 된 김규흥은 어릴 적 자신의 스승이자 친척인 김유성진사의 생일선물로 담배곽에 친필 시 한 수를 새겨 보냈는데 이 싯귀에서 당시 김규흥의 심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孚轩三叔大人道玩 孚轩 三叔大人께 드립니다.
天壤求唇齿 이 세상 천지에 입술과 이빨처럼 밀접함을 요구함은
한국, 중국 서로 도울 크나 큰 뜻 지니고 있음이니
风霜炼肺肝 역사에 명심하며 다져 오던 참마음은
오랜 세월 두고두고 뼈 속 깊이 사무쳐 있었나이다.
孤槎衡浪渡 나 홀로 뗏목 위에 외롭게 의지하고
거친 파도 헤치고 와 이곳에서 몸 던져 일하고 있나이다.
雄剑映星看 외롭고 고탈픔에 고향생각 넘치는데
별빛 비친 나의 칼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보고 있으면
不胜耻归赵 돌아갈까 유혹 속에 흔들렸던 내 심사가
눈뜨고 깨달으니 부끄러움 그지없어 몸둘 바가 없나이다.
有生终报韩 조국에 바친 이 몸 다른 생각 있으리까
이 목숨 다하도록 힘쓰고 힘을 써서 애국애족하오리다.
中原足豪杰 중국 땅 이곳 저곳 뜻 맞는 동지 찾아
한국사람, 중국사람 호걸도 많사오니 손에 손을 잡으리로다.
相與济艰难 서로가 힘을 모아 뭉쳐진 힘 보태며는
지금의 모든 간난 구제할 수 있으리라 다짐합니다.
姪复敬题 조카 복이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참고, 김한영 편저, 『凡齋와 獨立運動』, 도서출판 서울정판, 2002년4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