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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의 한 여행객, 해변에서 떨어져 다쳐 무료 헬리콥터 출동최근 여러 누리꾼이 심천 동서충(东西涌) 해안선 관광지에서 중년 여행객이 부주의로 떨어져 부상을 입고, 120응급전화를 걸었는데 뜻밖에도 헬리콥터가 출동했다고 글을 올렸다. 심천시 응급센터 직원은 '2009년부터 심천은 공중 의료구조 작업을 전개해 왔으며, 현재는 비교적 성숙한 항공 의료구조 체계를 형성했다'고 밝혔다. 누리꾼들이 관심 갖고 있는 비용 문제에 대해 그는 '요구에 부합되면 무료'라고 말했다. 다리를 다친 중년 남성 여행객은 걷지 못했고, 주변에 있던 시민이 120에 연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색 헬리콥터 한 대가 사고 지점 위에 도착했으며 구조대원 한 명이 부상자를 자신의 몸에 고정시켜 로프를 통해 비행기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헬리콥터는 심천대학(리후캠퍼스) 운동장에 착륙했고, 부상자는 근처에 있는 심천대학교 총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어떤 상황에 헬리콥터를 구조에 참여시킬 것인지에 대해 심천 응급센터 직원은 '120에 연락하면 의료진이 판단하고 항공사 쪽은 날씨 등 상황을 종합해 출동 여부를 판단한다'고 말했다. 심천은 2009년부터 공중 의료구조를 탐색했고 2019년에 공중 120을 정식 개통했다. 심천 항공 의료구조 체계는 심천시응급센터가 심천시동부통용항공유한회사와 시내 8개 병원과 연합하여 구성되었다. 8개 병원 중 중국의학과학원 부외병원심천병원은 심혈관 환자만 받는다. 심천시 인민병원, 북경대학교심천병원, 심천대학교 총병원, 홍콩대학교심천병원, 중산대학교 부속 제7병원, 심천시 용강중심병원, 옌텐구 인민병원 등 7개 종합 수용병원은 심천 120이 통일적으로 업무를 배정한다. -
6월말 개통! 심천에서 중산까지 30분 밖에 걸리지 않아!최근, 광동성 교통운수청공식 웹사이트에 '고속도로 요금 조회'에서 일부 고속도로의 심중통로(심천-중산)(深中通道)를 경유하는 요금 기준이 출시되었다. 현재 보안에서 중산까지 가는 최저가격은 연강고속도로 서향(북)출입구에서 광동취형동역 심중통로 출입구까지 가격은 웨퉁카드(粤通卡) 64.6위안, 현금요금 68위안이다. 심중통로에서 보안까지의 첫 번째 요금소: 심천공항역은 아직 개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홈페이지에서 잠시 조회할 수 없으며 원래 발전 및 개혁부서에서 발표한 요금 기준에 따르면 최저가격은 웨퉁카드 62.7위안, 현금요금은 66위안이어야 한다. 광동성 교통운수청 홈페이지 첫 페이지의 '고속도로 요금조회'에서 출발점은 ' 광동시샹북역'(西乡北站) 즉 시샹진완대도에 위치한 연강고속도로 시샹북요금소를 입력하고 종점은 광동취형동역 심중통로를 입력하면 요금금액, 요금거리 및 통행경로를 볼 수 있다. 웨퉁카드를 사용하여 지불하면 결제금액은 95% 할인인 64.6위안이다. 보안의 출발지는 광동다찬완역(시샹보구로)(大铲湾站,西乡辅九路)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심중통로를 거쳐 건설 중인 텐센트 본사에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노선이며 요금가격은 웨퉁카드 66.43위안, 현금으로 70위안을 지불한다. 심중통로를 거쳐 서쪽으로 운행하면 연강고속복해요금소(福海收费站), 국제컨벤션센터 요금소에서 보안복해가도 각 곳과 심천국제컨벤션센터에 도착할 수 있으며 요금가격은 각각 웨통카드 우대가격 68.4위안, 70.17위안이다. 심중통로를 거쳐 보안에 도착하는 첫 번째 요금소는 바로 심천공항 고속요금소이며, 심천보안국제공항 주변의 시정도로에 빠르게 통할 수 있으며, 앞으로 공항구역의 물류기업이 고속도로로 오르내리는데 매우 편리할 것이다. 현재 고속도로 요금소는 건설이 완료되었지만 광동성 교통운수청 홈페이지에서는 아직 이 역의 정보를 조회하지 못하고 심중통로가 이전에 공시한 요금기준과 건설소식을 종합하면, 중산취형동역에서 심중통로를 거쳐 이 역에 도착하면 심중통로 전 구간의 차량통행 최저요금으로, 즉 현금요금은 66위안, 웨퉁카드는 95% 할인가 62.7위안을 누릴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번달 말(6월)에 심중통로가 곧 정식으로 개통될 것이며 그때 심천에서 중산을 왕복하는 교통 시간은 2시간 정도에서 30분 정도로 단축될 것이다. -
글로벌 최고 갑부 교체! 중국 최고 부자는?최근, 후룬연구원(胡润研究院)은 "2024 후룬 글로벌 부자 순위"를 발표했다. 총 3,279명의 10억 달러 기업가가 명단에 올랐는데 이는 작년의 3,112명보다 높은 수치이다. 데이터에 따르면 10억 달러 기업가 수는 5%, 총 재산은 9% 증가했다. 비록 155명이나 줄었지만, 중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10억 달러 기업인이 가장 많은 나라로 814명이 뽑혔다. 미국이 800명으로 뒤를 이었다. 베이징, 상하이, 심천은 중국의 10억 달러 기업가들이 가장 많이 사는 3대 도시이다. 1. 머스크 세계 최고 부자 등극, 중산산(钟睒睒) 4년 연속 중국최고 부자 52세의 일론 머스크는 1조 6,700억 위안의 재산으로 최고 부자 자리에 다시 올랐는데 이는 테슬라의 기록적인 인도 물량으로 주가가 급등한 덕분이다. 한편 머스크의 우주 탐사 기술 회사인 스페이스X는 성공적인 발사, 위성 인터넷 프로젝트, 그리고 이익이 많은 정부 계약의 지원으로 새로운 고도에 도달했다. 34세의 미국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는 85억 위안의 재산으로 처음 이름을 올렸다. 그의 재산은 일반적인 스타의 부업이 아닌 음악으로 밝혀졌다. 그녀의 재산의 절반 이상은 로열티와 투어(巡演) 수익이였으며, 여기에는 '타임 투어' 첫 공연에서 벌어들인 1억 9천만 달러와 흥행 수익 3,500만 달러가 포함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그녀의 음악 앨범의 가치, 특히 그녀의 처음 발행한 여섯개 앨범이 2020년에 클로버 캐피털에 3억 달러에 팔린 후다. 70세의 중산산은 재산이 작년보다 9% 줄어든 4,500억 위안으로 네번 연속 중국 최고의 부자가 됐다. 전 세계에서 21위로 6위 떨어졌다. 홍콩계 상장회사인 눙푸산취안사(农夫山泉)는 지난해 상반기 매출과 수익이 전년 동기 대비 14%와 16% 증가하여 실적이 두드러졌다. 산하의 또 다른 A주 상장회사인 완타이바이오(万泰生物)는 지난 1년간 실적이 다소 하락하여 주가가 전년 동기 대비 거의 30% 하락하였고 회사의 시가총액은 전년 동기 대비 350억 위안 감소했다. 눙푸산취안은 “2023후룬 세계 500대 기업”에서 211위를 차지했다. 44세의 황정(黄峥)은 지난해보다 71% 증가한 1,600억위안으로 올해 중국에서 재산이 가장 많이 증가한 기업가로 3,850억위안으로 처음으로 중국에서 2위로 상승했다. 전 세계 24위로 15위 올랐다. 핀둬둬(拼多多)의 작년 3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총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90% 이상 증가하여 시장 예상을 훨씬 초과했다. 그 외 해외사업인 Temu와 콰이퇀퇀(快团团) 사업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작년 11월, 핀둬둬의 시가총액은 한때 알리바바를 추월했다. "2023후룬 세계 500대 기업"에서 63위를 차지했다. 53세의 마화텅(马化腾)은 작년보다 10% 감소한 2,500억 위안으로 중국에서 3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36위로 5위 하락했다. "2023후룬 세계 500대 기업"에서 텐센트는 17위를 차지했다. 완다(万达)의 왕젠린(王健林) 가문의 재산은 300억 위안으로 72% 줄었다. 비구이위안(碧桂园)의 양후이옌(杨惠妍) 가문의 재산은 440억 원으로 60% 줄었다. 희차(喜茶) 33세의 니에윈천(聂云宸)은 재산이 20% 증가하여 85억 위안에 달했으며 중국 최연소 자수성가한 10억 달러 기업가이다. 2. AI가 부를 만드는 새로운 엔진이 되다. AI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새로운 부의 절반 이상이 AI에서 나온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Meta, 아마존, 구글 모회사 Alphabet,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등 클라우드 컴퓨팅 관련 기업가들의 부가 크게 늘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처음으로 부가 크게 증가해 전 세계 30위권에 진입했다. 한우지(寒武纪)의 천톈스(陈天石), 미디어텍(联发科技)의 차이밍제(蔡明介), 베이징 AI기업 4Paradigm(第四范式)의 다이원옌(戴文渊) 등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가들도 부(富)가 비교적 빠르게 증가했다. 이상하게도 OpenAI는 1000억 달러에 가까운 가치가 있지만, 설립자인 샘 올트먼은 지분이 없다고 해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고 후룬바이푸 회장 겸 수석 리서치 책임자인 후룬은 분석했다. 지난해 1위였던 버나드 아놀트(伯纳德·阿诺特)는 올해 명품 업계가 부진해 1,900억 위안으로 가장 많이 줄었다. -
호남 장가계(张家界) 한국인들에게 인기폭발, 한국에선 "부모님께 효도하려면 장가계 여행 보내드려라"는 말도 있어"장자계(张家界)의 산에는 한국인이 '자라' 있었다."(张家界的山上‘长’满了韩国人) 이것은 한국 관광객들로 붐비는 장자계를 묘사한 소셜 미디어의 과장된 표현이다. 최근 '중국에 간 한국인 관광객 수가 900% 폭증했다'는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는데 뜻밖에도 한국 관광객들은 거의 모두가 호남성 장자계로 직행했다. 국토교통부에 통계에 따르면 지난 2월 한국 국제선 이용객 717만 6000명 중 중국선 이용객은 101만 8000명으로 14.19%를 차지했다. 중국 노선의 월간 승객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선 것은 2020년 1월 이후 처음이다. 한국 항공업계는 중국 노선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4월 24일부터 인천~정저우 노선을 주 4회, 4월 23일부터 인천~장자계 노선을 주 3회 운항하기로 했다. 아시아나항공은 7월~8월 김포~베이징 노선을 매일 운항하고 인천~톈진, 청두, 시안, 충칭, 선전 등 5개 노선을 새로 취항하기로 했다. 제주항공은 여름 항공편에 전남 무안~장자계 노선을 주 4회 추가 운항할 계획이다. 이스타항공도 올해 상반년에 인천~상하이 노선을 취항할 계획이다. 강영남은 동북 길림성 출신으로 장자게에서 20년 이상 여행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장자계에서 '대용워드'(大庸沃得)라는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주로 한국시장 출국 및 입국 관광 업무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기자에게 "장자계에서 한국의 여러 도시까지의 국제선 항공편이 운항 재개되고 전세기 정책이 개방됨에 따라 최근 장자계를 찾은 한국 관광객들이 예년보다 두 배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이 장가계를 방문한 인수 중에 한국인들이 가장 많았으며, 한국 여행 사이트에서 장가계는 "한국인 선호도 1위"의 중국 관광지로 평가되었다. "부모님께 효도하려면 장가계로 여행을 보내드려라"는 말도 있다. 올해 들어, 중국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장가계에 또 다른 "한류"(韩流) 열풍이 불고 있다. 중산대학 관광학원 교수 장차오지(张朝枝)는 “시장과 정부의 역량이 서로 협동하고 서로 지지하여 입국 관광시장의 독특한 현상을 형성했다" 고 말했다. -
왕홍 케이크점(熊猫不走) 부도, 천여명 직원 급여 발급하지 못해최근, 디저트 브랜드 “판다는 가지 않는다”(熊猫不走) 공식웨이보는 판다는 가지 않는다 케이크의 창시자는 연락 투절이고 3~4개월 동안 천여명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고 사회보험도 납부하지 않고 딩딩회사단체방(钉钉)도 해체된다는 소식을 올렸다. 회사 직원은 “회사는 3월 16일에 갑자기 업무정지라고 발표하였고 많은 배송원들은 해산될 때까지 여전히 케이크를 배송하고 있었다"며 말했다. 직원이 제출한 캡쳐화면에 따르면 회사가 부도나기 전, 회사 창시자 양전화(杨振华)는 업무단체방에 회사 관리 및 코로나 등 내외부원인으로 회사를 되살리지 못했다며 채무를 갚을 형편이 되지 않아 법원, 공안의 처리를 받겠다고 밝혔다. 3월 16일 저녁, 호남 장사의 배송원 정모는 “8개 케이크를 배송하고 마지막 케이크를 배송하던 길에 회사 부도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동료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업무단체방 해산을 보고 많이 속상하고 앞이 막막해졌다. 아직 2개월 급여를 받지 못했다”며 말했다. 그는 “지난해 12월달부터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고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달 급여는 두번에 나눠 줬는데 아직 2개월 급여 만 위안을 받지 못했다.”며 전했다. 항저우에서 운영을 담당하던 임모는 “동료의 연락을 받고 회사 단체방을 확인했을 때 회사 업무회복이 어렵게 됐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루 전 만해도 영도로부터 이튿날부터 정상 출근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말했다. 지난해 8월에 입사해서부터 임모씨는 첫 달 급여만 제때에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은 급여일은 3월 11일이며 아직 3개월 급여를 받지 못했고 업무과정에 발생한 비용도 받지 못한 상황이다. 회사 단체방이 해산된 후 직원들이 새로 만든 단체방에 240여 명이 가입했고 그들이 받지 못한 급여는 최소 2,000위안, 최고 5만 위안이고 대부분 직원들이 받지 못한 급여는 5,000-10,000위안 정도이다. 직원들은 “회사측은 그들에게 이직수속(离职手续)을 처리해주지 않았고 배상에 관한 내용도 협상하지 않았다”며 밝혔다. 직원들이 회사 부도소식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일부 소비자도 마지막 날에 여전히 온라인 쇼핑몰에서 제품을 구입하고 충전했다. 3월 16일 점심, 혜주의 샤오리는 온라인플랫폼(熊猫不走蛋糕预定平台)에서 179위안짜리 남편의 생일케이크를 구입했는데 저녁 7~8시가 되어도 배송을 해주지 않아 고객서비스를 연락하려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근처 케이크집에서 새로 구입하게 되었다. 판다는 가지 않는다(熊猫不走) 브랜드는 2017년에 설립되었으며 주로 온라인에서 주문을 받고 창고에서 배송하는 생일 케이크 판매와 배송서비스를 제공하였다. 2019년 11월까지 회사는 약 500만 명의 사용자가 있으며 월 영업액은 3,000만 위안이 넘었다. 판다는 가지 않는다는 매개 도시에 생산중심을 설립하고 생산중심에서 주변 배송점으로 보내고 판다 옷을 입은 배송원이 집까지 배송하고 노래와 춤, 마술, 게임 등이 그들의 판매 포인트였으며 많은 소비자들이 좋아했다. 판다는 가지 않는다는 혜주, 불산, 동관, 주해, 중산, 청두, 하문, 장사, 중경, 항저우 등 2, 3선 도시와 광저우, 심천 등 1선 도시에도 배송점이 있었다. -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한 도강병원 원장 우한츠우리가 쥐창샹(旧倉巷) 골목을 탐방하는 목적은 범재 김규흥이 청나라 말기의 주소 쥐창샹 39번지(현 주소 미확인)에 있었던 도강병원(图强医院)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강병원 원장 우한츠(伍汉持, 1872-1913)는 직접 동북지역에 가서 한국독립운동기지를 세울만한 땅을 물색한 인물입니다. 본인이 직접 동북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혁명동지들에게 보고를 했더니 모두들 좋다고 호응을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연락기관으로 조선신문사를 설립해서 상호연락도 하고 민심을 고취하는 신문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는데 우한츠가 자신의 도강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한 것입니다. 범재는 상하이에 놀고 있는 한글인쇄기가 있다고 해서 인쇄기를 구입하려고 돈을 모금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만 돈을 동포에게 사기당하고 조선신문사 설립은 무산되었습니다. 우한츠는 어떤 사람일까요? 범재 김규흥과 우한츠는 1872년생 동갑입니다. 신문사 설립을 준비하던 1911년 두 분은 39세였습니다. 우한츠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쑨원이 의사가 되어 구국활동을 한다는데 감동을 받고 본인도 포산(佛山)에 있는 영국인 선교사가 개설한 의학당에 입학했습니다. 1899년 27세에 의학당을 졸업하고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광동성 카이핑현(开平县)에 병원을 개원하고 홍콩으로도 다니며 의료활동을 하면서 폭넓게 혁명인들을 사귀었습니다. 1901년 남아프리카 모 선박회사가 선상 의사를 모집하자 우한츠는 혁명활동을 하고 해외에서 무기를 들여오려면 선상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자원했습니다. 1904년까지 선상 의사로 활동을 하다가 1906년 광저우 쥐창샹에 도강병원과 도강의학당을 개원했습니다. 도강의학당에서 공부하던 남학생이 40여명이었는데 대부분 혁명지사들이었습니다. 도강병원을 개원한 그 해, 우한츠가 법정학당(法政學堂)의 감독 샤통허(夏同龢)의 중병을 완치하고 그를 통해 법정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때 법정학당에서 공부하는 줘루(邹鲁, 1885~1954)와 천중밍(陈炯明, 1878-1933)을 만나고 혁명동지가 됩니다. 신해혁명 성공 후 우한츠는 중화민국 국회의원 신분으로 위엔스카이(袁世凱, 1859~1916) 탄핵을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1913년 8월 19일 자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 때 우한츠는 31세였습니다. 우한츠 사후 도강병원은 우한츠기념병원으로 세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중산대학부속암전문병원(中山大学附属肿瘤防治医院)이 도강병원의 전신이며 현재 광저우시내 동펑동로(东风东路)에 소재합니다. 가족들이 천진에서 우한츠의 시신을 찾아와 우한츠기념병원 옆에 무덤을 마련하고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1979년 동펑동로 도로 확장을 하려고 담당자들이 우한츠 후손과 협의해서 이전하려고 무덤을 팠는데 무덤은 이미 훼손되고 유골항아리가 없어졌습니다. 부득불 유골없는 무덤을 병원내에 마련하고 2008년 광저우문물 보호기관으로 지정했습니다. 우한츠 사후 97년이 되던 2010년 9월 8일, 광저우 중산대학부속암병원 증축공사장에서 우한츠의 유골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원래 무덤이 있던 곳에서 약 15미터 떨어진 곳인데 전문가들이 현장을 조사하고 확인한 바, 우한츠의 유골임을 확정하고 현재의 묘원을 마련했습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누군가가 우한츠 무덤이 훼손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옮겨놓은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우한츠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운 것은 100여년 전의 일입니다. 자신의 득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진심으로 한국이 독립하기를 소망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친히 동북지역을 탐사하고, 자신의 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했던 우한츠, 꽃 한 송이라도 들고 찾아가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참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광저우 지하철로 선전 시중심으로 직통! 전체 75분 소요최근,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南珠(中)城际) 선전-광저우 지하철은 운행할 예정이다.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는 건설 후 선전-남사-중산 도시간철도(深南中城际)와 연결돼 운행할 것이며 이는 선전-광저우가 지하철직행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 프로젝트십육용(十六涌) 작업 시공 현장에서 광저우 지하철공동 건설 단위는 5대의 실드 굴진기(盾构) 집중 시발식을 거행했다. 포성과 함께 5대의 실드 굴진기가 일제히 출발하여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의 완칭사(万顷沙)-이십용(二十涌) 구간이 시공의 절정기에 진입했음을 알렸다.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가 건설되면 광저우 지하철 18호선, 광저우 지하철 18호선 북연선(广花城际), 광저우 지하철 22호선 북연선(芳白城际)과 연결되어 운영될 것이며 향후에 선전-남사-중산 도시간철도(深南中城际)와 연결되어 광저우, 선전, 중산, 주하이 시민들이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다.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가 건설이 가속화되면 웨강아오다완취(粤港澳大湾区)의 "한 네트워크, 한 티켓, 한 도시" 철도 교통 네트워크 형성이 가속화되고광둥-선전-중산-주하이를 연결하여 도시간 철도와 지하철의 "원활한 연결"을 실현하게 된다.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는 2020년 8월 발전개혁위원회가 승인한 "웨강아오다완취 도시간 철도 건설 계획"의 18개 건설 프로젝트 중 하나로 동서 2개 구간으로 나뉘며 서쪽 구간은 중산, 동쪽 구간은 주하이에 연결된다.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는 다완취 도시간 철도와 광저우 지하철 네트워크 간의 상호 연결을 실현할 수 있는 첫 번째 철도 프로젝트이며, 북쪽 끝의 출발역인 완칭사역은 광저우 지하철 18호선 완칭사역과 연결된다. 광저우 지하철 관계자는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광저우 지하철은 “4개 네트워크의 융합”을 실현하고 도시 간 철도의 버스화 자율화 운영을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남사-주하이(중산) 도시간 철도는 선전-남사-중산 도시간철도와 연결되어 운행될 것이며, 이는 광저우 시민이 광저우 지하철을 통해 선전 시중심까지 직접 이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광저우 지하철 관련 책임자는 "광저우 시내에서 중산 시중심까지 50분, 주하이 시중심까지 60분, 선전 시중심까지의 운행 시간은 75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건설은 주장 동서 양안 주민들의 이동에 더 편리하고 빠른 교통수단을 제공하고 웨강아오다완취의 도시 경제 건설에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2023년 12월 20일, 광동성 인민정부는 "선전 도시권 발전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에 따르면 혜주는 쉐이관선 도시간철도남연선(穗莞深城际南延线), 선전-혜주 도시간철도(深惠城际), 선전공항-다야완 도시간철도(深大城际), 선전-혜주 도시간철도 다펑지선(深惠城际大鹏支线), 동관-혜주 샤오진커우-혜주 북단 프로젝트 계획건설을 가속화하고 선전 동부 지역과 혜주공항의 고속 궤도 교통을 계획하고 추진한다. 그 중, 선전-혜주 도시간 철도는 선전, 동관, 혜주를 연결하며 웨강아오 도시간 철도 교통망의 중요한 부분이다. 전체 노선에는 11개의 역이 있으며 모두 지하역이다. 2021년 12월에 착공하여 2026년 12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2024년 1월 31일, 동관시정부 업무 보고에서 2024년 중점 업무에서 둥관 1호선 남쪽으로 선전 6호선을 연결하고, 선전 11호선은 장안까지 연장하고, 10호선은 봉강(凤岗)까지 연장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언급했다. 동관 양광망에 따르면, 현재까지 동관 지하철 1호선 1301-1공구 3개 역의 본체 구조가 모두 마감됐으며 5개 구간중 3개 구간이 관통되어 동관 지하철 1호선의 원활한 관통을 위해 한층 더 튼튼한 기초를 다졌다. 이 노선이 완공되면 광저우 및 선전의 철도 교통이 상호 연결될 것이다. -
[중국한인역사] 줘루의 기고문(5) - 조선의 광복을 회고하고 축하함1945년10월25일 충칭의 중앙일보에 실린 줘루(邹鲁)의 기고문입니다. 줘루는 중산대학 초대 교장입니다. 범재 김규흥과 중국동맹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제 침략하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망국민의 실상을 목도하고 돌아온 후 줘루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늘어나서 중산대학 교장 재임기간, 한국학생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돕기 위해 이씨 성을 가진 한인 한 명을 고용하여 한국 청년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도왔다고 합니다. 범재 김규흥이 고정 수입이 없을 때 줘루가 용돈을 대어 주었습니다. 광동정부의 고관이 되어 매월 200위안을 받았으나(당시 서민 한 달 생활비 8위안)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의하면 아랫사람 월급 주고 빌린 돈 갚고 나면 어머니께 드릴 용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정수입이 있어도 돈이 부족하면 늘 줘루에게 빌렸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줘루에게 돈을 갚으려고 하면 받지 않아 범재는 인삼밭 계약서 하나를 줘루에게 주고 매년 인삼밭 소출을 줘루에게 준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한 교수님이 확인한 바, 그 당시 한국에 김규흥에게는 인삼밭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재가 사기꾼이라고 비판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만 참고로 하시고 김규흥과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국인 줘루의 글을 읽어봅시다. 범재의 손자께서 풀어쓰신 글입니다. 조선의 광복을 회고하고 축하함 글쓴이 줘루(추노, 邹鲁,1885-1954), 1905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907년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신해혁명 후 1913년 선거에서 국회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2차 혁명 실패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면서 1914년 중화혁명당에 가입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 집행위원에 당선되었고 서산회의에 가담했다. 1927년 국민당 통합 이후 국민정부위원, 중앙특별위원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상 전동현『두 중국의 기원』(서해역사책방 16) 서해문집p 367 참조 조선의 건국은 기자(箕子)로부터 이미 수 천 년이 된다. 조선은 일본에 대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일본이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시초가 조선이 전해 준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일본은 이리와 같은 야심을 가지고 끝내 조선의 큰 적이 되었다. 즉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도와준다는 미명 아래 조선이 중국과의 관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마침내 1910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는 이미 조선과는 40여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전에 내가 중국 남쪽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김범재(金凡齋)라는 조선인 한 사람이 참가했다. 그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먼저 중국의 혁명이 성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 김범재 동지는 아주 성실했다. 나는 비밀 자료를 많이 갖고 있었는데, 전부 그에게 보관시켰고, 많은 정보도 전부 그로 하여금 전달토록 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옛날 옷과 관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김동지는 진영사(陳其美)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 때까지 나는 진선생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진선생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가 상세히 말해 주었고, 동시에 나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는 진선생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와 진선생은 마음속으로 깊이 사귀었다. 무창봉기 이후 나는 광동 북벌군의 병참총관으로 선두 부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상해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에게 잠잘 방과 많은 비품이 필요했는데, 진선생은 나 대신에 사람들을 시켜 완전하게 준비를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김범재 동지가 사전에 연락을 취해준 때문이다. 광복 이후 김동지는 광동성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고문이 되기 전에는 그의 용돈을 내가 대주었다. 또 그는 나의 돈을 꾸어 간 적이 있는데 고문이 된 후 얼마 안되어 계약서 한 장을 들고 와서 말하기를 “나는 여러 번 당신 돈을 꾸었는데, 내가 돈을 갚으려 하면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조선에 인삼 밭 하나를 샀는데, 이 서류가 바로 인삼 밭 계약서다. 앞으로 여기서 소출된 삼이 매년 당신에게 보내어 줄 것이고, 이 삼 밭은 바로 당신의 사업이니 그리 알아 주시오”하고 말했다. 그 후 김동지는 해마다 삼을 보냈지만 그 당시 나는 조선에 가 본적이 없었다. 어쨋던 나는 조선에 삼밭을 갖고 있었고 이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조선인과 교류가 많았고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아졌다. 민국 12년(1923년) 나는 국부 손문의 명을 받아서 국립 광동대학을 설립하고 멀리 월남, 대만 및 조선 청년의 입학생을 모집했고, 입학시험에 편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수업료 면제 대우까지도 하고, 또 의복과 책도 공급하여 조선 등의 청년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입학하도록 하여 조선의 광복 활동 인재를 많이 양성코자 했다. 국부가 서거하고 난 이후 나는 학교를 떠났지만 조선 학생들이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들었고 귀국한 조선 학생들이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수난을 당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민국 18년(1929년) 나는 전 세계 29개국을 돌아보고 귀국한 뒤 국내의 정치 상황이 안정되지 못함에 크게 상심하여 일본으로 가서 휴양을 했다. 그 때 황염배 선생이 저술한 조선에 관한 책을 보니, 일본의 조선통치가 우수하다 평하고 그로 인하여 조선의 교육, 공업, 농업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민생은 어떻게 안정되었는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것이 아주 이상하다 생각하여 조선으로 직접 가서 실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이때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발생하여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했고 나는 조선과 동북 3개성을 살펴보고 황염배 선생이 책에 쓴 내용이 실제와 같은지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바로 눈에 보이는 그 곳은 비인간적인 사회인지라, 이때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詩로 썼다. 집들은 납작납작하고 그 위로 넓은 하늘, 달은 휘영청 밝다. 길쌈은 별 것 없고, 사는 모습은 희미하다. 비쩍 말라, 뼈대만 남고 정신도 지쳤다. 간간이 들리노니 신음소리뿐이다. 길가에는 낡은 옷과 모자를 내다 놓고 팔아서 쓰겠다고 점포를 차렸구나. 몇 가지 중국 물건을 함게 파는 모습 내 마음이 상하여 눈에 계속 아른거린다. 부산에서 경성가는 기차를 타고 북으로 달리며 자주 창밖을 바라다보니 곳곳이 처참하고 황량하여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다시 오언(五言) 시를 읊는다. 기차는 부산을 떠나 북향하여 경성으로 달린다. 철로변의 민가 모양 내 마음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쪽이 찌그러졌는가 하면 서쪽도 내려 앉았구나. 황량하여 가시와 잡초더미지붕은 제대로 이지 못했고 네 벽은겨우 진흙 칠을 했구나 조그마한 서너자의 집이지만 한 가족이 들어가 사누나. 쓸쓸하게 세간은 없고 이리저리 잡초만 무성하다. 마소와 같이 잠자고 닭, 오리와 같이 밥을 먹는다. 산하는 그래도 예쁘고 미더우나 산사람을 살았다 할 수 없다. 벼와 밀 이삭은 실하지만 농사짓는 이가 먹을 수가 없네. 사는 모습이 어찌 이리 참혹한가 아 망국민의 슬픔이여 이로써 황염배선생의 글과 내가 본 것이 상반됨을 알 수 있다. 황선생은 자료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나중에 황선생의 서문에 보니, 그의 조선 방문은 일본인 초청에 의한 것이고, 그가 취재한 것은 도서관에서 얻은 것이고, 황선생이 어떤 지역을 방문하면 전부 일본인의 안내에 의했다 한다. 그래서 나는 황선생이 당시 조선의 망국인민 실상을 볼 수 없었음을 확실히 알았다. 열차가 경성에 도착하여 각지를 살펴보고 느낌도 많았고, 시도 몇 편을 썼는데 여기서 여덟 수를 기록한다. 산하는 예대로이지만 주인은 옛 주인이 아니로다. 남아 있는 궁궐은 빛에 바랬구나. 흥망을 보노라니 감개가 무궁하고 公子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네 – 경성의 저녁– 고궁에 곡식을 심다니, 자못 애처롭다. 웃음 띈 홍안은 다시 볼 수 없구나. 지난 날 가무 울림은 묻지도 마라 사슴만이 쌍을 지어 손님을 맞네 – 동물원으로 꾸민 옛날 창경궁을 방문함 – 창경이란 옛 이름을 아직도 가졌지만 짐승들과 놀이기구 어지러이 널렸구나. 구경 끝날 즈음 상심케 하는 전시물 하나. 지난 날 고국의 일을 말하고 있구나 - 창경궁의 조선의 옛 물건을 모아둔 박물관을 보고– 패배의 기분은 성안에 가득하고 나라 안은 해와 달이 다시 시작되네. 독립 향한 교두보는 찾을 길 없고 이 강물만 여전히 漢字 이름 가졌네 - 한강 다리위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 넓은 들판 군사들로 가득하다. 기병 보병 포병 공병 나누어져 있네. 삼엄한 보루는 기세등등한데 자세히 보니 한국군이 아니고 일본군이로구나. - 들판의 군병을 보고 - 또 다시 박람회 열었다더니 땅과 물에서 나는 만물 다 모았구나. 문득 지난 날 이상한 기억이 생각나네. 만주 몽고 산물이 한국과 대만에 온 것인지. - 9월에 경성에서 조선 박람회가 열렸다. 일본이 전에 동북 3성과 몽고 물산 전을 열면서 생산지 이름을 만주, 몽고 외에 조선, 대만으로 나란히 썼다. – “다 함께 배우고 일으켜 동화하자!” 달콤한 말로 어찌 세인의 공감을 받겠나. 오래된 간격을 그리 쉽게 건너려 하다니 골목마다 울리는 음악 소리 못 듣는가? - 일본 본토와 조선을 동화시키고자 일본은 조선에서 선전 활동에 열중한다. – 이완용을 매국노라 원망하는데 후영은 이등박문 찬양시를 썼구나. 지금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라 할 지경인데 이등을 다시 욕하고 말고 겨를이 없네 - 이번 경성 여행 시에 이완용이 이등박문에게 보낸 시를 보았다. 그 시에– 인생 백 가지 일 기약할 수 없으니 흰머리 되고 난 후 만남 또한 기이하다. 삼십년 전 그대에게 준 말 기억하오? 좋은 세월 다시 오면 만나자고요. 나는 경성 구경을 끝내고 평양으로 가서 기자릉을 참배했다. 기자릉을 보기 전에는 일본이 조선 인민을 고압적으로 다룬다는 것 만을 대단히 원망했다. 그러나 기자릉을 한번 보고 난 후에, 조선사람들이 능 주변 숲을 꾸민 기술과 그 웅장한 기세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능을 잘 보존하는구나 생각하니 불현듯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때 그 느낌을 한편의 시로 쓴다. 기자 나라에 와서 마침 기자릉을 참배하니 상나라 주나라 성하고 망함은 비교도 안 되네. 이 능도 숲이 우거져 오히려 기상 넘치고 대동강 물 휘이 돌아 구불구불 흘러간다. 모란봉 위에는 큰 나무가 푸르렀고 아름다운 산과 물 잘 보존했구나. 삼천 년 지난 지금 이곳에 내가 와서 계단을 밟고 올라 재배하니 감개무량하다. 길고 긴 역사 중에 흥망을 거듭해 왔으니 이 나라 문화도 일찍부터 열렸구나. 오늘에 와 기자를 성인이라 부르며 그 동안 몇 왕조를 이루었구나. 관리들 서로 의지하여 역사를 만들어와 삼십년 전 까지도 나라를 유지했는데 오늘 통치는 간데없고 오히려 능멸뿐이라. 소 말 노예처럼 채찍 받고 달리누나. 성인 기자의 영감 그대로 샘물은 여전히 솟아나고 기자의 기운도 바야흐로 솟아나니 원컨데 기자 샘은 마르지 말고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낼지라. 능 주위에 빽빽이 둘러 선 수 많은 나무들 이 능을 포근히 덮어 주듯이 천추만세 그치지 말고 이어지고저. 나는 조선을 둘러보고 조선인의 망국의 아픔을 목격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이에 따라 늘어갔다. 그 후 중화민국 20년(1931년)에 내가 다시 중산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 조선 청년의 입학을 더욱 지원했다. 그 때 이 모 선생으로 하여금 조선 학생 입학시키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한번은 의학원의 어떤 조선 학생이 일본 영사관에서 몰래 보낸 사람에게 체포되어 갔는데, 나는 직접 일본 영사관에 교섭하여 석방을 요청했지만 일본 영사관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영국 대사관에 교섭하여(일본영사관은 그 때 샤면의 영국 조계에 있었다.) 그 조선학생이 비로소 자유를 회복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 사람은 나에게 광주에 있는 조선혁명당 인사 및 운영 상황을 말하라고 요구했는데,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참나무 껍질로 몽둥이를 만들어서 나를 때렸다.(참나무 껍질로 사람을 때리면 상처는 나지 않으나 뼈가 부러지고 나아가 죽을 수도 있다.) 내가 발설하도록 고문을 하였으나 나는 아픔을 참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나는 풀려났는데, 내 몸은 이미 많이 상했다. 다행히 학장이 바로 와서 나를 구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치료가 늦었으면, 그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서남정무위원회를 맡고 있어서, 광동성에 오는 조선 당인과 그 조직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 당인과 조선 학생이 학교에 많았다. 노구교사건(1937.7.7) 이후 우리나라(중국)는 수천 년 간 볼 수 없었던 신성 항전의 깃발을 올려 대 일본 전쟁에 뛰어들었다. 조선 학생과 조선 당인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의 항일 진영에 참여하고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중국의 항전이 승리하고 독립운동이 마침내 성공했다. 이에 즈음하여 당(국민당)중앙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고 조선 인민과 중국 인민 모두 즐거워한다. 나는 수 십년 동안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그 즐거움은 재론의 필요가 없이 큰 것이므로, 이에 이 글로서 축하의 뜻을 표한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범재 김규흥이 조선신문사를 설립하려던 광저우 웨슈구(越秀区) 주챵샹(旧仓巷)(1)벌써 10여년 전, 2012년 7월이었습니다. 옥천신문사 사장님과 연구가 몇 명이 광복절 67주년 특집으로 옥천의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을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으러 광저우에 왔습니다. 급하게 마련된 점심시간에 제가 동석을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김규흥께서 추노(邹鲁), 호한민(胡汉民), 진형명(陈炯明), 오한지(吴汉持)등과 신해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손중산의 혁명동지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때여서 추노, 호한민, 진형명, 오한지는 알지만 우리나라의 범재 김규흥은 첨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방문단이 남긴 자료 중에 자료중에 김규흥이 미국한인회에 보낸편지가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에 의하면 김규흥 가명은 김복이며, 광저우 주창샹에 있는 도강병원(图强医院)에 조선신문사(朝报事务所)를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중국지사들이 장소와 경비를 제공하고 범재는 한글 인쇄기만 구입하는 조건이었지요. 상하이에 인쇄기가 있다고 해서 돈을 마련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만 동포한테 사기를 당해 돈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중국인들과 이미 약속이 된일인지라 낭패할 수 없으니 대한국민회가 인쇄구입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글이었습니다. 이 자료를 접하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퇴근 후 도강병원이 있었다는 주챵상을 찾았습니다. 캄캄한 밤, 휑한 골목, 여기 어디선가 있었을 도강병원, 신문사 설립 장소와 경비를 확보하고 인쇄기 도착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돈을 사기당했습니다.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범재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다하고 목소리마져 가라앉아 편지를 제대로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범재가 편지를 쓴 날은 1911년 3월 7일입니다. 저의 김규흥에 대한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옥천신문사 이안재 사장은 이렇게 특집기사를 썼습니다. “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로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김규흥 선생이 있습니다. 선생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규흥 선생은 일제 강점기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선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초기 독립운동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지원하고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던 분입니다. 아직 제도권 역사학계에서의 연구가 초기단계이기에 그 전무를 알 수 없는 김규흥 선생의 일대기를 그 후손과 연구가, 김규흥선생이 활동했던 중국 현지를 돌며 자료를 확보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바로잡는데 이번 기획취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생애 전체를 알 수 없는 김규흥 선생의 일대기를 다시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합니다. 아직 기성 역사학계의 본격적인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하긴 하지만 초기 독립운동을 이끌고,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독립운동가들을 중국 혁명세력과 연결하고 지원한 분이라는 데에는 역사학계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김규흥 선생이 풍찬노숙하며 거인처럼 누볐던 중국대륙의 흔적을 더듬어 하나하나 조각을 맞추는 작업은 이제 시작입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배달기사(外卖员)로 3년 만에 백만 위안 벌어, 월 최고 수입은 6만 위안에 달해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20대에 창업에 실패하여 빚을 지고 상하이로 와서 3년 동안 고생한 천스(陈思)는 역습하여 상하이의 "배달왕"중 한 사람이 되었다. 최근 상하이의 배달기사 천스가 3년 만에 102만 위안을 벌었다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1998년생인 천스는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고 두 손은 거무스름하고 부었고 손에는 상처와 동상이 있었다. "얼어붙은 것도 있고 넘어진 것도 있고, 넘어지면 먼지를 털고 다시 뛰었다."며 그는 말했다. 강서성 푸저우(江西抚州) 출신인 천스는 고향에서 식당을 하면서 은행에서 80만 위안을 대출받았다. 하지만 식당 문을 연지 5개월 만에 적자가 심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천스는 상하이에 와서 한번 부딪쳐 보기로 결심했다. "당시 머릿속은 돈을 벌어 빚을 갚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 걸음을 내딛어 부딪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질 것이다." 2019년 천스가 상하이에 처음 왔을 때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고 월급은 13,000위안이었다. 요리사 일을 한 지 거의 1년이 되었을 때, 그는 배달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같다는 것을 깨닫고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2020년에 배달기사(骑手)에 합류해서 주업으로 요리사, 부업으로 배달일을 하였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었다. 하루에 3시간 정도만 잤다."며 그 후 천스는 요리사 일을 그만두고 전문 배달 일을 하였고 주로 징안사, 중산공원, 쉬자후이 상권에서 음식을 배달했다. 천스는 처음할 때는 하루에 18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하루 쉰다고 했다. 이후 플랫폼은 하루 12시간만 일할 수 있도록 시간을 제한했고 그는 곧바로 다른 플랫폼에 등록했다. "여러 플랫폼에서 주문을 받는다. 지금은 일주일에 여섯날 일하고 하루쉰다." "3년 동안 102만 원을 벌었다." 천스는 휴대전화를 꺼내 자신의 최근 수입을 보여주었다. 2023년 8월 한 배달 플랫폼에서 4만 위안 이상을 벌었고 같은 해 9월에는 25,470위안, 10월에는 19,497위안, 11월에는 25,786위안을 벌었다. 한 달에 4만 위안을 어떻게 벌었냐는 질문에는 그는 "배달은 부지런해야 하고 동시에 길도 익숙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갈 때 어떤 배달기사들은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나는 1분이면 옆 동네에 갈 수 있다. 길이 익숙해서 빠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작년 8월에는 날씨가 더웠기 때문에 주문이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천스는 더위를 타지 않아 계속 주문을 받았다. "1층의 주문을 받기를 원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시간낭비다. 노선을 계획하는데 나가서 한 바퀴 돌면 최대 12건을 배달할 수있다. 도중에 어느 상가에 먼저 가고, 어느 상가에서 음식이 느리면 다음 상가에 가서 기다릴지 꼭 계획한다."며 말했다. 관련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천스가 여러 차례 플랫폼 배달기사 중 월간 '배달왕'이 된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3년 동안 102만 원을 벌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현재 천스는 식당을 하면서 빌린 80만 위안을 모두 갚았다. 고향에 집을 사느라 10만 위안의 주택담보대출이 남아있다. 천스는 남은 10만 위안의 빚을 갚고 나서 다시 창업할 생각이라며 "그래도 요식업을 하고 싶다. 어느 곳에서 넘어지면 일어서고, 만약 실패하면 다시 돌아와서 배달을 할거다. 인생 한번뿐인데. 2~3년 안에 결혼하고 싶다. 고향에서 결혼예물 준비하고 결혼식까지 하면 돈이 많이 든다. 나의 힘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그의 업무 강도를 따라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천스는 비정상적인 노동, 초강도의 체력소모, 숙련된 배달 효율이 그의 수입을 구성했다. 보통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고 극단적인 사례나 예외적인 사례는 재현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