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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웃으시는 볌재 김규흥범재 김규흥의 후손이 소지하고 있는사진중에 범재 김규흥이 광동성 후이저우뤄푸산(惠州罗浮山)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편지 뒷장에서 산천 경관이 멋지고 깍아지른 듯 험하고 깊은 뤄푸산에는 위당 전병준씨가 수도를 하고 있어서 전병준을 통해 “참동계”라는 책을 읽었고 명산을 알게 되었으며 기회가 생겨 풍경을 즐겼다고 사진 뒷장에 썼습니다. 이 글을 쓴 날은1910년 3월 13일입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이 취당 전병준이고, 풍요로운 얼굴에 두 손을 무릎위에 가만히 얹어 있는 사람이 환제 왕은장(王恩章)이고, 긴 수염에 맨 가에서 빙그레 웃으며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또 후어저우를 관할하는 왕은장의 병사가 여행길을 녹 호위했고 뤄푸산에서 십여일을 머물고 돌아오는 길에 몇몇 관공서에 들러 정겨운 말들을 나누게되어 즐거웠고 이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고 썼습니다. 광저우에서 뤄푸산까지 약 70-80킬로미터, 뤄푸산에서 십여일 머물고 또 몇몇 관공서를 시찰하는데 며칠을 소요했고, 광저우에서 뤄푸산까지 오고 가는 시간을 합치면 약 한 달을 뤄푸산 여행에 소요했습니다. 김규흥이 보관하던 동맹회의 비밀문건과 물품들을 가지고 뤄푸산으로 도피했다고 추정하는 대목입니다. 사진 뒤에 글을 쓴 날이 1910년 3월 13일인데 2월 12일 신군기의 후, 한 달이 지난 시간입니다. 신군기의 실패로 인해 신군 100여명이 무참히 희생을 당하고 작전을 지휘하던 예잉뎬은 사형을 당하고 가담한 중국 혁명인들은 모두 홍콩 등지로 피신을 했습니다. 청정부가 혈안이 되어 혁명인을 체포하는지라 조선의 옛날 옷과 관을 쓴 김규흥이 혁명당원이라고 의심도 받지 않으면서 극도로 위험한 물품을 가지고뤄푸산으로 피했다고 봅니다. 비록 도피하는 시간이었지만 김규흥의 뤄푸산 여행은 즐거웠습니다. 왜 즐거웠을까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듯, 중국혁명의 깊숙한 현장에 들어가서 혁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했고, 또 지역 정부와 어떻게 협력하는지도 확인했습니다. 이런 체험을 우리 독립운동에 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고 심중에도 확신이 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빙그레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뤄푸산 여행 이후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돌아가실 때까지 빙그레 웃음을 띄울만큼 즐거운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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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도시들에서 20w+의 연봉을 받는 여성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최근, 여러 직업 플랫폼에서 여성 직장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직장 여성의 평균 월급은 증가하고 남녀 임금 격차는 5년 동안 점차 좁혀지는 추세를 보였다. 올해는 더 많은 전업주부들이 직장에 복귀했는데 선전과 같은 도시에서 더 두드러진다. 1.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연봉이 20만 위안 이상의 여성 인재가 절반을 넘었고 선전, 광저우가 각각 3위, 5위를 차지했다. 리에핀(猎聘)이 발표한 “2024 여성인재 데이터 인사이트보고서”에서 2024년 1~2월 여성인재가 가장 많은 도시 TOP 20을 보면 베이징, 상하이, 선전, 항저우, 광저우에서 연봉 20만 위안 이상의 여성이 각 도시의 30%를 초과하여 상위 5위를 차지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52.53%, 51.46%, 선전 41.88%, 항저우 34.68%, 광저우 30.79%이다. 2. 여성과 남성의 임금 소득 격차가 줄어들었고, 전문 서비스 감소 폭이 가장 두드러졌다. 5년 연속 1급 업종의 남녀 인재 평균 연봉을 보면 IT/인터넷/게임, 부동산/건설, 소비재, 의료건강, 전문서비스 등 5개 업종의 남녀 임금 격차는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최근 1년 동안 남녀 구직자 검색어 TOP50을 비교한 결과, 기업 유형측면에서 남성들은 국내 기업에 특히 자동차회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국내 전문 자동차회사는 5개(비야디(比亚迪), 리오토(理想汽车), 니오(蔚来), 지리(吉利), 샤오펑(小鹏))이 있으며 신에너지차가 주를 이루고 있다. 여성들은 외국 기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외국 기업은 7개가 있다. 남성은 천성적으로 운전 감각과 자동차 관련 분야를 좋아하는데 현재 자동차 분야에서는 신에너지차가 가장 인기있다. 여성은 대부분 생활과 일의 균형을 추구하는데 외국 기업은 종종 이런 분야에서 잘 한다. 3. AIGC 분야 일자리: 제품 매니저 여성이 가장 많아 지난 1년(2023년 3월~2024년 2월)동안 여성 배달 AIGC 분야의 3급 직능 특면에서 제품 매니저가 1위를 차지했으며 시장, 브랜드, 콘텐츠, 디자인 및 운영과 같은 AIGC 응용프로그램과 밀접하게 관련된 직능이 2~7위를 차지한다. 일자리는 모두 여성 종사자가 많고 여성이 더 잘하는 일자리이다. 특히 AIGC 분야의 기술 진입 장벽이 높은 알고리즘 엔지니어가 8위를 차지했으며 자연어 처리(自然语言处理), 데이터 주석(数据标注), 딥러닝 등의 기술직도 TOP 20에 포함됐다. 4. 미혼 직장인 10명 중 4명 "결혼을 재촉당했지만 애인 없어" 즈렌자오핀(智联招聘)이 발표한 “”2024년 중국 여성 직장 현황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미혼 직장인의 42.8%가 '결혼을 재촉당했지만 애인은 없다'는 이유로 1위를 차지했다. 성별로는 남성이 50.8%로 여성의 35.8%보다 높았다. 5. 직장 여성의 절반 이상이 여가시간에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택한다. 여가 시간, 직장 여성의 삶은 다채롭다. 남성보다 '가정적'인 직장여성은 올해 54.6%가 여가시간에 가족과 함께 할 것이라고 답해 남성(46.7%)보다 높았고 지난해의 46.2%보다 높은 수치다. 6. 자아실현을 위해 직장에 복귀하는 전업맘의 비율이 작년보다 높아졌다. 기혼 여성중 80% 이상이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만 키운 경험이 있다. 이 중 19.7%의 여성이 전업맘으로 일했지만 자아실현을 위해 올해 직장에 복귀해 지난해 17.1%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해 전업맘의 자아가치 의식이 높아진 것이다. 7. 배우자에게 인정받는 워킹대디들 육아는 부부의 공동 책임이며 기혼 여성의 경우 61.9%가 배우자가 육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답해 작년의 28.9%보다 크게 높아져 워킹대디의 활약이 더인정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육아에 최선을 다한다는 응답은 남성이 65.6%로 여전히 여성보다 높았고 '육아'에 대한 아빠와 엄마의 '평가 기준'은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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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재 김규흥, 3.1운동의 주역인가? 임시정부의 밀정인가?1919년 기미 3.1운동은 누가 획책했을까요? 우리 역사계는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3월3일, KBS 3.1절 특집으로 “3.1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8월에도 “광복70년 특집 다큐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김규흥”을 방영했습니다. 그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김규흥 지사의 숨은 노력과 영향을 찾아서 굴절된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쓰려는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KBS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김규흥 지사가 임시정부를 파괴하려는 밀정이었다는 다큐를 제작 방영했습니다. 동경국회도서관 미정리자료중에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다로(宇都宮太郞)의 서신모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김규흥과 우쓰노미야가 주고 받은 편지 두 통이 있는데 그 중에 김규흥 지사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쓰노미야에게 돈을 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919년10월 초, 김규흥이 돌연 서울에 나타나 10월 2일, 4일, 9일, 16일, 19일 모두 5차례 우쓰노미야를 만났습니다. 우쓰노미야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조선군 최고 지휘자입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조직을 붕괴시켜 해외 조선인을 단속하기 위해 우스노미야는 첫 만남에서 상하이임시정부를 없애고 내외의 독립파를 개심시키려는 계획으로 김규흥을 회유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규흥은 “독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 희망이 없는 독립운동은 더욱 동포를 궁지에 몰아넣을 뿐이다.”라며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가부 답변은 없었으나 우쓰노미야는 일이 잘 된 것으로 보고 김규흥에게 여비조로 200엔, 노모 방문시 100엔을 주었습니다. 현재 시가로 치면 100엔은 200만원가치이며 김규흥의 서울 방문과 환심을 사기 위해 우쓰노미야는 모두 7-800만원 정도의 돈을 지급했습니다. 10월 28일 김규흥이 상하이로 돌아와 우쓰노미야와 두 차례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우쓰노미야의 1919년 11월 27일 일기에 ‘상하이 김복(김규흥)이 돈을 요구하는 편지가 왔다’고 쓰고 있습니다. 김규흥은 상하이 독립운동가 200여명 가운데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파가 60여명이고 그 가운데 최근 20여명이 귀국하게 되어 나머지 40여명을 대상으로 회유하려면 경비가 20-30만원이라고 하며 당장 필요한 액수는 베이징 3만원, 상하이 2만원정도를 즉시 지급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김규흥을 연구한 배경한 교수는 우쓰노미야 일기 속에 나타나는 김규흥의 언행과 편지 내용을 보면 김규흥은 독립운동을 배반하고 친일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보이나 우쓰노미야면담 이후 김규흥의 일련의 활동들을 검토하면 친일 전향이나 친일행위와는 구별되는 면모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짜 친일전향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김규흥의 가짜 친일전향 의도는 무엇일까요? 1919년 11월 초, 상하이로 돌아온 김규흥은 중한합작은행 흥국실업은행을 발기했습니다. 은행설립 자금을 우쓰노미야로부터 얻어내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김규흥이 임정 요인 회유자금으로 요청한 2만원은 2010년 기준으로 한국돈 약 4억정도입니다. 이로써 보면 김규흥의 ‘친일행위’는 은행설립 자금을 얻어내기 위한 모모하다고 할 만큼의 ‘위험한 거래’였으며 우쓰노미야 접근과 동시에 추진한 은행설립은 그가 일생동안 동립운동 방략으로 추구해 온 둔전병 양성을 위한 자금 마련책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현재로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 결론’입니다. (참고: 배경한,「독립운동과 친일의 경계-재중 독립운동가 金奎興의 宇都宮太郞 조선군사령관에의 접근 문제」,『歷史學報』제244기(2019.12) 김규흥이 요청한 자금(회유 공작비와 은행설립자금)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김규흥의 친일전향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행위는 1920년 4월 푸젠성(복건성) 장저우(漳州)에서 한국 대표 김규흥과 여운형, 중국 대표 천종밍, 러시아 대표 포타포프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모색한 것입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교두보로 장차 중국과 러시아 침략 기회를 노렸으니 한국, 중국, 러시아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대결이 불가피한 동병상련의 관계였습니다. 포타포프가 레닌에게 요청하여 시베리아의 모 지역을 조차하고 무기는 러시아가 담당하고 자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부담하고 한국은 병력을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6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양성할 수 있는 병영을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중.러 3군 연합군을 중국은 북경정부 타도에 사용하고 그 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고 한.중.러가 연합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3국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의도입니다. 장저우회의 직후, 김규흥은 회의결과를 가지고 임시정부의 중심 인물 안창호를 만났습니다. 시설이 완성되면 도산선생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도덕과 권위로 지휘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도산이 거절해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1921년 9월 23일, 신규식이 광저우로 남하하여 임시대총통 쑨원을 방문할 때 김규흥은 김기제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유명한 관민들과 협력하여 중한협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광명』을 발행 했습니다. 1922년 11월 4일, 흥국은행 정식 개업허가를 받고 북경에서 한중합작북경흥화실업은행을 개업했습니다. 이사장은 김규흥이었습니다. 은행설립 목적은 내몽고에 광대한 면적을 개척하여 동삼성(東三省)에 거주하고 있는 100만 동포를 이주시켜 편안히 살게하고 한편으로는 군사시설을 건설하여 둔전병을 양성하려고 했습니다. 후에 조선총독부 정보원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흥화실업은행은 10만엔의 출자금을 모으려고 계획했으나 실제로 모인 자금은 1만엔도 못되고 그마저 중국인 張甑文이 3만여엔을 가지고 잠적해서 폐업했다고 했습니다. 상하이로 쫒겨났던 쑨원이 광저우를 수복하던1923년, 그 해 3월 1일, 김규흥은 김기제(金奇濟)라는 이름으로 광저우에서 삼일한국독립선언 4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1924년 김규흥은 황푸군관학교 군의(軍醫) 심장(審長)이었습니다. 순더(順德)에 소재하는 우톄청(吳鐵成) 군부대에 근무하며 광저우에 와서 의열단 월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습니다. 윤봉길의거 이후, 1932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서 활동했습니다. 한국독립당 기관지『韓聲』에 「유일당만이 비로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글도 발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에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망명생활 28년간 오로지 조국 광복의 대업만을 매진했으나 김규흥의 말년은 외로왔습니다. 이질병이 있었는데 병세가 악화되고 노환마져 겹쳐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오랫동안 병상을 지키다가 1936년 8월 16일 톈진(天津)에서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해는 김규흥 지사가 세상을 떠난지 86년이 됩니다만 우리는 아직 그의 항일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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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후한민신해혁명이 성공하고 광동군정부의 고관이 된 김규흥은 자신이 앞에 나서지 않고 상하이로 망명한 예관 신규식을 앞세워 1912년 7월 항일결사단체 동제사(同济社)를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과 중국이 협력해서 조직적인 한국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로 신아동제사(新亚同济社)도 조직했습니다. 신아동제사에는 후한민(1886~1936), 송자런(宋敎仁,1882~1913), 천치메이(陳基美,1878~1916) 등 30여명인데 모두 중국 국민당의 주요인사들이었습니다. 후한민은1968년 대통령장을 추서한 외국인 대한민국독립유공자입니다. “1912년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에 참여하고, 1921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신규식이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을 만날 때 배석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1926년 러시아에서 데려온 한인 청년 10여명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등의 공적이 있습니다. 1912년, 쑨원이 난징(南京)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할 때, 후한민은 "제2의 총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쑨원과 사이가 밀접한 비서장이었습니다. 쑨원이 자신의 이론과 어긋나는 일을 하면 후한민이 명확하게 잘못을 지적했고 쑨원은 그 의견을 수용했습니다. 호한민의 원적은 장시성(江西省) 지안(吉安)이지만 조부가 청나라 관원으로 광저우에 부임하여 광저우에서 출생했습니다. 12세가 되던 해 부친이 돌아가시고 이어 모친과 형제 네 명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모두 잃었습니다. 후한민은 16세부터 서생이 되어 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01년 3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향시가 있었는데 생원 1만 명이 응시를 하고 거인(擧人) 80명을 뽑았는데 후한민도 거인에 당선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후한민은 호구지책으로 고관 자녀의 과거시험을 대신 치르고 은 6천냥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청나라 정부와 일본공사의 마찰이 있어서 후한민은 광동유학생 대표로 청조편을 들었는데 입학한지 두 달만에 퇴학을 당해 귀국을 했습니다. 1904년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왕징웨이(汪精卫, 1883~1944), 주즈신(朱执信,1885~1920), 랴오종카이(廖仲恺,1877~1925) 등 미리 일본에 와 있던 옛친구들을 만났습니다. 1905년 여름, 랴오종카이와 광저우로 돌아와 휴가를 보내다가 쑨원이 일본에서 동맹회를 창립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호한민 부부와 랴오중카이 부부는 곧장 일본으로 가서 주택을 임대해 쑨원을 초대했습니다. 후한민은 쑨원과의 첫 만남에서 쑨원의 사람이 되고 부인과 여동생, 랴오중카이와 동맹회에 가입했습니다. 호한민은 쑨원의 혁명이론가가 되었습니다. 후한민이 쓴 《민보의6대 주의(民报之六大主义)》는 쑨원의 혁명강령이 되었으며 쑨원과 후한민은 광저우에서삼민주의,오권헌법(五权宪法), 건국방략(建国方略), 건국대강(建国大纲) 등을 집필했습니다. 쑨원 이론에 대한 문제점은 자신의 이해를 겯들여 설명을 했기 때문에 쑨원 혁명에 대한 후한민의 이론은 명확하고 명료했습니다. 1905년10월,일본에 체류하던 혁명파와 보황파(保皇派)가 기념회 시간을 빌어 각 파의 의견을 발표하는데 후한민이 혁명파 대표로 강단에 올라가 3시간동안 거침없는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천 여명 청중이 일어서 끝없는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해서 보황파 대표로 나온 캉요우웨이(康有爲)와 양치차오(량계초)의 제자들이 감히 변론 강연을 못했다고 합니다.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고, 이어 각 성에서 군정부를 설립했습니다. 광동성 군정부는 1911년 11월 9일에 성립되었습니다. 당시 쑨원은 국외에 있었음으로 후한민이 광동 도독(都督)에 취임하고 산하에 군사부, 재정부, 민정부, 재정부, 사법부, 외교부, 교육부, 교통부를 설치했습니다. 그 해 12월 21일 쑨원이 중국으로 돌아오자 후한민은 중화민국 정부를 조직하기 위해 광동도독직을 사임하고 난징으로 떠나고 천죵밍이 광동도독 직무를 맡았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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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이 체험한 신군기의(新軍起義)1910년 경술년, 광저우에서 일어난 신군기의(新軍起義)는 범재 김규흥에게 있어서는 중국혁명을 깊숙히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1905년 청나라 말엽,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많은 지식청년들은 신군에 입대해서 나라의 출로를 찾았습니다. 청정부는 재래식 군인의 형상을 개선하기 위해 신식장비와 새로운 훈련법을 도입하고 사병들에게는 다른 군인보다 월급도 많이 주고 세금 혜택도 주면서 신군을 양성했습니다. 쑨원을 위시한 민주혁명파들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군들과 협력해서 청나라를 타도하려고 했습니다. 신군들은 지식인들인지라 새로운 사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동맹회 회원들은 신군으로 위장 입대하고, 군대 내에 ‘과학 학습반’ 등 학술모임을 조직해서 비밀히 민주 혁명을 홍보했습니다. 발각이 되어 모임이 금지되면 또 다른 모임을 만들어 신군 사병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신군내 3천여명이 동맹회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안후이성(安徽省)에서 활동하던 예잉뎬(倪映典)은 신분이 노출되어 광저우 신군에 입대해서 전문적으로 혁명활동을 했습니다. 전체 신군의 절반 이상이 동맹회회원이 되었으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예잉뎬, 자오성(赵声, 1881~1911) 등은 1910년 경술년 2월 24일 정월 대보름에 광저우 신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시사화보(時事畵報)>는 민주혁명을 고취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청정부에 눈에 띄지않게 조심히 쿠데타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2월 9일, 사소한 문제로 사병과 순경 사이에 시비가 붙어 사병 2명이 체포되고 신군내 동맹회 회원 명단을 입수했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대담한 행동을 눈치 챈 청정부는 사병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날씨가 습하다는 이유로 부대에 있는 모든 총과 폭탄을 다른 곳에 옮기고 습한 날씨가 지나가면 다시 원래 위치에 갖다 놓겠다고 가져 갔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 예잉뎬 등은 예정일을 앞당겨 1910년 2월 12일(음력 1월 3일)에 신군 300여명을 인솔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창고 담당자를 살해하고 탄환과 무기를 탈취할 예정이었으나 무기고는 텅비었고 무기가 감추어진 사실을 몰랐던 신병들은 청정부에 의해 진압을 당했습니다. 예잉뎬은 피살당하고 조성은 홍콩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경술년신군기의(庚戌新軍起義)’라고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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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카드가 갑자기 동결?! 꽃가게 주인 돈세탁에 말려들어최근, 강소(江苏)의 한 꽃집 주인 모씨는 낯선 고객으로부터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할 52,000위안의 현금 꽃 선물 세트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디자인과 비용 등을 상의한 뒤 모씨한테 계좌이체를 요청하고 돈을 인출해 제작해달라고 했는데 꽃다발을 고객에게 전달한 지 한 시간 만에 모씨의 은행카드는 동결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경찰 조사 결과, 모씨가 받은 현금 꽃다발 제작에 쓰인 돈은 실제 사기 범행으로 의심되는 돈이다. 현재 사건은 진일보 수사 중이다. 최근 2년 동안 유사한 수법으로 돈세탁을 한 사례가 흔하다. 2024년 1월 16일 강서성 영신현 공안국 화천파출소 관할구역의 한 꽃집 주인 류여사가 화천파출소에 와서 신고했다. 당일 오전 한 낯선 고객으로부터 '1만 위안짜리 현금 꽃 선물세트'를 만들어 달라는 위챗 주문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는 어머니에게 드리는 깜짝 선물이라고 말했다. '미스터리 고객'은 류여사의 카드로 돈을 이체해 줄 테니 현금을 찾아 직접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류여사는 약속대로 현금을 인출하고 현금 꽃다발을 포장했고 고객이 이를 찾아갔다. 얼마 후 류여사는 자신의 은행 카드가 동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에 신고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현재 사건은 이미 해결된 상태이다. 꽃 선물세트뿐 아니라 주문제작 케이크 사건도 있었다. 2024년 1월 6일, 산시성 위린 위양구의 한 케익점 사장 조씨는 위챗 친구 신청을 받았다. 신청을 통과한 후 그는 자신과 아내의 결혼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며 계좌이체한 돈을 찾아 케이크에 현금 35,000위안을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조씨는 주문제작한 케이크를 지정된 장소로 보내 구매자에게 전달한 후 괜찮은 장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그의 은행 카드가 사기 자금 유입으로 인해 공안 기관으로부터 통제되었다. 경찰의 소개에 따르면, 이것은 신종 돈세탁 방식으로, 사기단은 빠른 돈세탁을 위해 은행 현금 인출 및 가상화폐 교환을 통해 꽃집, 제과점 등에 거액의 소비를 현금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사기범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또는 현지 인력을 끌어들여 상가 주인과 연락하고 가게 주인의 고객 서비스 심리를 노려 개별 요구를 제기한다. 그들은 사전에 이와 유사한 맞춤형 선물세트를 만들거나 거액의 주문에 기반하여 대부분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때문에 경계를 낮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기꾼은 현금화가 간편한 상품(술, 담배, 꽃 선물세트, 금 등)을 우선적으로 구매하고 가게 주인의 카드 계좌로 돈을 이체하여 카드 번호를 제공하도록 제안한다. 그 후 범죄자는 카드 번호를 전자 사기의 피해자에게 전달한다. 가게 주인이 받은 '계약금'(定金)은 실제로 다른 사건의 '장물금'이다. 이렇게 상인들은 본의 아니게 사기꾼들의 '돈세탁 하수인'이 되고 따라 계좌가 동결되고 사건과 관련된 자금까지 차감되는 중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경찰은 "대다수의 가게 주인들이 온라인 주문 및 거액의 오프라인 주문을 신중하게 접수하고, 수금 절차를 규범화하며, 출처가 알 수 없는 대금을 거절하고, 가능한 사업등록 계좌(公账)를 통해 송금하고 사기꾼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자신의 은행계좌를 임의로 제공하거나 수금 QR코드를 임의로 제공해서는 안되며 일시적인 이득으로 사기범의 돈세탁 도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영업자는 은행계좌에 이상이 있을 경우 빠른 기간 내에 은행카드 개설은행에 가서 원인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거래자료를 수집하여 경찰의 조사와 처리에 협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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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시작 행복 예감”, 2024학년도 새 학기 첫날2024학년도 3월 1일 개학 첫날. 모두가 설레는 개학 첫날이다. 본교에 재직 중인 선생님들이 첫날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놀라워하기도 했고, 당황스러움과 겸연쩍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응원하는 각종 환영 문구를 들고 사탕과 필기구 등을 나눠주며 격려해 주었다. 새로운 한 해,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학교생활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학생들도 아침 일찍 선생님들이 교문에서 반갑게 환영한다는 인사와 함께 건넨 따스함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등교할 수 있었다. 삶이 배움으로 이어지는 등교 현장의 흐뭇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자료제공: 광저우한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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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팔아 하루 저녁에 289만 위안 현금화! 계속 치솟는 금 가격최근 금 가격이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있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3월 9일, #금가격 상승#이 인기검색어 1위에 올랐다. "이번 주는 정말 매일 아침 가격표가 바뀌고 있다. " 3월 8일, 항저우 호빈 상권(湖滨商圈)의 한 보석 가게판매자는 고객 그룹방에서 "월요일 1그램당 636위안에서 오늘은 1그램당 660위안으로 일주일에 24위안이 오르는 시세는 정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차오신문에 따르면 일부 고객은 금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3월 1일 밤새 금 회수업체를 찾아 289만 위안(금 회수가격 482위안/g)을 현금화했으며 "3월 7일 회수액은 최대 505.6위안/g에 달했으며 차액으로 따지면 상기 고객은 일주일 만에 무려 14만 위안을 적게 벌었다"고 회수업체의 담당자가 말했다. 3월 8일, 코멕스 4월 금 선물은 온스당 0.32% 상승한 2,165.20달러를 기록하여 거래일 연속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물 금은 온스당 2,170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하루만에 거의 0.5% 상승했다. 3월 이후 전 세계 금 가격은 누적 상승폭은 온스당 124달러에 달했다. 저우다푸(周大福), 차오훙지(潮宏基), 류푸 보석(六福珠宝), 저우성성(周生生), 셰루이린(谢瑞麟) 등 여러 금은방에서 발표한 금은 그램당 655위안을 돌파했다. 3월 6일, 국내 최대 금·보석 거래의 허브인 선전 수이베이(深圳水贝)시장은 금·보석 액세서리를 고르려는 고객들로 부스를 가득 메웠고 평일에도 인파가 줄지 않았다. 금 액세서리를 구매하고 있는 외지의 한 소비자는 "최근 금 가격이 비싸지만 수이베이에서 금을 사는 것은 매우 수지가 맞는다. 외지에서 광동으로 여행왔다. 주로 금과 보석을 샀고 친구를 도와 사주기도 했다"며 말했다. 그러나 일부 소비자들은 고가의 금을 관망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금악세서리 가게 점장은 "소비자들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갑자기 가격이 그렇게 뛰니까 나중에 좀 떨어질가봐 걱정한다"고 말했다. 50대 중반의 이씨는 "평소 금을 사는 횟수가 매우 적다"며 "지난번 금을 산 것은 4~5년 전 자녀가 결혼할 때"라고 말했다. 이번에 이여사가 금은방을 찾은 것도 갓 태어난 외손자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 1그램에 600위안이 넘는 금 가격에 평소 금 가격에 관심을 두지 않던 이씨는 "너무 비싼 것 같다. 아이가 결혼할 때는 200~300위안(그램당)이었다"며 깜짝 놀랐다. 금 투자는 항상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부의 증식 방법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금 가격의 엄청난 변동은 금 회수량의 가격 상승을 이끌었다. 선전의 한 금 회수점 주인은 "이번 가격 상승 후 상담량과 회수량이 크게 증가했으며, 많은 투자자들이 금 가격이 급등할 때 현금화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의 류씨는 "올해 1월 한번 해 보자는 마음으로 금 1,000그램을 구입해 투자했다"고 말했다. 요며칠 동안 금 가격이 최고치를 경신하자 그는 아침 일찍 카운터로 와서 줄을 서서 금 환매를 처리했다. 그는 지금이 적합한 시기라고 밝혔다. "매일 가격을 보고 있는데 당시 산 금은 그램당 480위안이었는데 지금은 그램당 499위안으로 5,900위안을 벌었다."며 말했다. 가격이 급등세를 벗어나자 주변의 많은 친구들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현재 금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분석하며 일반 투자자는 신중한 태도와 이성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의보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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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기의(新軍起義)를 기획한 주즈신범재 김규흥지사는 주즈신(朱執信, 1885~1920)이 기획한 신군기의(新軍起義)에 참여했습니다. 청나라의 신식군인을 신군이라고 하는데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군 사병들로하여금 청나라를 타도하려는 구상했습니다. 범재 김규흥 지사도 신군기의에 참여했습니다. 먼저 신군기의를 기획한 주즈신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청나라 말엽, 일본 유학을 하는 중국 학생들은 변발을 하고 중국 전통 장포 입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즈신은 늘 변발을 늘이고 장포를 즐겨 입었지요. 친구들이 놀리기도 하고 장난삼아 변발을 자르려고 했으나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사실 주즈신은 변발과 중국 전통 복장으로 청나라 당국의 눈을 가렸습니다. 일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면서 당시 청나라가 엄금하는 쑨원의 혁명이론을 가르치고 또 직접 무기를 들고 무장투쟁도 실천한 혁명가입니다. 주즈신의 가문은 사대부 집안이었으며 그의 부친은 양광총독 장지동(张之洞,1837~1909)의 막료였으며 시사(诗词)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타서 “거문고 왕(琴王)”이라고 불리던 학자였습니다. 1895년, 주즈신이 서당교육에서 공부할 때, 청일전쟁에 패한 청정부는 일본에 은 2억량을 배상하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습니다. 1898년, 주즈신이 13세 때, 청나라 정부는 유신변법으로 나라를 구하려던 애국인 ‘6군자’를 처형했는데 그 중에 양루이(楊銳, 1857~1898)는 부친의 절친이었습니다. 그 때 광저우 최고 신식학부 광야서원(廣雅書院)에서 공부하던 주즈신은 작문시간에 청정부가 자기 백성을 진압하고 처형한 것에 대한 분개를 《读辛幼安南渡录感叹题后》라는 문장을 썼는데 문학부에 1등으로 뽑혔습니다. 1902年, 주즈신은 광저우 유신학파가 창설한 신식학교 교충학당(教忠学堂)에서 외삼촌 왕징웨이(汪精衛), 친구 후한민(胡汉民) 등과 함께 “군지사(群智社)”라는 독서서클을 만들어 헉슬리의 《언연론(天演论)》, 아담 스미스의 《원부(原富)》, 룻소의 《민약론(民约论)》등 서방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구국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1904年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 현재의 북경대학)에서 주최하는 국비 일본유학생 선발에서 1등으로 뽑혀 1905년 동경법정대학 속성 경제과에 입학했습니다. 1905년 7월, 쑨원이 동경에서 혁명에 뜻을 둔 유학생과 화교 70여명을 초청해서 중국동맹회 창립준비 회의를 하던 날이었습니다. 주즈신은 쑨원이 주장하는 혁명이론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고, 회의가 끝나고 동맹회 가입 선서식이 있었는데 주주신은 그 자리에서 가입을 했습니다. 문장력이 뛰어난 주즈신은 1906년부터 동맹회 기관지《民报》에 약 100여편의 문장을 발표했습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소개하고, 황제제도를 회복하려는 개량 유신파들의 이론을 반박하고, 민생주의(民生主义)를 고취하는 문장 등을 기고해서 청정부 타도의 당위성과 독립적인 중화공화국 건립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광저우에 돌아와서 광동고등학당과 법정대학, 방언대학 등에서 교원신분으로 청정부의 눈을 가리고, 청정부의 군대에까지 잠복해서 군인들에게 혁명사상을 강의하고 군대에서 비밀히 활동하던 혁명인들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반청투쟁 및 민군(民军) 합동 무장봉기도 계획했습니다. 1910년 2월, 주즈신이 기획했던 신군 쿠데타는 실패했습니다. 쑨원의 다음 쿠데타가 1911년 4월 27일(음력 3월 29일) 황화강 봉기였습니다. 주즈신이 긴 장포를 입고 결사대원으로 앞장을 섰습니다. 옷이 불편해서 어떻게 전쟁을 하겠느냐는 동료들에게 장포를 갈라 허리에 숨긴 수류탄 두 개를 보이면서 양광총독을 죽이겠다고 앞장섰습니다. 중화민국 2년(1913년), 신해혁명이 성공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되자 주즈신은 광동정부가 주는 유학경비 3000위안을 전부 쑨원의 혁명경비로 내놓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중화민국 4년(1915년) 쑨원이 제2차 혁명을 시도하자 《民国》잡지에 "내란의 희생은 없다", "폭민 정치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똑똑한 독재" 등의 문장을 발표하면서 위안스카이가 죽을 때 까지 문장을 써서 언론에 발표하는 방법으로 독재 통치를 공격했습니다. 중화민국 6년(1917년) 주즈신은 쑨원과 광저우에 와서 《건국방략(建国方略)》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주즈신이 희생했을 때, 쑨원은 "주즈신은 혁명중의 성인이다" 라고 애통해 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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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한 도강병원 원장 우한츠우리가 쥐창샹(旧倉巷) 골목을 탐방하는 목적은 범재 김규흥이 청나라 말기의 주소 쥐창샹 39번지(현 주소 미확인)에 있었던 도강병원(图强医院)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강병원 원장 우한츠(伍汉持, 1872-1913)는 직접 동북지역에 가서 한국독립운동기지를 세울만한 땅을 물색한 인물입니다. 본인이 직접 동북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혁명동지들에게 보고를 했더니 모두들 좋다고 호응을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연락기관으로 조선신문사를 설립해서 상호연락도 하고 민심을 고취하는 신문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는데 우한츠가 자신의 도강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한 것입니다. 범재는 상하이에 놀고 있는 한글인쇄기가 있다고 해서 인쇄기를 구입하려고 돈을 모금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만 돈을 동포에게 사기당하고 조선신문사 설립은 무산되었습니다. 우한츠는 어떤 사람일까요? 범재 김규흥과 우한츠는 1872년생 동갑입니다. 신문사 설립을 준비하던 1911년 두 분은 39세였습니다. 우한츠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쑨원이 의사가 되어 구국활동을 한다는데 감동을 받고 본인도 포산(佛山)에 있는 영국인 선교사가 개설한 의학당에 입학했습니다. 1899년 27세에 의학당을 졸업하고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광동성 카이핑현(开平县)에 병원을 개원하고 홍콩으로도 다니며 의료활동을 하면서 폭넓게 혁명인들을 사귀었습니다. 1901년 남아프리카 모 선박회사가 선상 의사를 모집하자 우한츠는 혁명활동을 하고 해외에서 무기를 들여오려면 선상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자원했습니다. 1904년까지 선상 의사로 활동을 하다가 1906년 광저우 쥐창샹에 도강병원과 도강의학당을 개원했습니다. 도강의학당에서 공부하던 남학생이 40여명이었는데 대부분 혁명지사들이었습니다. 도강병원을 개원한 그 해, 우한츠가 법정학당(法政學堂)의 감독 샤통허(夏同龢)의 중병을 완치하고 그를 통해 법정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때 법정학당에서 공부하는 줘루(邹鲁, 1885~1954)와 천중밍(陈炯明, 1878-1933)을 만나고 혁명동지가 됩니다. 신해혁명 성공 후 우한츠는 중화민국 국회의원 신분으로 위엔스카이(袁世凱, 1859~1916) 탄핵을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1913년 8월 19일 자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 때 우한츠는 31세였습니다. 우한츠 사후 도강병원은 우한츠기념병원으로 세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중산대학부속암전문병원(中山大学附属肿瘤防治医院)이 도강병원의 전신이며 현재 광저우시내 동펑동로(东风东路)에 소재합니다. 가족들이 천진에서 우한츠의 시신을 찾아와 우한츠기념병원 옆에 무덤을 마련하고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1979년 동펑동로 도로 확장을 하려고 담당자들이 우한츠 후손과 협의해서 이전하려고 무덤을 팠는데 무덤은 이미 훼손되고 유골항아리가 없어졌습니다. 부득불 유골없는 무덤을 병원내에 마련하고 2008년 광저우문물 보호기관으로 지정했습니다. 우한츠 사후 97년이 되던 2010년 9월 8일, 광저우 중산대학부속암병원 증축공사장에서 우한츠의 유골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원래 무덤이 있던 곳에서 약 15미터 떨어진 곳인데 전문가들이 현장을 조사하고 확인한 바, 우한츠의 유골임을 확정하고 현재의 묘원을 마련했습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누군가가 우한츠 무덤이 훼손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옮겨놓은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우한츠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운 것은 100여년 전의 일입니다. 자신의 득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진심으로 한국이 독립하기를 소망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친히 동북지역을 탐사하고, 자신의 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했던 우한츠, 꽃 한 송이라도 들고 찾아가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참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