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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치솟고 인기 민박이 매진된 취안저우(泉州), 다음 “얼빈”(哈尔滨)이 될 수 있을까?음력설이 다가오면서 역사상 가장 긴 춘절 연휴, 용띠 해에는 어느 도시가 문화관광의 좋은 출발을 하게 될지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일부 플랫폼에서는 올해 춘절 관광이 “남북 나들이”에 집중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으며, 예약 상황을 볼 때 취안저우(泉州) 등 도시의 민박 예약이 급증했다. 다음 "얼빈"은 남방에 등장할까? "마음에 드는 민박의 마지막 방을 잡았는데 이 도시가 이렇게 인기가 많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베이징에 거주하는가씨는 춘절 기간에 푸젠성 취안저우(泉州) 여행을 계획하고 신정이 지나자마자 호텔과 항공권을 예약했는데 그때 이미 많은 인기 민박들이 매진됐다. "1월 3일 시지에(西街) 근처 민박의 마지막 방을 구했는데 하룻밤에 1,300위안이 넘었고 평소 민박의 가격은 500위안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정 전에 이미 방을 예약해서 그런지 우리는 늦은 편이지만 마음에 들어서 주문하기로 했다.”며 전했다. 가씨는 호텔뿐만 아니라 연휴 기간 취안저우행 항공권도 수요가 많다고 말했하며 1월 초 취안저우행 왕복 항공권도 예약했는데 당시 적지 않은 “황금 시간대” 항공편은 남은 티켓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취안저우가 고향인 웨이씨는 "사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우리 고향은 인기가 많아졌다. 지금까지 관광객이 매우 많았다. 휴가철 인기 지역의 호텔이나 민박은 거의 700위안부터 시작한다. 2023년 5월부터 고향의 관광객 수가 크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푸저우(福州)에서 일하는 그는 "고향에 돌아올 때마다 머리에 잠화(簪花)를 꽂은 각지의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며 "아마도 잠화가 스타 효과로 핫해진 것 같다."며 전했다. 웨이 씨의 견해에 따르면 "취안저우는 춘절 연휴 관광지로서 많은 독특한 장점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 남동쪽 해안 도시로서 춘절 기간 동안 취안저우의 기후가 적절하여 특히 북방의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자체도 고풍스럽고 심오한 문화적 의미가 있다."며 맑했다. 그러면서 "취안저우는 고성(古城)이지만 민간 홍보는 매우 젊고 특색이 있다."며 소개했다. 관광 플랫폼을 검색한 결과 취안저우뿐만 아니라 푸젠성의 많은 도시도 춘절 기간에 많은 관광객을 맞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명 인기 여행지인 샤먼(厦门)을 예로 들면, 현재 많은 호텔과 민박의 가격이 1~2배 올랐고 인기 호텔에는 방이 많지 않다. 평소 '틈새 여행지'로 알려진 닝더샤푸(宁德霞浦)조차 민박 가격이 평소 두배에 달하고 일부 인기 호텔과 민박은 예약이 꽉 찼다. 푸젠성 외에도 쓰촨성, 광시성 등 기타 지역의 일부 관광지도 인기를 이어가고 있고, 구이린(桂林), 베이하이(北海) 등 왕홍 호텔들도 방 구하기 어려워 가격이 치솟고 있다. 이전에 페이주(飞猪)가 발표한 “2024 춘절연휴 여행풍향계”에 따르면 “민속 관광”, “문화관광”, “놀이터 관광”이 많은 가정에서 가장 선호하는 여행 방법이되었으며 취안저우, 베이하이, 뤄양(洛阳) 등 도시의 휴가 여행 예약은 전년 동기 대비 20배 이상 증가했다. 여행 측면에서 춘절 연휴 기간 동안 “북방의 눈 구경”과 “남방으로 추위 탈출”이 이어지며, 그 중 하얼빈은 2024년 춘절 연휴 동안 가장 인기있는 국내관광지가 됐다. 중국내 관광 순위 2~10위의 인기 여행지는 충칭, 베이징, 청두(成都), 광저우, 쿤밍, 구이양, 시안, 상하이, 심천 등이다. 2024년 춘절 연휴 기간 가장 인기있는 빙설 관광 외에 온천 관광도 인기 여행 테마 중 하나이며 광동, 푸젠, 쓰촨은 가장 인기있는 온천 여행지이다. 이번 춘절 연휴의 “얼빈”을 놓고 어디가 경쟁할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러 OTA 플랫폼의 춘절 예측 데이터에 따르면 다가오는 긴 연휴가 용의 해 첫 번째 여행 성수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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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 위안짜리 빠이주(白酒)가 마오타이(茅台)로 둔갑?!몇 분 만에 몇 십 위안의 빠이주(白酒)가 수천 위안짜리 마오타이주(茅台酒)로 '변신'할 수 있다. 산시성 시안 경찰은 특대 여러 지역 제조, 가짜 마오타이주 판매 사건을 적발했다. 범죄 조직은 어떻게 가짜 술을 제조 판매했을까? 사건의 단서는 산시성 시안 경찰이 택배 운송경유지를 순찰할 때 발견한 특이한 택배 한 무더기에서 비롯되었다. 택배 물류 정보에 따르면 빠이주가 들어 있는 것으로 돼 있지만 30여 개의 종이 상자 겉포장에는 빠이주 브랜드 표시가 전혀 없었다. 경찰이 택배를 열어본 후 안에 뜻밖에도 전부 마오타이주인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술의 외관라벨 인쇄가 실제 마오타이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우리는 제일 먼저 관련 제조업체의 가짜단속(打假) 직원에게 연락해 감식을 진행한 결과 가짜 술로 잠정 판단했다. 30여 상자, 200여 병의 술의 가치가 30만 위안 이상이며 형법 관련 규정에 따라 형사 사건 접수기준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경찰은 범죄조직의 가짜 제조 소굴이 한 폐품재활용 스테이션에 있고 그 안에 완제품 술과 원료 술, 그리고 가짜 술을 만드는 보조재료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현장에서 경찰은 거의 3,000병의 완제품 술과 2,000근 이상의 원료 술, 그리고 주입기, 포장기 및 마오타이 표식이 인쇄된 술병, 위조 방지 라벨을 압수했다. 또한 경찰은 다른 방에서 조직원이 가짜 술을 생산하고 판매한 구체적인 거래 기록이 적힌 장부를 발견했다. 상기 기록들에 근거하여, 경찰은 계속해서 깊게 파서 후베이성 샤오간(孝感)에 있는 또 다른 가짜 술을 만드는 소굴을 찾아냈고 루모씨 등 네 명의 주요 범죄 용의자를 체포하여 재판에 내세웠다. 범죄 용의자들이 검거되면서 그들이 가짜술을 만드는 방법과 판매 방법도 점차 분명해졌다. 경찰은 네 명의 용의자가 분공이 명확하고 가짜 술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몇 십 위안에 불과하지만 수십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판매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네 사람 사이에는 생산담당, 판매담당 등 명확한 분공이 있었다. 그들은 귀주 마오타이진에서 원료 술을 사오는데 포장을 거친 후 이 술은 '하늘을 나는 마오타이주'로 변신한다. 이 집단이 가짜 마오타이를 만드는 비용은 매우 저렴하다. 그들이 사용하는 병과 라벨도 인터넷에서 싸게 산 것이다. 범죄조직은 귀주에서 해당 지역의 장샹주(酱香酒)를 샀는데 100위안으로 10근을 살 수 있고 라벨과 박스도 인터넷에서 주문했는데 원가는 몇십 위안이다. 그런데도 시장가격보다 더 비싸게 팔고 있었다. 6병 한 상자에 3,600위안에서 6,000위안, 비싼 것은 9,000위안에 팔리기도 한다. 범죄 조직은 두 가지 방법으로 판매하는데, 하나는 웹 팝업 광고이고 다른 하나는 링크된 문자 메세지를 단체로 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착불을 보장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할 수 있기 때문에 고객의 신뢰를 받았다. 현재까지 시안 경찰은 4명의 주요 용의자를 체포하고 가짜 비천 마오타이주 6,500여 병, 가짜 술 생산에 사용된 기주(基酒) 2,600근, 생산 및 주입 도구 4세트, 각종 포장 재료 3톤을 압수했으며 현재 사건은 여전히 수사 중이다. 경찰은 인터넷 팝업 링크를 마음대로 클릭하지 말고 판매 광고를 쉽게 믿지 말 것이며 시장가격보다 현저히 낮은 물품은 구매하지 말고 공식 채널을 통해 상품을 구매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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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시장(早市)에서 관광객에게 700위안 고가로 물건을 판 노점 상인, 경영자격 취소되고 블랙리스트까지 올라최근 랴오닝성 심양의 팔일 아침 시장(八一早市) 관리자가 관광객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판매상에게 호통치는 동영상이 주목을 받고 있다. #관광객의 민원에 의해 어포(烤鱼片) 노점상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슈는 웨이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1월 27일, 상하이 관광객은 동영상에서 심양의 아침 시장에서 어포를 파는 노점 주인이 평상시에는 15위안인데 오늘은 10위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점 주인은 주동적으로 큰 봉지에 싸서 계산할 때서야 냥당 10위안이고 700위안을 내라고 했다. 누리꾼은 계산을 마친후 오징어를 들고 관리자를 찾아갔고, 아침 시장 관리자가 매대에 도착해 그녀를 위해 말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빠르게 확산되었고, 관리자는 누리꾼들의 칭찬을 받았다. 동영상에서 아침 시장 관리자는 노점 주인을 향해 "당신은 너무 양심이 없고 너무 심했다"며 화를 내며 꾸짖었다. 관리자는 그가 소비자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27일 오전 그는 어포 노점상에게 사기 피해를 당했다는 관광객의 민원을 접수했고, 노점상은 결국 관광객의 환불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침 시장도 해당 노점 주인을 퇴출시켰고, 그녀를 상인 블랙리스트에 넣었으며 "팔일 아침 시장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밝혔다. 아침 시장(早市)의 여러 상인들은 "이 노점상은 아침 시장에 물건을 팔러 거의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외지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아침 시장 및 시장감독관리부서는 운영 시 가격을 명확하게 표시하고 소비자를 오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많은 누리꾼들은 아침 시장에 "일을 잘 했다"는 찬사를 보냈다. 일부 누리꾼들은 많은 아침 시장에서 냥(两) 단위로 팔고 말린 오징어 자체가 비싸다고 했다. 또 다른 누리꾼들은 이런 장사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동북 관광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지금, 개별 상인들의 '바가지질' 행위는 지역 문화 관광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관리자는 "관광객을 보호하고 관광객을 속이는 불량 상인을 시장에서 퇴출시킴으로써 고객의 정당한 권익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준법 사업자에 대한 공평한 대우이며 좋은 시장 환경을 유지한다. 우리는 지역 사회 각 계의 공동 노력으로 동북 문화 관광의 장기적이고 건강한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고 기대한다."며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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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211대학 석사, 입사한지 1년 6개월만에 해고당해최근, 27세 211대학 석사가 해고당했다는 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다. 그녀는 ‘석사는 211대학에서 졸업했으며 회사에 입사한지 1년 6개월만에 해고당했다. 실적이 나쁜게 아니라 회사 운영상황이 좋지 않았고 입사한지 오래 되지 않은 직원으로서 첫 해고명단에 올랐다’며 말했다. 고학력 그리고 새로 입사한 직원들이 해고당하는 것은 특례가 아니였다. 대학본과, 석사를 모두 985대학에서 졸업한 자는 "2023년 7월에 졸업한 후 IC업계에 들어갔는데 인턴기간이 끝나기 2주 전에 전체 부서 직원들과 함께 해고당하였다."며 말했다. 211대학 졸업한 한 여성은 ‘학과는 환경공정이며 인터넷 환경보호업계에서 일했다. 회사인원을 조정할 때 해고당했는데 당시 입사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았다’며 전했다. 고학력 인재들이 해고당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학력과 해고 사이에 연관성이 적다. 회사는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직원을 해고할 때 먼저 새로운 직원을 선택하는 원인은 오래 근무한 직원들의 경험을 새로운 직원들이 대체할 수 없다. 그리고 계약해제시 새로운 직원들과의 계약 해제가 더욱 간편하다’며 소개했다. 211공정은 1995년부터 가동했으며 목표는 중국내에서 유명한 학교와 중점 학과를 만들기 위해서다. 985공정은 1998년에 제기했으며 국제 선진 수준의 학과와 세계 일류 대학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현재 985대학은 39곳, 211대학은 112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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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중화민국 광동정부 독립운동기지 설립 지원1912년 신해혁명 성공 후 김규흥은 광동군정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광동성의 군사와 치안을 담당하는 최고 기구 广东总绥靖处(广东总经略处)의 참의(參議)인데 광동성 도독(현재의 성장직)이 관할하는 최고 군사기관의 고문이 된 것입니다. 그 이듬해는 광동성이 아닌 중앙정부의 호군사서(護軍使署) 고문으로 승진했습니다. 김규흥은 용기가 생겨 광동도독부 참모장 등중위안(邓仲元, 1866-1922)을 찾아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상의했습니다. 중화민국의 의원 뤄아치 뤄아치(罗蔼其)가 김규흥에 대해 쓴 글입니다. “중국의 신해혁명은 당시의 일본 식민지 통치하의 조선인민에게 큰 용기를 북돋우게 했다. 멀리서 광동까지 온 조선혁명지사 김복(김규흥)은 광동군정부 당국과 조선의 독립에 관련해서 상의를 했는데 광동도독부 참모장 등중위안은 이 일을 그의 비서 뤄스양(罗师扬, 罗幼山)에게 맡겨서 처리를 하게 했다.” 뤄스양은 중국과 조선의 국경지역에 황무지를 개간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조선인민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근거지를 설치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개간은 명분이고 사실을 독립을 위한 농민병을 양성하는 방안인데 당국은 김규흥과 뤄스양, 뤄아치 등을 동북으로 보내 현지조사를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1912년 9월12일, 일행이 동북삼성에 도착을 했지만 그 때 임시총통직을 양위받은 위안스카이(袁世凯,1859-1916)가 정변을 일으켜 중화민국 당국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현지를 관할하는 도독도 핑계를 대면서 일을 못하도록 말려서 일행은 1913년 1월 28일 광동으로 돌아왔는데 총 139일이 소요된 탐방이었습니다. 이 때 동북지역 현장답사에 동행한 뤄아치가 현지 답사 소감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서 <壬子旅行记>를 남겼는데 김규흥이 중화민국 고위직에서 진행하려고 했던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나라를 잃은 망명객이지만 중국의 고관이 된 김규흥은 어릴 적 자신의 스승이자 친척인 김유성진사의 생일선물로 담배곽에 친필 시 한 수를 새겨 보냈는데 이 싯귀에서 당시 김규흥의 심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孚轩三叔大人道玩 孚轩 三叔大人께 드립니다. 天壤求唇齿 이 세상 천지에 입술과 이빨처럼 밀접함을 요구함은 한국, 중국 서로 도울 크나 큰 뜻 지니고 있음이니 风霜炼肺肝 역사에 명심하며 다져 오던 참마음은 오랜 세월 두고두고 뼈 속 깊이 사무쳐 있었나이다. 孤槎衡浪渡 나 홀로 뗏목 위에 외롭게 의지하고 거친 파도 헤치고 와 이곳에서 몸 던져 일하고 있나이다. 雄剑映星看 외롭고 고탈픔에 고향생각 넘치는데 별빛 비친 나의 칼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보고 있으면 不胜耻归赵 돌아갈까 유혹 속에 흔들렸던 내 심사가 눈뜨고 깨달으니 부끄러움 그지없어 몸둘 바가 없나이다. 有生终报韩 조국에 바친 이 몸 다른 생각 있으리까 이 목숨 다하도록 힘쓰고 힘을 써서 애국애족하오리다. 中原足豪杰 중국 땅 이곳 저곳 뜻 맞는 동지 찾아 한국사람, 중국사람 호걸도 많사오니 손에 손을 잡으리로다. 相與济艰难 서로가 힘을 모아 뭉쳐진 힘 보태며는 지금의 모든 간난 구제할 수 있으리라 다짐합니다. 姪复敬题 조카 복이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참고, 김한영 편저, 『凡齋와 獨立運動』, 도서출판 서울정판, 2002년4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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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줘루의 기고문(5) - 조선의 광복을 회고하고 축하함1945년10월25일 충칭의 중앙일보에 실린 줘루(邹鲁)의 기고문입니다. 줘루는 중산대학 초대 교장입니다. 범재 김규흥과 중국동맹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제 침략하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망국민의 실상을 목도하고 돌아온 후 줘루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늘어나서 중산대학 교장 재임기간, 한국학생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돕기 위해 이씨 성을 가진 한인 한 명을 고용하여 한국 청년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도왔다고 합니다. 범재 김규흥이 고정 수입이 없을 때 줘루가 용돈을 대어 주었습니다. 광동정부의 고관이 되어 매월 200위안을 받았으나(당시 서민 한 달 생활비 8위안)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의하면 아랫사람 월급 주고 빌린 돈 갚고 나면 어머니께 드릴 용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정수입이 있어도 돈이 부족하면 늘 줘루에게 빌렸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줘루에게 돈을 갚으려고 하면 받지 않아 범재는 인삼밭 계약서 하나를 줘루에게 주고 매년 인삼밭 소출을 줘루에게 준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한 교수님이 확인한 바, 그 당시 한국에 김규흥에게는 인삼밭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재가 사기꾼이라고 비판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만 참고로 하시고 김규흥과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국인 줘루의 글을 읽어봅시다. 범재의 손자께서 풀어쓰신 글입니다. 조선의 광복을 회고하고 축하함 글쓴이 줘루(추노, 邹鲁,1885-1954), 1905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907년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신해혁명 후 1913년 선거에서 국회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2차 혁명 실패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면서 1914년 중화혁명당에 가입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 집행위원에 당선되었고 서산회의에 가담했다. 1927년 국민당 통합 이후 국민정부위원, 중앙특별위원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상 전동현『두 중국의 기원』(서해역사책방 16) 서해문집p 367 참조 조선의 건국은 기자(箕子)로부터 이미 수 천 년이 된다. 조선은 일본에 대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일본이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시초가 조선이 전해 준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일본은 이리와 같은 야심을 가지고 끝내 조선의 큰 적이 되었다. 즉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도와준다는 미명 아래 조선이 중국과의 관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마침내 1910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는 이미 조선과는 40여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전에 내가 중국 남쪽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김범재(金凡齋)라는 조선인 한 사람이 참가했다. 그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먼저 중국의 혁명이 성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 김범재 동지는 아주 성실했다. 나는 비밀 자료를 많이 갖고 있었는데, 전부 그에게 보관시켰고, 많은 정보도 전부 그로 하여금 전달토록 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옛날 옷과 관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김동지는 진영사(陳其美)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 때까지 나는 진선생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진선생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가 상세히 말해 주었고, 동시에 나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는 진선생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와 진선생은 마음속으로 깊이 사귀었다. 무창봉기 이후 나는 광동 북벌군의 병참총관으로 선두 부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상해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에게 잠잘 방과 많은 비품이 필요했는데, 진선생은 나 대신에 사람들을 시켜 완전하게 준비를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김범재 동지가 사전에 연락을 취해준 때문이다. 광복 이후 김동지는 광동성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고문이 되기 전에는 그의 용돈을 내가 대주었다. 또 그는 나의 돈을 꾸어 간 적이 있는데 고문이 된 후 얼마 안되어 계약서 한 장을 들고 와서 말하기를 “나는 여러 번 당신 돈을 꾸었는데, 내가 돈을 갚으려 하면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조선에 인삼 밭 하나를 샀는데, 이 서류가 바로 인삼 밭 계약서다. 앞으로 여기서 소출된 삼이 매년 당신에게 보내어 줄 것이고, 이 삼 밭은 바로 당신의 사업이니 그리 알아 주시오”하고 말했다. 그 후 김동지는 해마다 삼을 보냈지만 그 당시 나는 조선에 가 본적이 없었다. 어쨋던 나는 조선에 삼밭을 갖고 있었고 이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조선인과 교류가 많았고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아졌다. 민국 12년(1923년) 나는 국부 손문의 명을 받아서 국립 광동대학을 설립하고 멀리 월남, 대만 및 조선 청년의 입학생을 모집했고, 입학시험에 편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수업료 면제 대우까지도 하고, 또 의복과 책도 공급하여 조선 등의 청년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입학하도록 하여 조선의 광복 활동 인재를 많이 양성코자 했다. 국부가 서거하고 난 이후 나는 학교를 떠났지만 조선 학생들이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들었고 귀국한 조선 학생들이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수난을 당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민국 18년(1929년) 나는 전 세계 29개국을 돌아보고 귀국한 뒤 국내의 정치 상황이 안정되지 못함에 크게 상심하여 일본으로 가서 휴양을 했다. 그 때 황염배 선생이 저술한 조선에 관한 책을 보니, 일본의 조선통치가 우수하다 평하고 그로 인하여 조선의 교육, 공업, 농업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민생은 어떻게 안정되었는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것이 아주 이상하다 생각하여 조선으로 직접 가서 실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이때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발생하여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했고 나는 조선과 동북 3개성을 살펴보고 황염배 선생이 책에 쓴 내용이 실제와 같은지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바로 눈에 보이는 그 곳은 비인간적인 사회인지라, 이때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詩로 썼다. 집들은 납작납작하고 그 위로 넓은 하늘, 달은 휘영청 밝다. 길쌈은 별 것 없고, 사는 모습은 희미하다. 비쩍 말라, 뼈대만 남고 정신도 지쳤다. 간간이 들리노니 신음소리뿐이다. 길가에는 낡은 옷과 모자를 내다 놓고 팔아서 쓰겠다고 점포를 차렸구나. 몇 가지 중국 물건을 함게 파는 모습 내 마음이 상하여 눈에 계속 아른거린다. 부산에서 경성가는 기차를 타고 북으로 달리며 자주 창밖을 바라다보니 곳곳이 처참하고 황량하여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다시 오언(五言) 시를 읊는다. 기차는 부산을 떠나 북향하여 경성으로 달린다. 철로변의 민가 모양 내 마음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쪽이 찌그러졌는가 하면 서쪽도 내려 앉았구나. 황량하여 가시와 잡초더미지붕은 제대로 이지 못했고 네 벽은겨우 진흙 칠을 했구나 조그마한 서너자의 집이지만 한 가족이 들어가 사누나. 쓸쓸하게 세간은 없고 이리저리 잡초만 무성하다. 마소와 같이 잠자고 닭, 오리와 같이 밥을 먹는다. 산하는 그래도 예쁘고 미더우나 산사람을 살았다 할 수 없다. 벼와 밀 이삭은 실하지만 농사짓는 이가 먹을 수가 없네. 사는 모습이 어찌 이리 참혹한가 아 망국민의 슬픔이여 이로써 황염배선생의 글과 내가 본 것이 상반됨을 알 수 있다. 황선생은 자료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나중에 황선생의 서문에 보니, 그의 조선 방문은 일본인 초청에 의한 것이고, 그가 취재한 것은 도서관에서 얻은 것이고, 황선생이 어떤 지역을 방문하면 전부 일본인의 안내에 의했다 한다. 그래서 나는 황선생이 당시 조선의 망국인민 실상을 볼 수 없었음을 확실히 알았다. 열차가 경성에 도착하여 각지를 살펴보고 느낌도 많았고, 시도 몇 편을 썼는데 여기서 여덟 수를 기록한다. 산하는 예대로이지만 주인은 옛 주인이 아니로다. 남아 있는 궁궐은 빛에 바랬구나. 흥망을 보노라니 감개가 무궁하고 公子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네 – 경성의 저녁– 고궁에 곡식을 심다니, 자못 애처롭다. 웃음 띈 홍안은 다시 볼 수 없구나. 지난 날 가무 울림은 묻지도 마라 사슴만이 쌍을 지어 손님을 맞네 – 동물원으로 꾸민 옛날 창경궁을 방문함 – 창경이란 옛 이름을 아직도 가졌지만 짐승들과 놀이기구 어지러이 널렸구나. 구경 끝날 즈음 상심케 하는 전시물 하나. 지난 날 고국의 일을 말하고 있구나 - 창경궁의 조선의 옛 물건을 모아둔 박물관을 보고– 패배의 기분은 성안에 가득하고 나라 안은 해와 달이 다시 시작되네. 독립 향한 교두보는 찾을 길 없고 이 강물만 여전히 漢字 이름 가졌네 - 한강 다리위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 넓은 들판 군사들로 가득하다. 기병 보병 포병 공병 나누어져 있네. 삼엄한 보루는 기세등등한데 자세히 보니 한국군이 아니고 일본군이로구나. - 들판의 군병을 보고 - 또 다시 박람회 열었다더니 땅과 물에서 나는 만물 다 모았구나. 문득 지난 날 이상한 기억이 생각나네. 만주 몽고 산물이 한국과 대만에 온 것인지. - 9월에 경성에서 조선 박람회가 열렸다. 일본이 전에 동북 3성과 몽고 물산 전을 열면서 생산지 이름을 만주, 몽고 외에 조선, 대만으로 나란히 썼다. – “다 함께 배우고 일으켜 동화하자!” 달콤한 말로 어찌 세인의 공감을 받겠나. 오래된 간격을 그리 쉽게 건너려 하다니 골목마다 울리는 음악 소리 못 듣는가? - 일본 본토와 조선을 동화시키고자 일본은 조선에서 선전 활동에 열중한다. – 이완용을 매국노라 원망하는데 후영은 이등박문 찬양시를 썼구나. 지금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라 할 지경인데 이등을 다시 욕하고 말고 겨를이 없네 - 이번 경성 여행 시에 이완용이 이등박문에게 보낸 시를 보았다. 그 시에– 인생 백 가지 일 기약할 수 없으니 흰머리 되고 난 후 만남 또한 기이하다. 삼십년 전 그대에게 준 말 기억하오? 좋은 세월 다시 오면 만나자고요. 나는 경성 구경을 끝내고 평양으로 가서 기자릉을 참배했다. 기자릉을 보기 전에는 일본이 조선 인민을 고압적으로 다룬다는 것 만을 대단히 원망했다. 그러나 기자릉을 한번 보고 난 후에, 조선사람들이 능 주변 숲을 꾸민 기술과 그 웅장한 기세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능을 잘 보존하는구나 생각하니 불현듯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때 그 느낌을 한편의 시로 쓴다. 기자 나라에 와서 마침 기자릉을 참배하니 상나라 주나라 성하고 망함은 비교도 안 되네. 이 능도 숲이 우거져 오히려 기상 넘치고 대동강 물 휘이 돌아 구불구불 흘러간다. 모란봉 위에는 큰 나무가 푸르렀고 아름다운 산과 물 잘 보존했구나. 삼천 년 지난 지금 이곳에 내가 와서 계단을 밟고 올라 재배하니 감개무량하다. 길고 긴 역사 중에 흥망을 거듭해 왔으니 이 나라 문화도 일찍부터 열렸구나. 오늘에 와 기자를 성인이라 부르며 그 동안 몇 왕조를 이루었구나. 관리들 서로 의지하여 역사를 만들어와 삼십년 전 까지도 나라를 유지했는데 오늘 통치는 간데없고 오히려 능멸뿐이라. 소 말 노예처럼 채찍 받고 달리누나. 성인 기자의 영감 그대로 샘물은 여전히 솟아나고 기자의 기운도 바야흐로 솟아나니 원컨데 기자 샘은 마르지 말고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낼지라. 능 주위에 빽빽이 둘러 선 수 많은 나무들 이 능을 포근히 덮어 주듯이 천추만세 그치지 말고 이어지고저. 나는 조선을 둘러보고 조선인의 망국의 아픔을 목격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이에 따라 늘어갔다. 그 후 중화민국 20년(1931년)에 내가 다시 중산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 조선 청년의 입학을 더욱 지원했다. 그 때 이 모 선생으로 하여금 조선 학생 입학시키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한번은 의학원의 어떤 조선 학생이 일본 영사관에서 몰래 보낸 사람에게 체포되어 갔는데, 나는 직접 일본 영사관에 교섭하여 석방을 요청했지만 일본 영사관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영국 대사관에 교섭하여(일본영사관은 그 때 샤면의 영국 조계에 있었다.) 그 조선학생이 비로소 자유를 회복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 사람은 나에게 광주에 있는 조선혁명당 인사 및 운영 상황을 말하라고 요구했는데,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참나무 껍질로 몽둥이를 만들어서 나를 때렸다.(참나무 껍질로 사람을 때리면 상처는 나지 않으나 뼈가 부러지고 나아가 죽을 수도 있다.) 내가 발설하도록 고문을 하였으나 나는 아픔을 참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나는 풀려났는데, 내 몸은 이미 많이 상했다. 다행히 학장이 바로 와서 나를 구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치료가 늦었으면, 그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서남정무위원회를 맡고 있어서, 광동성에 오는 조선 당인과 그 조직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 당인과 조선 학생이 학교에 많았다. 노구교사건(1937.7.7) 이후 우리나라(중국)는 수천 년 간 볼 수 없었던 신성 항전의 깃발을 올려 대 일본 전쟁에 뛰어들었다. 조선 학생과 조선 당인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의 항일 진영에 참여하고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중국의 항전이 승리하고 독립운동이 마침내 성공했다. 이에 즈음하여 당(국민당)중앙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고 조선 인민과 중국 인민 모두 즐거워한다. 나는 수 십년 동안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그 즐거움은 재론의 필요가 없이 큰 것이므로, 이에 이 글로서 축하의 뜻을 표한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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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옥천 문정리 출신 범재 김규흥(4)2013년 1월 한국에 갔다가 옥천 문정리 범재 김규흥 지사의 생가를 찾았습니다. 마침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의 눈을 푹푹 밟으며 문향헌으로 들어갔네요. 그 때는 소형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설정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사진을 찍어 이미지 질이 안 좋은데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김규흥의 증조부는 세도정치를 피해 충복 옥천군 교동으로 낙향한 조선시대 세가였습니다. 당시 기와 85간, 초가 12간을 가진 거부였으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할 때 시 무리한 과세를 요구해 집안이 몰락하던 때에 범재공은 청풍 김씨 23세손으로 1872년 6월 13일 옥천읍 문정리 문향헌에서 출생했습니다. 친척 어른으로부터 한학을 익히고 1901년부터 상경하여 민영환(閔泳煥, 1861-1905)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국가 근대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종교의숙에서 교원을 하면서 교육으로 자강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목화밭에 진명(후에 창명으로 개명)학교를 설립했는데 현재 옥천 중향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현 죽향학교에 남아 있는 현존하는 건물입니다. 김규흥의 고택 문향헌은 1920년대 중국에서 돈이 급해 처분하여 현재는 춘추민속관 고택체험 민박지가 되었습니다. 삐뚤삐뚤한 손글씨 문패가 걸려 있네요. 민영환과 여러 차례 고종황제를 알현했는데 고종황제는 김규흥에게 중국 아청은행에 예치된 자신의 비자금을 찾아서 무관학교를 설립하라는 밀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길도 떠나기 전에 누설되어 가택연금을 당하다가 1908년 초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름을 김복(金復)으로 바꾸고 광저우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기를 ‘复’의 본명은 김규흥(金奎兴)이니 이 점 양해하시고 제(弟)의 성명 및 진행사항은 절대로 신보(新报)나 잡보(杂报)에 등재하지 마시고 비밀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회신은 광동성 旧仓巷 图强医院 朝报事务所로 보내주시기 바라며……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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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상품이 선전이 상하이보다 50% 비싼 것으로 드러나!코스트코(Costco) 선전 매장이 문을 연 지 열흘이 지났지만 열기는 여전하다. 최근 어떤 소비자들은 일부 같은 종류의 상품에 대해 선전 매장의 가격이 상하이, 소주 및 기타 매장보다 비싸고 할인 가격이 다른 매장의 원래 가격과 같다는 글을 올렸다. 그 중 코스트코 '왕훙'(网红) 제품인 베이글(贝果), 쇠고기롤(牛肉卷) 등이 포함된다. 베이글은 종종 코스트코의 필수 구매 리스트에 포함되며 심지어 한때 품절되기도 했다. 1월 22일, 룽화구에 위치한 코스트코 선전 매장에서 베이글은 한 봉지에 6개 포장이고 한 번에 두 봉지씩 구매해야 하며 오리지널 맛, 참깨 맛, 베리 맛, 계피 맛 4가지 맛이 있으며 판매가격은 54.9위안이다. 그러나 같은 베이글은 상하이에서 한 봉지에 34.9위안에 판매되고 있으며 할인 시 약 30위안에 판매된다. 또한 코스트코 선전 매장의 소고기롤은 개당 28.9위안, 상하이, 소주 등지에서는 개당 19.9위안에 팔려 가격 차이는 거의 10위안이다. 베이글, 소고기롤과 같이 표준화 수준이 높은 제품이 매장마다 가격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선전 매장의 할인율이 더 약한 걸까? 1월 22일, 코스트코 측은 "선전 매장에서 파는 베이글은 다른 매장과 다르며 다른 품목에 속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공예 제품을 적용한 베이글은 선전 매장에서 처음 판매되었으며 향후 점차 각 매장으로 보급될 것이다. 그리고 선전 매장의 소고기롤은 다른 매장보다 고기 양이 50퍼센트 더 많았으며 선전 매장에서 "초대형 소고기롤"을 판매하였다. 코스트코에서 4k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유명 창고 슈퍼마켓인 샘스클럽(山姆) 룽화점이 있다. 2017년에 개업한 이 매장은 샘스클럽이 선전에 있는 세번째 매장이다. 선전은 샘스클럽이 중국 시장에 진출한 첫번째 매장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1996년 샘스클럽은 선전의 부자 동네인 샹미호(香蜜湖) 일대에 아시아 최초로 매장을 열었다. 그런데 코스트코의 중국 남부 첫 매장 역시 선전에 터를 잡았다. 창고형 회원상점은 매년 수백 위안의 회원비가 필요하고, 게다가 국내의 자동차 보유율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샘스클럽은 중국에 들어온 후 오랜 기간을 거쳐 한때 폐점 직전까지 갔다. 2016년 이후 샘스클럽은 2016년부터 2023년까지 39개의 매장을 열었다. 2023년 말 현재 샘스클럽은 중국 시장에 47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다. 샘스클럽은 2023년에만 상하이, 선전, 푸저우, 우한 등지에 5개의 매장을 열었다. 지난해 샘스클럽 차이나는 약 20개의 매장이 준비 중이며 2024년에는 6~7개의 신규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이에 비해 중국 시장에서 코스트코의 확장 전략은 더 보수적이다. 2024년 1월 초 현재 상해, 닝보, 항저우, 선전에 있는 6개의 매장만 오픈했다. 샘스클럽이 온라인 소매 및 전국 배송을 할 때 코스트코는 여전히 오프라인에서만 판매한다. 월마트는 2021년 11월에 샘스클럽의 중국 유료 회원이 400만 명을 넘어섰고 샘스클럽의 유료 회원이 500만 명을 넘어설 것을 보수적으로 추산하고 있다. 260위안의 회비로 계산하면 매년 샘스클럽이 중국에서 버는 회원비만 13억 위안이 된다. 흥미롭게도 1월 4일, 코스트코 차이나에 따르면, 코스트코 선전 매장은 이미 9만 명 이상이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 중 약 10%가 홍콩계 회원으로 또한 샘스클럽 선전 매장의 중요한 고객층이다. 199위안의 오픈기념 회원가입비만 개업 전에 약 1,800만 위안을 유치했다. 앞으로 창고형 회원제 슈퍼마켓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샘스클럽과 허마셴셩(盒马鲜生)은 “싸움”이 한창이고 영휘슈퍼마켓(永辉超市), 푸디(fudi), 메트로(麦德龙) 등도 배치를 가속화하고 있다. 코스트코가 나중에 앞설 수 있을지는 여전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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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대한인국민회 문양목 회장이 김복에게 보낸 편지(3)이편지는 미국 대한인국민회의 문양목회장이 광저우에서 김복(김규흥)이 보낸 편지를 받고 쓴 회신입니다. 김복은 광저우에 조선신문사를 설립하려고 하다가 인쇄기 구입할 돈을 사기당해서 한글 활자가 있는 인쇄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의 상황을 어떠했을까요? 문양목회장이 김복에게 보낸 편지(1911.05.25) 오늘 조국의 상황은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둥지(터전)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 뒤집혀진 현상인 바 마치 계란이 눌리어져 깨어지기 직전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은 원수 왜적의 교활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큰 홍수가 밀려와 봇물이 터지고 둑을 흘러 넘쳐 넓고 멀리 퍼진 것처럼 중국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동포들은 슬프고 참혹한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잎사귀들이 벌레에 먹혀 힘없이 떨어져 분분히 날려 흩어진 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호, 이러한 시기에서의 진정한 지사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온갖 정성으로 공을 세우는 영웅이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이 어려운 때를 인내하며 더욱 내핍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좋은 효과를 나타내기에 알맞은 입지를 만들고 그 때의 시세를 고루고루 관찰하여 정확한 판단아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략으로는 군사와 외교 이 두가지 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의 정략이 짜임새 있게 진행된다면 이는 실로 신묘한 계책입니다. 이를 빗대어 말씀드리면, 군사상의 문제는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감히 내지(朝鮮)에서 살겠다는 희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버려야 하고 반드시 중국에 적(籍)을 두고 서로 돕는 힘을 갖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외교상의 관계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는 교유할 수 없을 것이며 반드시 중국과 연면(連綿)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국 사람에 있어서 중국의 토지는 곧 이와 입술과 같은 관계로서 서로가 의지하는 종족이며 한편, 뼈와 살이 서로 친근해지는 까닭이 바로 군사인 것이며 외교인 것입니다. 중국과 군사와 외교 양 방면을 추진하는 것은 실로 긴요하고 절실하게 착수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중국에서 이러한 일을 착수할 수 없게 된다면 오늘날 패망한 한국의 장래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조국의 독립 쟁취라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중국의 운명이 아직 왕성하지 못한 이때에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실현 방법의 하나는 스스로 본회(國民會)를 성립한 후에 뜻을 기울여 하나하나의 모든 행동이나 동정에 있어서 관연 중국의 뜻있는 인사들과 더불어 친교를 맺어 대의로서 긴 안목의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도모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형세가 어렵고 힘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 시도하는 바가 현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주저앉지 말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데까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청(請)해 오신 것에 대하여 대략 진술하고자 합니다. 미국에 건너온 한인들의 실상을 말하면 그 가부(可否)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주 전역에 산재한 동포의 수는 모두 칠백여인으로 헤아려집니다. 그들이 미국에 건너온 초기에는 가지고 온 돈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기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들은 빈손으로 상륙하여 서둘러서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한 곳이 노동계인데, 자기 한 몸 생활하는데도 몹시 힘들고 곤란한데다 또 하나의 상황은 내지(本國)에 살고 있는 부모 형제 처자들, 딸린 식구들이 살아가는 실정은 춥고 배고픔의 연속이었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나가고자 기를 쓰는 이들이 백명 중 아흔아홉명은 그러하다고 헤아려 집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 누구든 목석이 아니고서야 자기의 친속들이 추위에 얼어붙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찌 구제하지 않고 방관만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실제로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없는지라, 이에 동포들은 서로가 힘을 합치고 온 힘을 다하여 밤늦게까지 꾸준하고도 부지런하게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각기 의무를 다하면서도 서로 논(論)하는 것은 간(肝)과 뇌(腦)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은 애국을 하고자 하는 성향(性向)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포들은 본회 기관보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유지를 위한 제반 경비의 지출과 용도를 알아채고 성심껏 후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피 같은 돈으로 근근이 유지는 하고 있으나 그날그날의 경비를 맞추는데 급급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별다른 여력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신한민보 역시 필히 구입해야 할 기계도 아직 못 들여오고 있는 형편이니 어떤 행운이 있어 본 기관보를 계속 운영하는 소임을 다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 속에 적혀 있는 일반회원(발기인을 뜻함, 구봉갑. 진형명, 추노 등)들은 멀지 않은 앞날에 북치는 소리 둥둥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 분들이며 지조(志操)가 고상하며 세속을 초탈한 기상(氣像)을 지니고 있는 대단히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세력은 다 같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어 뜻하는 바를 성취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듯합니다. 오호라! 우리들의 처지가 어찌하여 이와 같이 어려움이 심하단 말입니까. 조국의 미래에 빛을 던져주는 희망을 발견했지만, 큰 기대를 갖고 요청한 일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에 긴 한 숨만 나올 뿐이며 가슴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무엇으로든 채워 넣어야 할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이 안타까움에 덧붙여 말씀드리기가 민망하여 이만 줄이옵니다. 이에 바라건대 오로지 좋은 일만 있기를 축원합니다. 의사(義士)님의 건강이 크게 편안하시어 나라를 소종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시옵소서, 아아! 그 일들을 하시는데 하늘의 돌보심이 있어 탈이 없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에 대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좋은 일만 정착되기를 빌고 또 바라옵니다. 檀聖紀元 四千二百四十四年(檀紀 4244년) 五月 二十五日 (5월25일) 대한인국민회북미총회장 문양목(文讓穆) 총무 조원두(趙元斗) 서기 김형필(金亨弼) 등 김복 대인 각하(金復 大人 閣下)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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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범재께서 미주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 (2-3)弟는 即时로 그 서한을 여러분께 보이니 모두가 기꺼히, 各各 出资하여 数日 동안에 资金이 모였습니다. 이리 하여 제반 설비가 완비되고(*새 机器 값은 벌써 尹에게 보냈고) 机器의 到着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此日彼日 미루어진 것이 数个月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불쑥 回信이 왔는데 전하는 말이 前日 尹이 担当한 机器에 关한 것이었고 말인 即 趙锺缙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돈을 훔칠 계획을 꾸미었고 지금은 이미 그 사기친 돈을 가지고 멀리 달아났다고 하며 尹 역시 어느 곳에 있는지 行方을 모른다......라고 云云합니다. 그러니 弟는 사기를 당한 바가 되었으며 그것과 더부러 이미 消费한 돈을 合하면 机器한틀값을 훨씬 넘겼읍니다. 그런데 机器는 끝내 오지 않으니 推进하던 重要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人情(心)이 어찌 이와 같이 열악하단 말 입니까? 弟 한 사람이 信用을 잃는 것은 同情(矜恤)할봐 못 된다 치더라도 이번 기회가 진실로 아깝고 쓰라려서 重言复言(缕述)아뢰오니 엎드려 诸兄께 바라건데 会议를 열어서 充分히 议论하신 后 그쪽 会馆에서 두 세사람의 要员을 选出하여 至急히 广东으로 派遣하여 이 事业을 더부러 协助하고 推进했으면 합니다. 一部 机器 및 活字粒 等을 마련하는 것은 或 의연금이나 或 共同出资로 하여 美国으로 부터 购买해 带同해 오신다면 目前에 合头된 아주 어려운 局面에 다시 없는 크나큰 幸福이요, 만약에 이번 기회를 잃는다면 아주 아주 餘望이 없읍니다. 统亮(弟)은 눈물이 다 하고 목소리 마저 갈아 앉아 글월이 꼼꼼하게 格式도 차리지 못 하였을 뿐더러 원만하지 못한점 널리 용서하시 옵소서. 孔圣2462(1911년) 3월 7일 金复谨上 거듭 엿줍거니와 "复"의 本命은 奎兴이니 이점 谅解하시고 弟의 姓名 및 进行事项은 绝对로 新报나 雜报에 登载하지 마시고 秘密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回信은 广东省 旧仓巷 图强医院 朝报事务所로 보내 주시기 바라며 여러분이 会议하신 结果에 希望있는 단서가 있으시면 우선 전보로 알려 주시기를 간절히 仰望 하나이다. 여러 同志의 劳心에 큰 慰安이 되었기에…… 마지막 한 장 发起人 名单은 省略합니다. 여기에 적힌 분들은(发起人) 하나 같이 모두 志士兼势力 있는 분들이며 그 外에 여러분 역시 请心으로 얻기 어려운 분들입니다. 이를 밝히오니 헤아려 주시옵소서. *统亮은 벼슬의 一种인듯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