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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8) 피난 온 임시정부 일행을 맞이한 채원개

기사입력 2023.03.20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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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일지에 김구 선생이 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를 먼저 떠나 광주에 도착한 후 이전부터 중국군 계통에 복직하던 이준식, 채원개 양인의 주선으로 동산(東山)의 백원(柏園)은 임시정부 청사로, 아세아여관은 전부 대가족을 수용케 되었으니”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던 동산백원은 현재의 쉬구웬로 12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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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일행이 광저우에 도착한 날자에 대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제시의 일기』에 의하면 1938년 7월 17일 입니다. 김구선생은 7월 16일 광저우에 도착했고요. 동산백원에 머문 시간은 두 달입니다. 


    임시정부 요원과 가족들은 창사에서 후난성 주석 장즈중(장치중, 1890~1969)이 마련해준 열차를 타고 3일 만에 광저우 황사(黃沙) 기차역에 내렸습니다.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 1922~2016)은 『조국의 하늘을 날다』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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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에 도착하니 당시 중국군이던 채원개 선생이 자동차를 몰고 마중을 나왔다. 평남 영원 출신인 채원개 선생은 나중에 광복군에 활동했고 해방후에는 국군 사단장을 지냈다. 선생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를 태우고 아세아여관으로 갔다. ” 


    채원개는 고향 평안남도 영월군(宁远郡)에서 안식일 교회 선교사들이 설립한 의명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임시정부 요원과 가족들이 광저우로 피난 올 무렵,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쉬구위안로후가 1-13호에 살고 있었습니다. 


    1940년 7월 말, 한국독립당 및 조선민족혁명당 등 주요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한 ‘7당 통일회의가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열릴 무렵, 채원개의 연락처가 군사우편함〔‘廣東軍郵 72局 劍字 89號 附’〕인걸 보면 임시정부 일행이 광저우를 떠날 때, 채장군은 광저우에 남아서 중국군에 복무하고 1940년대 초반 광복군에 합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0년 8월 10일,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 창건을 준비할 무렵, 광복군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고,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는 날, 채원개는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처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40년 성립된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강제 해산한 대한제국의 군대를 계승했습니다. 광복군 창군식에서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은 성립 보고를 하면서 한국광복군은 1907년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대를 계승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군 병력과 맞서 일제의 국권 강탈을 막았고, 만주로 이동한 의병들이 독립군으로써 대한제국의 군대를 대신해 나라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채원개는 만주에서 의병들이 조직한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한 이래 27여년간 줄곧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니 광복군 참모 자격이 충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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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뒤 광복군 제1지대장 채원개 장군과 김구임시정부 주석과 찍은 사진.「秘話 第一共和國」, 『동아일보』, 1973년 8월 24일.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한 이후, 채원개는 고급참모에 임명되었습니다. 1944년 한국광복군 제1 지대장에 전임되어 후난(湖南), 간(赣)지역에서 적군 중 한적 군인의 귀순을 유도하고 적 후방교란 및 유격 작전에 전력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가족을 교포 일행과 한국으로 출발시킨 다음, 채원개는 광복군 제1지대를 인솔해서 한커우(漢口)에 도착하여 창사(長沙) 방면에서 이동해 온 전 일본군 내 한적사병(韓籍士兵)으로 구성된 1개 대대 규모의 한인부대와 합류해서 구강(九江)을 거쳐 난징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였기에, 부대를 해체한 다음, 1946년 초, 난징을 떠나 상하이에서 선편으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부산항에 도착하여 세관창고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열차편으로 서울로올라 와 가족과 재회한 그는 서울역 앞 수용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장충동에 있는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남산 밑 한미호텔로 숙소를 옮겼습니다.

     

    참고자료 

    김학민 이병갑 주해, 『백범일지』, 학민사, 1997년3월.
    김신,『조국의 하늘을 날다』, 돌베개, 2013년 12월.
    채원개 공적자료, 국가보훈처.
    「총사령부 기구의 변화」,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국사편찬위원회, [DB/OL]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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