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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유명해졌다

기사입력 2023.05.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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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상병위문공연 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류저우 사람들과 한 집안사람처럼 친해졌습니다. 한국 청년들은 나라를 잃은 암담한 상황에서, 그것도 전쟁 중 피난길에 조직되었지만, 민족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류저우 인민들과 함께 항일전선에서 나섰기 때문입니다. 

     

    전문 배우나 가수가 아니지만 당당하게 항일 공연을 했습니다. 그들이 지방으로 나가면 사흘로 계획된 공연이 일주일로 연기되기도 했습니다. 한국 청년들은 류저우에서 전개하는 각종 항일활동과 회의에 빠지지 않고 3·8 부녀절 행사나 류저우극장 낙성식 등 구국 단체들 모임과 행사가 있는 공개장소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도 어김없이 나타나 류저우 항전 대오의 중견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활동으로 인해 배후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도 유명지고 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임시정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공개적으로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류저우에서 탄생한 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저조기를 벗어나게 하고 임시정부의 지위와 역할을 제고했습니다. 부상자 모금 공연과 항일홍보, 공연 등으로 인해 중국 기관들과 긴밀히 협조하고 중국인과 우의를 돈독히 하며 현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훌륭한 효과를 거두며 류저우 지역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마치 시커먼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번개가 치고 울린 우레처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강력한 생명력을 터트리고 전투력을 과시했습니다. 1939년 2월 성립되어 류저우를 떠나는 4월까지 약 2달 동안 그 짧은 기간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활동이 20여 회나 신문에 보도되었으니 2~3일에 한 번씩 보도된 셈입니다. 

     

    1939년 2월, 일본군이 하이난도와 광시 친저우완()을 공격하여 류저우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 같은 위험에 처했습니다. 엄항섭이 충칭에 있는 김구에게 대가족 일행을 충칭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시켜 달라고 전보를 보냈습니다. 김구는 중앙 당국과 여러 차례 교섭하여 임시정부 대가족 식구와 짐을 운반할 차량 6대와 여비를 마련해 류저우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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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일본군이 하이난도(海南島)와 광시(廣西) 친저우완(欽州灣)을 공격함으로써, 류저우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위험해졌습니다. 한국의 동지들이 정말 떠난다.는 소식이 퍼지자, 류저우 주민들은 잊지 못한 추억들을 회고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4월 4일 오후 2시, 각종 항일 행사가 공공체육관에서 서막을 여는 날, 항전단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떠나보내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류허우공원 음악정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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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4월 22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류저우 허난 위펑산(魚峰山) 러췬사(樂群社) 문 앞 서남 운수 공사 주차장에 충칭에서 온 장거리 버스 6대가 주차해 있었습니다. 김구가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국민당 교통부에서 보낸 버스입니다. 오후 1시 반,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일행은 구국 단체의 동지들, 위문받았던 부상병, 같이 살았던 이웃들과 아쉬운 석별을 나누고 충칭으로 향했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멈추고, 우리도 류저우 탐방을 마쳤습니다. 한국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커피와 케이크를 사주셔서 누적된 피로를 풀고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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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0km무사고안전운행을주신우리의최고드라이버들에게도심심한  감사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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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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