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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공산당 조직은 인력거와 마차를 수리하는최정무에게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때 17세였죠. 너무 의외였습니다. 훌륭한 군관을 양성하는 황포군관학교에 자신이입학한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황푸군관학교에 와서 당시 시대의 위인으로 손꼽는 정치부 주임 저웅언라이(周恩來, 1898~1976), 군사부 교관 예젠잉(叶剑英, 1897~1986) 등을 만났습니다. 최석천(崔庸健, 1900~1976), 양림(楊林, 1901~1936)과 같은 유명한 조선인 교관들도 만났습니다. 황푸군관학교 조선인 학생들은 토요일이 되면, 학교에서 모이거나 광저우 시내 조선인이 운영하는 국숫집에 모였습니다. 국내외 정세와 정치이론을 토론하고 서로의 견해를 털어놓으며 열렬히 토론하는 시간입니다.
황푸군관학교에 입교 후, 최정무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혁명정신도 더뜨거워졌습니다. 마치 자신이 무산계급 전사나 된 듯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중국혁명을 위해 평생토록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받았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학교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7년 4월, 교장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황포군관학교내 공산당을 색출하고 체포했습니다. 군교내 자신이 소속되었던 조직의 교관과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흩어졌습니다. 이에 항거하기 위해 최정무는 그해 12월,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폭동에 참여했으나공산당 폭동은 3일 만에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문제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자신이 소속된 조직과 헤어진 것입니다. 최정무가 중국에서 의지할 곳은 오직 공산당 조직인데 대오가 분산되니, 마치 고아가 된 듯, 자신의 신분조차 증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하이에 가서 자신을 황푸군관학교에 소개한 공산당 조직을 찾아야 했습니다. 경비가 없네요. 때로는 걸식하고, 날품도 팔아 끼니를 때우면서 꼬박 넉 달을 걸어서 상하이로 가서 당 조직을 찾았습니다.
상하이 공산당 한국지부는 최정무에게 영국 조계지에 있는 자동차 수리 공장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국민당이 공산당원을 색출하는 시기였습니다. 공산당원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과 학살이 강화된 시기인지라 공산당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체포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다. 사상 전향을 하거나 공산당에서 탈퇴하는 자들도 속속 늘었습니다. 최정무와 함께 중국에 온 동지 중 몇 명은 이미 러시아로 돌아갔고, 한 동지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