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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석은 1919년 삼일 만세운동 때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옌지(延吉) 도립 제2중학교 2학년 때 삼일 만세운동을 맞았는데, 1919년3월12일 밤, 학우들은 밤을 새우며 전단을 찍고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태극기를 빨리 만들기 위해 직사각형의 아연판에 구멍을 뚫고 태극기 모양으로 잘라 붉은색, 남색, 흑색 잉크를 솔에 묻혀 한번 칠하면 바로 국기 한 장이 되어 밤새 수 천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단과 태극기는 “충렬단”이란 명의로 배부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학우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의 원칙을 제기했기 때문에 조선도 곧 독립할 것이라는 희망에 넘치는 말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2천만 민중이 모두 일어나 독립 만세를 크게 부르면 파리평화회의에서 세계열강이 조선의 억울함을 듣고 독립을 승인한다고 했습니다. 유기석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것처럼 흥분하고 기뻤습니다.
3월 13일, 룽징 만세 시위대 선두가 막 가두로 진입하려고 할 때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유기석은 폭죽을 터트리는 줄 알았는데 “모두 땅바닥에 엎드리라”는 고함이 들려 왔습니다. 중국 경찰들이 군중을 향해 실탄을 던졌습니다. 유기석도 도망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총알에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밭에 있는 수수 뿌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룽징 만세 시위 후에도 조선 학우들은 애국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어린 학우들은 큰 학우들이 시키는 대로 편지를 보내거나 전단을 뿌리고 큰 명절이 되면 집마다 국기를 꽂았습니다. 만세를 부르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면 연합국이 우리 정의를 수호하고 ‘민족자결’을 허용할 줄 알았는데 민족자결은 조선과 같은 약소민족에는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윌슨의 기만적인 구호에 현혹되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또 하나의 서광이 비쳐 왔습니다. 스탈린이 소련은 동방의 억압받는 민족 노동자 대중을 도와 오랜 기간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며 아울러 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에도 참여해서 조선 민족 독립운동도 승리로 이끌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920년 가을, 유기석의 어머니는 가산을 정리해서 독립군 군정서가 관할하는 왕청현으로 이사했습니다. 부친이 유기석에게 빨리 상하이로 도망가서 공부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추석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마을에서 소나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쇠고기를 먹고 떠나라는 마을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음력 8월14일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11살 동생 유기문이 형을 따라가겠다고 집에서 2~3리 떨어진 강변까지 쫓아왔습니다. 동생이 발을 동동구르며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기석은 나룻배를 탔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