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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안저우 여명학교 재직시절, 어린 시절 헤어진 동생 유기문과 상봉했습니다. 유기문은 형을 따라 아나키스트의 길로 들어섭니다. 1931년, 유기석은 중국인 동지들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과 동시에 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를 시도합니다. 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은 천리방이라는 동지가 시도하고 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는 동생 유기문이 시도합니다.
천리방이 쿠와시마 암살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천리방은 의열단원 이용준(1907~1946)지사의 가명입니다. 이용준은 1907년 충북 제천군 봉양면 원박리에서 출생했습니다. 1925년 3월, 제천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제천군청에 근무하면서부터 신간회에 가담해서 민족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쿠와시마의 집이 중가(中街)에 있는데 대로변 영국 순찰 초소와 약 100m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쿠시마와가 탄 자동차는 대로를 따라 공원으로 들어와 사철나무 울타리를 지나 보초가 서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 자동차는 속도를 줄여 회전하면서 대문으로 들어갑니다. 총영사 주택 입구에 늘 영국 순찰 한 명이 보초를 섰습니다. 쿠와시마는 매일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자동차를 타고 귀가합니다.
쿠와시마 암살은 용감하게 자신을 노출하지 않고 매복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천리방이 공원 관람객으로 가장해 과일 바구니를 안고 벤취에 앉아 총영사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자동차가 회전할 때 수류탄을 자동차 안으로 던지고 과일바구니를 들고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공원 앞문으로 걸가 나가기로 했습니다.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허둥지둥하게 만들기 위해, 같은 날 사람을 만국교 아래의 일본 상선 부두로 보내 그곳에 군수물품 선박 남양환(南洋丸)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중가 공원에서 폭탄 소리가 들릴 때, 동시에 그 배를 폭파하는 작전입니다.
다음 날, 유기석은 천진에서 발행되는 일본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제 오후 6시, 쿠와시마 총영사가 업무를 마치고 승용차를 타고 관저로 돌아가는데 승용차가 관저 대문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흉한이 자동차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담장을 맞혀 다행스럽게도 사상자가 없었다. 쿠와시마 총영사는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폭탄의 위력이 아주 강하여 전체 공원을 진동시켰고 실내에 걸려 있던 천황의 초상화가 떨어졌다. 쿠와시마 총영사는 이 일로 침식을 잊고 불안에 떨면서 자신의 방심을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기 위해 당국은 관저에서 일하는 중국인을 잠시 모두 구금하고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당일 저녁 7시 20분, 어떤 사람이 백하(白河) 부두에 정박해 있는 남양환에도 폭탄 한 개를 투척했는데 폭탄이 갑판위에 떨어졌지만 바로 이 배의 선원이 물속으로 찬훙에 폭발하여 다행스럽게도 사상자가 없었다.
유기석이 처음 천리방(千里放)을 만났을 때, 천리방은 23~4가량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웅장하고 힘이 있었으나 천리방은 토론을 좋아하지 않고 늘 엄숙한 표정입니다. 길고 큰 얼굴에 눈초리는 약간 치켜져 있고 눈빛이 이글이글하며 영웅호걸의 기개도 보였습니다.
유기석이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흑여(黑游)라고 말했습니다. 이름이 으시시합니다. 떠돌아 다니는 검은 물체라는 뜻입니다. 유기석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아나키스트의 풍모를 암시하는 이름이였으니까요. 본명을 물어 볼 수도 없고 남들이 부르는 것처럼 그냥 천리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천리방도 본명은 아닙니다. 성격이 솔직하고 호방하며 천진하고 낭만적이어서 친구들이 그에게 지어준 별명입니다. 그 자신도 이 이름을 좋아하여 그의 가명이 되었습니다.
천리방은 어려운 일이나 모험적인 행동에는 늘 앞장서서 참가했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은 절대로 애매하게 하지 않고 항상 깔끔하게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유기석은 천리방에 대해 “적 앞에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스텐레스”라고 했습니다.
1938년, 천리방은 탕산(唐山)부근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일본이 무기징역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굽히지 않고 수인을 조직하여 투쟁을 벌이고, 늘 큰소리로 간수들을 질책해서 간수들도 그 앞에서는 무서워 벌벌 떨며 얼이 빠졌다고 합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제 투항 후 석방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춘은 10여년 철창생활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출옥 후 얼마 안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35세정도였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