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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4)상하이 지하 공작조

기사입력 2024.01.0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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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12월, 한인들은 일제의 공격을 피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난징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일본군은 난징도 점령했습니다. 난징 대학살이 있기 직전, 임시정부는 동포를 난징으로 불러들여 물가가 가장 저렴한 창사(長沙)를 향해 떠났습니다. 1938년 봄부터, 상하이 공공조계지와 프랑스조계지는 실제적으로 일본 특수공작원 기관이 지배했습니다.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홍커우(虹口)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1,000명은 대부분 조선거류민회에 소속되어 아편과 마약류를 판매하거나 위안부를 운영하는 친일 분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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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기석의 임무는 지하 공작조를 인솔해서 상하이 조계지 등에서 일제에 타격을 가하는 활동입니다. 지하 공작조에 참여한 인원은 한국국민당 계통의 일부 청년과 아나키즘 계열의 청년 10여 명이었습니다.


    공작조 인원은 적지만 이들은 모두 반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열혈 청년들입니다. 회계를 담당한 이동명(李東明)은 대학교 재학 중이었으며 유명한 운동선수였습니다. 이들은 중학교 교사 등의 신분으로 가장하고 만약을 위해 각자의 거주지조차 서로 알리지 않고 유기석만 이들과 연락했습니다.


    상하이 지하 공작조는 후방과 어떤 연락도 없이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프랑스 조계지에서 활동했습니다. 지하 공작조가 암암리 프랑스조계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나 주구들도 감히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조계지도 역시 점점 친일파 천하로 변했습니다. 

     

    지하그룹 10명의 주요 임무는 일제 기관을 파괴하는 등 직접 행동입니다. 우한에서 수 개월간 특수 제작한 폭탄을 광저우로 운반할 때였습니다. 중국 친구 왕 씨가 자원해서 자신은 중국인이라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교통 상황도 비교적 잘 안다며 무기와 폭탄 운반을 자원해서 맡았습니다.


    그런데 상자 모양으로 제작된 특수폭탄을 운반하던 중 열차 안에서 헌병에게 발각되었습니다. 폭탄이라는 소리를 들은 헌병이 놀라 폭탄 상자를 물속에 던지고 왕 씨는 체포되었습니다. 

     

    폭탄 제조를 도운 광저우 정부 당국이 출처를 조사해서 왕 씨는 석방되었지만 상자 폭탄은 물속에서 폐물이 되고 계획한 일은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틀 후 국민당 광둥성 정부의 주석 위한모(余漢謀, 1896~1981)가 편지를 보내 미안함을 표시하고 다시 폭탄을 제조하여 손실을 보상해 주겠다는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배상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한모 수하에 있는 누군가가 고자실을 안 한다고 보장을 할 수 없는지라 계획했던 일을 취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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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일제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상하이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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