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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기미 3.1운동은 누가 획책했을까요? 우리 역사계는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3월3일, KBS 3.1절 특집으로 “3.1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8월에도 “광복70년 특집 다큐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 김규흥”을 방영했습니다.
그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김규흥 지사의 숨은 노력과 영향을 찾아서 굴절된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쓰려는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KBS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김규흥 지사가 임시정부를 파괴하려는 밀정이었다는 다큐를 제작 방영했습니다.
동경국회도서관 미정리자료중에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다로(宇都宮太郞)의 서신모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김규흥과 우쓰노미야가 주고 받은 편지 두 통이 있는데 그 중에 김규흥 지사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쓰노미야에게 돈을 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919년10월 초, 김규흥이 돌연 서울에 나타나 10월 2일, 4일, 9일, 16일, 19일 모두 5차례 우쓰노미야를 만났습니다. 우쓰노미야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조선군 최고 지휘자입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조직을 붕괴시켜 해외 조선인을 단속하기 위해 우스노미야는 첫 만남에서 상하이임시정부를 없애고 내외의 독립파를 개심시키려는 계획으로 김규흥을 회유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규흥은 “독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 희망이 없는 독립운동은 더욱 동포를 궁지에 몰아넣을 뿐이다.”라며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가부 답변은 없었으나 우쓰노미야는 일이 잘 된 것으로 보고 김규흥에게 여비조로 200엔, 노모 방문시 100엔을 주었습니다. 현재 시가로 치면 100엔은 200만원가치이며 김규흥의 서울 방문과 환심을 사기 위해 우쓰노미야는 모두 7-800만원 정도의 돈을 지급했습니다.
10월 28일 김규흥이 상하이로 돌아와 우쓰노미야와 두 차례 편지를 주고 받습니다. 우쓰노미야의 1919년 11월 27일 일기에 ‘상하이 김복(김규흥)이 돈을 요구하는 편지가 왔다’고 쓰고 있습니다.
김규흥은 상하이 독립운동가 200여명 가운데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파가 60여명이고 그 가운데 최근 20여명이 귀국하게 되어 나머지 40여명을 대상으로 회유하려면 경비가 20-30만원이라고 하며 당장 필요한 액수는 베이징 3만원, 상하이 2만원정도를 즉시 지급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김규흥을 연구한 배경한 교수는 우쓰노미야 일기 속에 나타나는 김규흥의 언행과 편지 내용을 보면 김규흥은 독립운동을 배반하고 친일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보이나 우쓰노미야면담 이후 김규흥의 일련의 활동들을 검토하면 친일 전향이나 친일행위와는 구별되는 면모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짜 친일전향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김규흥의 가짜 친일전향 의도는 무엇일까요? 1919년 11월 초, 상하이로 돌아온 김규흥은 중한합작은행 흥국실업은행을 발기했습니다. 은행설립 자금을 우쓰노미야로부터 얻어내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김규흥이 임정 요인 회유자금으로 요청한 2만원은 2010년 기준으로 한국돈 약 4억정도입니다. 이로써 보면 김규흥의 ‘친일행위’는 은행설립 자금을 얻어내기 위한 모모하다고 할 만큼의 ‘위험한 거래’였으며 우쓰노미야 접근과 동시에 추진한 은행설립은 그가 일생동안 동립운동 방략으로 추구해 온 둔전병 양성을 위한 자금 마련책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현재로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 결론’입니다. (참고: 배경한,「독립운동과 친일의 경계-재중 독립운동가 金奎興의 宇都宮太郞 조선군사령관에의 접근 문제」,『歷史學報』제244기(2019.12)
김규흥이 요청한 자금(회유 공작비와 은행설립자금)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김규흥의 친일전향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행위는 1920년 4월 푸젠성(복건성) 장저우(漳州)에서 한국 대표 김규흥과 여운형, 중국 대표 천종밍, 러시아 대표 포타포프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모색한 것입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교두보로 장차 중국과 러시아 침략 기회를 노렸으니 한국, 중국, 러시아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대결이 불가피한 동병상련의 관계였습니다.
포타포프가 레닌에게 요청하여 시베리아의 모 지역을 조차하고 무기는 러시아가 담당하고 자금은 중국과 러시아가 부담하고 한국은 병력을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6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양성할 수 있는 병영을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중.러 3군 연합군을 중국은 북경정부 타도에 사용하고 그 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고 한.중.러가 연합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3국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의도입니다.
장저우회의 직후, 김규흥은 회의결과를 가지고 임시정부의 중심 인물 안창호를 만났습니다. 시설이 완성되면 도산선생이 군사권을 장악하고 도덕과 권위로 지휘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도산이 거절해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1921년 9월 23일, 신규식이 광저우로 남하하여 임시대총통 쑨원을 방문할 때 김규흥은 김기제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유명한 관민들과 협력하여 중한협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광명』을 발행 했습니다.

1922년 11월 4일, 흥국은행 정식 개업허가를 받고 북경에서 한중합작북경흥화실업은행을 개업했습니다. 이사장은 김규흥이었습니다. 은행설립 목적은 내몽고에 광대한 면적을 개척하여 동삼성(東三省)에 거주하고 있는 100만 동포를 이주시켜 편안히 살게하고 한편으로는 군사시설을 건설하여 둔전병을 양성하려고 했습니다.

후에 조선총독부 정보원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흥화실업은행은 10만엔의 출자금을 모으려고 계획했으나 실제로 모인 자금은 1만엔도 못되고 그마저 중국인 張甑文이 3만여엔을 가지고 잠적해서 폐업했다고 했습니다.
상하이로 쫒겨났던 쑨원이 광저우를 수복하던1923년, 그 해 3월 1일, 김규흥은 김기제(金奇濟)라는 이름으로 광저우에서 삼일한국독립선언 4주년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1924년 김규흥은 황푸군관학교 군의(軍醫) 심장(審長)이었습니다. 순더(順德)에 소재하는 우톄청(吳鐵成) 군부대에 근무하며 광저우에 와서 의열단 월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습니다.
윤봉길의거 이후, 1932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서 활동했습니다. 한국독립당 기관지『韓聲』에 「유일당만이 비로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글도 발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에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망명생활 28년간 오로지 조국 광복의 대업만을 매진했으나 김규흥의 말년은 외로왔습니다. 이질병이 있었는데 병세가 악화되고 노환마져 겹쳐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오랫동안 병상을 지키다가 1936년 8월 16일 톈진(天津)에서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해는 김규흥 지사가 세상을 떠난지 86년이 됩니다만 우리는 아직 그의 항일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