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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카드가 갑자기 동결?! 꽃가게 주인 돈세탁에 말려들어최근, 강소(江苏)의 한 꽃집 주인 모씨는 낯선 고객으로부터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할 52,000위안의 현금 꽃 선물 세트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디자인과 비용 등을 상의한 뒤 모씨한테 계좌이체를 요청하고 돈을 인출해 제작해달라고 했는데 꽃다발을 고객에게 전달한 지 한 시간 만에 모씨의 은행카드는 동결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경찰 조사 결과, 모씨가 받은 현금 꽃다발 제작에 쓰인 돈은 실제 사기 범행으로 의심되는 돈이다. 현재 사건은 진일보 수사 중이다. 최근 2년 동안 유사한 수법으로 돈세탁을 한 사례가 흔하다. 2024년 1월 16일 강서성 영신현 공안국 화천파출소 관할구역의 한 꽃집 주인 류여사가 화천파출소에 와서 신고했다. 당일 오전 한 낯선 고객으로부터 '1만 위안짜리 현금 꽃 선물세트'를 만들어 달라는 위챗 주문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는 어머니에게 드리는 깜짝 선물이라고 말했다. '미스터리 고객'은 류여사의 카드로 돈을 이체해 줄 테니 현금을 찾아 직접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류여사는 약속대로 현금을 인출하고 현금 꽃다발을 포장했고 고객이 이를 찾아갔다. 얼마 후 류여사는 자신의 은행 카드가 동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에 신고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현재 사건은 이미 해결된 상태이다. 꽃 선물세트뿐 아니라 주문제작 케이크 사건도 있었다. 2024년 1월 6일, 산시성 위린 위양구의 한 케익점 사장 조씨는 위챗 친구 신청을 받았다. 신청을 통과한 후 그는 자신과 아내의 결혼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며 계좌이체한 돈을 찾아 케이크에 현금 35,000위안을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조씨는 주문제작한 케이크를 지정된 장소로 보내 구매자에게 전달한 후 괜찮은 장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그의 은행 카드가 사기 자금 유입으로 인해 공안 기관으로부터 통제되었다. 경찰의 소개에 따르면, 이것은 신종 돈세탁 방식으로, 사기단은 빠른 돈세탁을 위해 은행 현금 인출 및 가상화폐 교환을 통해 꽃집, 제과점 등에 거액의 소비를 현금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사기범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또는 현지 인력을 끌어들여 상가 주인과 연락하고 가게 주인의 고객 서비스 심리를 노려 개별 요구를 제기한다. 그들은 사전에 이와 유사한 맞춤형 선물세트를 만들거나 거액의 주문에 기반하여 대부분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때문에 경계를 낮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기꾼은 현금화가 간편한 상품(술, 담배, 꽃 선물세트, 금 등)을 우선적으로 구매하고 가게 주인의 카드 계좌로 돈을 이체하여 카드 번호를 제공하도록 제안한다. 그 후 범죄자는 카드 번호를 전자 사기의 피해자에게 전달한다. 가게 주인이 받은 '계약금'(定金)은 실제로 다른 사건의 '장물금'이다. 이렇게 상인들은 본의 아니게 사기꾼들의 '돈세탁 하수인'이 되고 따라 계좌가 동결되고 사건과 관련된 자금까지 차감되는 중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경찰은 "대다수의 가게 주인들이 온라인 주문 및 거액의 오프라인 주문을 신중하게 접수하고, 수금 절차를 규범화하며, 출처가 알 수 없는 대금을 거절하고, 가능한 사업등록 계좌(公账)를 통해 송금하고 사기꾼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자신의 은행계좌를 임의로 제공하거나 수금 QR코드를 임의로 제공해서는 안되며 일시적인 이득으로 사기범의 돈세탁 도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영업자는 은행계좌에 이상이 있을 경우 빠른 기간 내에 은행카드 개설은행에 가서 원인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거래자료를 수집하여 경찰의 조사와 처리에 협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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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시작 행복 예감”, 2024학년도 새 학기 첫날2024학년도 3월 1일 개학 첫날. 모두가 설레는 개학 첫날이다. 본교에 재직 중인 선생님들이 첫날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놀라워하기도 했고, 당황스러움과 겸연쩍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응원하는 각종 환영 문구를 들고 사탕과 필기구 등을 나눠주며 격려해 주었다. 새로운 한 해,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학교생활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학생들도 아침 일찍 선생님들이 교문에서 반갑게 환영한다는 인사와 함께 건넨 따스함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등교할 수 있었다. 삶이 배움으로 이어지는 등교 현장의 흐뭇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자료제공: 광저우한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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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팔아 하루 저녁에 289만 위안 현금화! 계속 치솟는 금 가격최근 금 가격이 연일 상승세를 보이고 있으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3월 9일, #금가격 상승#이 인기검색어 1위에 올랐다. "이번 주는 정말 매일 아침 가격표가 바뀌고 있다. " 3월 8일, 항저우 호빈 상권(湖滨商圈)의 한 보석 가게판매자는 고객 그룹방에서 "월요일 1그램당 636위안에서 오늘은 1그램당 660위안으로 일주일에 24위안이 오르는 시세는 정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차오신문에 따르면 일부 고객은 금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3월 1일 밤새 금 회수업체를 찾아 289만 위안(금 회수가격 482위안/g)을 현금화했으며 "3월 7일 회수액은 최대 505.6위안/g에 달했으며 차액으로 따지면 상기 고객은 일주일 만에 무려 14만 위안을 적게 벌었다"고 회수업체의 담당자가 말했다. 3월 8일, 코멕스 4월 금 선물은 온스당 0.32% 상승한 2,165.20달러를 기록하여 거래일 연속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물 금은 온스당 2,170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하루만에 거의 0.5% 상승했다. 3월 이후 전 세계 금 가격은 누적 상승폭은 온스당 124달러에 달했다. 저우다푸(周大福), 차오훙지(潮宏基), 류푸 보석(六福珠宝), 저우성성(周生生), 셰루이린(谢瑞麟) 등 여러 금은방에서 발표한 금은 그램당 655위안을 돌파했다. 3월 6일, 국내 최대 금·보석 거래의 허브인 선전 수이베이(深圳水贝)시장은 금·보석 액세서리를 고르려는 고객들로 부스를 가득 메웠고 평일에도 인파가 줄지 않았다. 금 액세서리를 구매하고 있는 외지의 한 소비자는 "최근 금 가격이 비싸지만 수이베이에서 금을 사는 것은 매우 수지가 맞는다. 외지에서 광동으로 여행왔다. 주로 금과 보석을 샀고 친구를 도와 사주기도 했다"며 말했다. 그러나 일부 소비자들은 고가의 금을 관망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금악세서리 가게 점장은 "소비자들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갑자기 가격이 그렇게 뛰니까 나중에 좀 떨어질가봐 걱정한다"고 말했다. 50대 중반의 이씨는 "평소 금을 사는 횟수가 매우 적다"며 "지난번 금을 산 것은 4~5년 전 자녀가 결혼할 때"라고 말했다. 이번에 이여사가 금은방을 찾은 것도 갓 태어난 외손자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 1그램에 600위안이 넘는 금 가격에 평소 금 가격에 관심을 두지 않던 이씨는 "너무 비싼 것 같다. 아이가 결혼할 때는 200~300위안(그램당)이었다"며 깜짝 놀랐다. 금 투자는 항상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부의 증식 방법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금 가격의 엄청난 변동은 금 회수량의 가격 상승을 이끌었다. 선전의 한 금 회수점 주인은 "이번 가격 상승 후 상담량과 회수량이 크게 증가했으며, 많은 투자자들이 금 가격이 급등할 때 현금화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의 류씨는 "올해 1월 한번 해 보자는 마음으로 금 1,000그램을 구입해 투자했다"고 말했다. 요며칠 동안 금 가격이 최고치를 경신하자 그는 아침 일찍 카운터로 와서 줄을 서서 금 환매를 처리했다. 그는 지금이 적합한 시기라고 밝혔다. "매일 가격을 보고 있는데 당시 산 금은 그램당 480위안이었는데 지금은 그램당 499위안으로 5,900위안을 벌었다."며 말했다. 가격이 급등세를 벗어나자 주변의 많은 친구들은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현재 금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분석하며 일반 투자자는 신중한 태도와 이성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의보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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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기의(新軍起義)를 기획한 주즈신범재 김규흥지사는 주즈신(朱執信, 1885~1920)이 기획한 신군기의(新軍起義)에 참여했습니다. 청나라의 신식군인을 신군이라고 하는데 지식과 교양을 갖춘 신군 사병들로하여금 청나라를 타도하려는 구상했습니다. 범재 김규흥 지사도 신군기의에 참여했습니다. 먼저 신군기의를 기획한 주즈신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청나라 말엽, 일본 유학을 하는 중국 학생들은 변발을 하고 중국 전통 장포 입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즈신은 늘 변발을 늘이고 장포를 즐겨 입었지요. 친구들이 놀리기도 하고 장난삼아 변발을 자르려고 했으나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사실 주즈신은 변발과 중국 전통 복장으로 청나라 당국의 눈을 가렸습니다. 일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면서 당시 청나라가 엄금하는 쑨원의 혁명이론을 가르치고 또 직접 무기를 들고 무장투쟁도 실천한 혁명가입니다. 주즈신의 가문은 사대부 집안이었으며 그의 부친은 양광총독 장지동(张之洞,1837~1909)의 막료였으며 시사(诗词)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타서 “거문고 왕(琴王)”이라고 불리던 학자였습니다. 1895년, 주즈신이 서당교육에서 공부할 때, 청일전쟁에 패한 청정부는 일본에 은 2억량을 배상하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습니다. 1898년, 주즈신이 13세 때, 청나라 정부는 유신변법으로 나라를 구하려던 애국인 ‘6군자’를 처형했는데 그 중에 양루이(楊銳, 1857~1898)는 부친의 절친이었습니다. 그 때 광저우 최고 신식학부 광야서원(廣雅書院)에서 공부하던 주즈신은 작문시간에 청정부가 자기 백성을 진압하고 처형한 것에 대한 분개를 《读辛幼安南渡录感叹题后》라는 문장을 썼는데 문학부에 1등으로 뽑혔습니다. 1902年, 주즈신은 광저우 유신학파가 창설한 신식학교 교충학당(教忠学堂)에서 외삼촌 왕징웨이(汪精衛), 친구 후한민(胡汉民) 등과 함께 “군지사(群智社)”라는 독서서클을 만들어 헉슬리의 《언연론(天演论)》, 아담 스미스의 《원부(原富)》, 룻소의 《민약론(民约论)》등 서방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구국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1904年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 현재의 북경대학)에서 주최하는 국비 일본유학생 선발에서 1등으로 뽑혀 1905년 동경법정대학 속성 경제과에 입학했습니다. 1905년 7월, 쑨원이 동경에서 혁명에 뜻을 둔 유학생과 화교 70여명을 초청해서 중국동맹회 창립준비 회의를 하던 날이었습니다. 주즈신은 쑨원이 주장하는 혁명이론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고, 회의가 끝나고 동맹회 가입 선서식이 있었는데 주주신은 그 자리에서 가입을 했습니다. 문장력이 뛰어난 주즈신은 1906년부터 동맹회 기관지《民报》에 약 100여편의 문장을 발표했습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소개하고, 황제제도를 회복하려는 개량 유신파들의 이론을 반박하고, 민생주의(民生主义)를 고취하는 문장 등을 기고해서 청정부 타도의 당위성과 독립적인 중화공화국 건립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광저우에 돌아와서 광동고등학당과 법정대학, 방언대학 등에서 교원신분으로 청정부의 눈을 가리고, 청정부의 군대에까지 잠복해서 군인들에게 혁명사상을 강의하고 군대에서 비밀히 활동하던 혁명인들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반청투쟁 및 민군(民军) 합동 무장봉기도 계획했습니다. 1910년 2월, 주즈신이 기획했던 신군 쿠데타는 실패했습니다. 쑨원의 다음 쿠데타가 1911년 4월 27일(음력 3월 29일) 황화강 봉기였습니다. 주즈신이 긴 장포를 입고 결사대원으로 앞장을 섰습니다. 옷이 불편해서 어떻게 전쟁을 하겠느냐는 동료들에게 장포를 갈라 허리에 숨긴 수류탄 두 개를 보이면서 양광총독을 죽이겠다고 앞장섰습니다. 중화민국 2년(1913년), 신해혁명이 성공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되자 주즈신은 광동정부가 주는 유학경비 3000위안을 전부 쑨원의 혁명경비로 내놓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중화민국 4년(1915년) 쑨원이 제2차 혁명을 시도하자 《民国》잡지에 "내란의 희생은 없다", "폭민 정치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똑똑한 독재" 등의 문장을 발표하면서 위안스카이가 죽을 때 까지 문장을 써서 언론에 발표하는 방법으로 독재 통치를 공격했습니다. 중화민국 6년(1917년) 주즈신은 쑨원과 광저우에 와서 《건국방략(建国方略)》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주즈신이 희생했을 때, 쑨원은 "주즈신은 혁명중의 성인이다" 라고 애통해 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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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한 도강병원 원장 우한츠우리가 쥐창샹(旧倉巷) 골목을 탐방하는 목적은 범재 김규흥이 청나라 말기의 주소 쥐창샹 39번지(현 주소 미확인)에 있었던 도강병원(图强医院)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강병원 원장 우한츠(伍汉持, 1872-1913)는 직접 동북지역에 가서 한국독립운동기지를 세울만한 땅을 물색한 인물입니다. 본인이 직접 동북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혁명동지들에게 보고를 했더니 모두들 좋다고 호응을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연락기관으로 조선신문사를 설립해서 상호연락도 하고 민심을 고취하는 신문을 발간하기로 결정했는데 우한츠가 자신의 도강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한 것입니다. 범재는 상하이에 놀고 있는 한글인쇄기가 있다고 해서 인쇄기를 구입하려고 돈을 모금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만 돈을 동포에게 사기당하고 조선신문사 설립은 무산되었습니다. 우한츠는 어떤 사람일까요? 범재 김규흥과 우한츠는 1872년생 동갑입니다. 신문사 설립을 준비하던 1911년 두 분은 39세였습니다. 우한츠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쑨원이 의사가 되어 구국활동을 한다는데 감동을 받고 본인도 포산(佛山)에 있는 영국인 선교사가 개설한 의학당에 입학했습니다. 1899년 27세에 의학당을 졸업하고 혁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광동성 카이핑현(开平县)에 병원을 개원하고 홍콩으로도 다니며 의료활동을 하면서 폭넓게 혁명인들을 사귀었습니다. 1901년 남아프리카 모 선박회사가 선상 의사를 모집하자 우한츠는 혁명활동을 하고 해외에서 무기를 들여오려면 선상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자원했습니다. 1904년까지 선상 의사로 활동을 하다가 1906년 광저우 쥐창샹에 도강병원과 도강의학당을 개원했습니다. 도강의학당에서 공부하던 남학생이 40여명이었는데 대부분 혁명지사들이었습니다. 도강병원을 개원한 그 해, 우한츠가 법정학당(法政學堂)의 감독 샤통허(夏同龢)의 중병을 완치하고 그를 통해 법정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때 법정학당에서 공부하는 줘루(邹鲁, 1885~1954)와 천중밍(陈炯明, 1878-1933)을 만나고 혁명동지가 됩니다. 신해혁명 성공 후 우한츠는 중화민국 국회의원 신분으로 위엔스카이(袁世凱, 1859~1916) 탄핵을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1913년 8월 19일 자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 때 우한츠는 31세였습니다. 우한츠 사후 도강병원은 우한츠기념병원으로 세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중산대학부속암전문병원(中山大学附属肿瘤防治医院)이 도강병원의 전신이며 현재 광저우시내 동펑동로(东风东路)에 소재합니다. 가족들이 천진에서 우한츠의 시신을 찾아와 우한츠기념병원 옆에 무덤을 마련하고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1979년 동펑동로 도로 확장을 하려고 담당자들이 우한츠 후손과 협의해서 이전하려고 무덤을 팠는데 무덤은 이미 훼손되고 유골항아리가 없어졌습니다. 부득불 유골없는 무덤을 병원내에 마련하고 2008년 광저우문물 보호기관으로 지정했습니다. 우한츠 사후 97년이 되던 2010년 9월 8일, 광저우 중산대학부속암병원 증축공사장에서 우한츠의 유골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원래 무덤이 있던 곳에서 약 15미터 떨어진 곳인데 전문가들이 현장을 조사하고 확인한 바, 우한츠의 유골임을 확정하고 현재의 묘원을 마련했습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누군가가 우한츠 무덤이 훼손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옮겨놓은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우한츠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운 것은 100여년 전의 일입니다. 자신의 득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진심으로 한국이 독립하기를 소망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친히 동북지역을 탐사하고, 자신의 병원에 조선신문사 사무실을 제공했던 우한츠, 꽃 한 송이라도 들고 찾아가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참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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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파리강화회의 외교청원을 호평한 주즈신(朱执信)집신중학교는 주즈신(朱执信, 1885-1920)을 기념하는 학교이며 광저우에서 손꼽는 명문입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승전국 27개국이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프랑스 베르사이유에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한국 임시정부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열강 국가들로부터 독립승인을 받기 위해 독립청원서를 지참한 전권대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에 파견했습니다. 독립청원의 007 「朝鮮代表在和會之請願」, 『朱執信選集』(臺北:帕米爾書店, 1958. 10), 秋憲樹(編), 앞 책, pp. 231~237.닫기주요내용은 국제사회에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일본의 대륙침략 야심을 폭로함으로써 일본을 고립화시키고 이로 인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베르사이유회의는 한국대표단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은 것은 물론 한국문제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이 끝나 버렸습니다. 파리강화회담에 대한 커다란 실망과 좌절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한인독립운동가들로 하여금 외교 노선 자체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가져왔으며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노선간의 갈등과 대립을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민당정부의 주요 이론가이며 학자인 주즈신은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호평했습니다. 베르사이유회의에 한국임시정부가 한국이 독립국가가 되기 위하여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세계의 이목을 격동시켰으며 동방의 수모를 당하는 모든 민족에게 최대의 자극과 교훈을 주는 실로 중요한 사실로서 중국의 학자들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청원외교가 가지는 의의를 몇가지로 분류하여 열거했는데 1. 한국측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은 독립운동 과정상 일부분이며 한국인은 독립을 주장할 충분한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 2. 영국과 미국은 다같이 한국에 대해 동정적 입장이었으나 중국문제에 대한 일본측의 요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한국문제가 희생된 것이다. 3. 비록 한국은 청원을 하고도 독립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일본은 이 청원으로 말미암아 큰 손실을 받게 되었다. 주즈신은 베르사이유회의에 대한 청원외교가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궁극적인 성공은 독립운동의 방법보다는 민족적 단결과 희생정신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편 당시 임시정부 내부의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싼 파쟁에 대해서는 은근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참고:「朝鲜代表在和会之请愿」,『朱执信集』下卷, 中华书局, 1979年1月。 중국측의 이런 호의적인 반응이 있어서 한국 임시정부는 중국이 임시정부를 한국의 유일한 정통정부로 인정을 받았다고 인식하고 1921년 10월 광동에 있는 중국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孫文)과의 회담을 위해 예관 신규식을 정사(正使)로, 박찬익(朴賛翊;일명 濮純혹은 濮精一)을 부사(副使)로, 민필호(関弼鑛;일명 閔石麟)를 수행원으로 결성한 외교단을 광동으로 파견했습니다. 1920년, 주즈신은 후먼(虎門)에서 수군(水軍)과 혁명에 참여하는 민간 군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위험을 무릎쓰고 중재를 하다가 총에 맞아 희생했습니다. 당시 35세였지요. 주즈신이 희생하자 쑨원은 "주즈신은 혁명인 중의 성인이다" 라고 애통해 하며 셴례로(先烈路)에 장사지냈습니다. 1923년 쑨원이 중고등학교를 건립하여 주즈신을 기념하자고 제의하여 건립한 학교가 현재의 즈신중학(执信中学)입니다. 그의 부인 양다오이(杨道仪)가 한 동안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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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광저우 삼일한국독립선언 4주년 기념행사 - 김규흥(7)아래 보도는1923년 3월14일,「廣東의 三月 一日」이란 제목으로『독립신문』에 게재된 기사인데1923년3월1일 광저우에서 개최된 삼일독립선언 4주년 기념행사 상황입니다. 행사의 주최자는 김기제(金基濟) 등 9명인데 일본영사관 공문서에 의하면 김기제는 김복(金復)이며 범재 김규흥(金奎興,1872~1936)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廣東의 三月 一日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자동차로 선언서를 선포함. “광둥에 체류하던 동포 김기제, 정인영, 김함산 등 9명은 3월1일 독립선언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약 1개월부터 준비하여 기부금 130여원을 득하여 동지 동아주점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는데 당일 중국 내빈으로는 각 군정요인 100여명에 달하고 배정중학교 악대는 의무적으로 와서 주악하였으며 광둥에 주재하는 군에서는 금색테두리 액자를 기증하여 축의를 표하였더라.” 애국가의 합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고 주석 김기제씨의 취지 설명과 정인영씨의 선언서 낭독과 김함산씨의 기념사가 있은 후 내빈 중당지 신문 기자 및 각 학교장과 정계 인사 1명이 각각 축사를 하고 만세 삼창 후 사진촬영을 하고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축연을 해산하였으며, 식이 끝난 후, 우리 동포 9명이 각각 자동차에 분승하여 광저우 시내를 돌면서 선언서를 뿌리고 일대 선전을 했다. 장소는 광저우시 동아대주점인데 현재의 웨슈구(越秀區) 창디다마로(長堤大馬路) 320번지입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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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쉐가오(钟薛高) 아이스크림 판매가격이 최고 60위안에서 2.5위안으로 떨어지다"중쉐가오(钟薛高) 판매가격이 60위안에서 2.5위안으로 떨어졌다"가 검색어에 오르자 많은 소비자들은 "중쉐가오의 이윤이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중쉐가오는 자객(刺客)일 뿐만 아니라 고객을 속이고 있다"고 반응했다. 2018년 3월, 중쉐가오 아이스크림이 출시되었으며 "중국 아이스크림"(中雪糕)과 발음이 비슷했다. 얼마 후 중쉐가오는 66위안에 달하는 '에콰도르 핑크'(“厄瓜多尔粉钻”)아이스크림을 내놓았는데 천연적으로 희귀한 핑크 코코아(粉可可)를 원료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희귀도가 다이아몬드를 훨씬 뛰어넘고 원가만 40위안에 달해 '아이스크림계의 에르메스'로 불리웠다. 당시 아이스크림 2만개가 15시간 만에 매진되면서 종쉐고가 유명세를 탔지만 유명세를 탔다가 반짝 인기를 끌었던 스타들처럼 중쉐가오도 곧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일부 업계 관계자는 고급 아이스크림의 생산 원가는 약 3~4위안으로 원가가 40위안이라는 것과 차이가 컸다. "투루판 분지의 핵심 포도 재배 지역의 특급 홍티(红提)를 사용한다"고 발표했는데 검사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건포도사양 등급은 벌크/1급으로 표시되었다. "원재료는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고 글로벌 기관과 공동으로 연구 개발했으며 중국, 이탈리아, 미국, 일본 및 기타 글로벌 R&D 기관이 공동으로 전 세계 10대에 가까운 생산장비를 개발했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이 아니였다. 2022년 중쉐가오는 아이스크림이 '타지 않는' 파문으로 인기 검색어에 오르면서 평판이 떨어졌다. 중쉐가오는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시할 때 국조문화와 새로운 소비트렌드를 딛고 올라섰고 국풍의 기와 모양과 "육육대순"(六六大顺)의 가격은 젊은이들의 문화심리와 과시적 소비심리를 만족시켜 트래픽을 늘리는 방법(流量密码)을 성공적으로 장악했다. 지난해에는 "AI가 만든 아이스크림" 이라는 '서민' 가격의 제품을 내놓았다. 시리즈의 이름과 디자인을 거의 모두 AI가 주도했고 연구개발 과정에서도 ChatGPT, 어니봇(文心一言) 등 다수의 주류 AI 제품을 사용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춰 AI이슈를 인기를 끌으려 했지만 호감도가 높지 않았다. 판매가격이 60위안에서 최저 2.5위안(유통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제품판매가)으로 떨어졌고 중쉐가오의 높은 판매가격이 떨어진 것은 “지능세"(智商税)의 세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허울뿐인 물건들을 사기를 꺼리고 소비가 점점 이성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즉, 그들의 소비 관념은 ‘폭격’을 거듭하면서 성숙해졌고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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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셋을 출산하면 회사에서 10만 위안을 장려한다?!만약 아이를 낳으면 회사에서 돈을 준다면 낳을 의향이 생길까? “둘째 출산 시 3만 위안, 셋째 출산 시 10만 위안의 장려금을 지급한다."고 하남성(河南)의 한 회사 회장이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직원이 아이를 낳으면 기업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3월 4일, 상기 회사의 모 직원은 "2022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현재 5~6명의 적격자가 장려금을 받았다"며 말했다. 톈옌차(天眼查)에 따르면, 회사는 신삼판(新三板)에 상장했고 554명의 보험 가입 직원이 있다. 2022년에는 '베이비' 지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계획에서 2022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시행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입사 1년 이상 여직원은 재직 기간 둘째 출산 시 3만 위안, 셋때 출산 시10만 위안의 출산 장려금을 받을 수 있다. 그 중 특히 계획을 참조하여 남성 직원의 가족이 출산한 경우에도 일정 비율의 장려금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기업에서 유사한 출산 장려 정책을 내놓았는데, 정책은 주로 출산 직원에게 현금 인센티브를 제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에 앞서 상장회사 교은주식(侨银股份)은 "직원 출산 복지 향상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는데 교은주식회사는 회사의 새로 출산한 직원에게 자녀가 만 0세에서 3세 기간의 분유, 기저귀 등 일상적인 비용을 지급하고, 둘째를 출산한 직원 아이의 공립유치원 학비를 부담하며 셋째를 출산한 직원에게 1회 10만 위안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2021년 12월 30일, 인터넷 기업 콰이쇼우(快手)는 내부 공고를 통해 직원 복지를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으로는 주택 보조금 축소, 무료 식사 취소, 새로운 출산장려금 추가, 각각 1,000위안, 2,000위안, 3,000위안 등 세가지 등급이 포함된다. 2022년 1월, 농업 및 목축업 상장회사 다베이눙(大北农)은 직원이 첫째 아이 출산 시 3만 위안, 둘째 아이 출산 시 6만 위안, 셋째 아이 출산 시 9만 위안의 장려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계산하면 세 자녀 가족은 회사로부터 18만 위안의 장려금을 받을 수 있다. 출산휴가의 경우, 첫째 출산 시 국가 기준에서 1개월 , 둘째 출산 시 3개월, 셋째 출산 시 12개월이 추가된다. 2022년 3월, 광동성 기업인 젠이그룹(简一集团)은 내부 공고를 통해 세 자녀를 출산한 직원에게 인민폐 51,000위안의 장려금을 주기로 했다. 장려방안을 내놓은 이유에 대해 회사 관계자는 "한편으로는 회사가 출산을 지원하는 이념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정책에 맞춰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기업 자체도 사회의 한 기관"이라고 말했다. 우한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상중생(尚重生)이 기업의 출산 장려 정책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가 마케팅이 아니라 구현될 수 있다면, 그만큼 기업이 실력이 있고 직원들에게 진실하며 사회에 대한 특정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강소성 사회과학원 연구원의 허우멍팅(后梦婷) 부연구원은 "단기적으로 볼 때 기업이 적극적으로 출산장려정책을 내놓는 것은 경제적 압박이 있는 임신적령기 그룹에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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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가 4.9위안인 상추를 중고시장에서 300위안에 판매돼항저우일보에 따르면, 항저우의 모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슈퍼마켓 입구에 많은 젊은이들이 아침 6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소셜플랫폼(SNS)에 한 누리꾼은 "7시가 채 안돼 이미 2~300명이 줄을 섰고 고속철도를 타고 온 사람도 있는데 젊은이들이 아주머니들보다 먼저 식자재를 사러 간다"고 글을 올렸다.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산 것은 4.9위안짜리 상추로 포장에 '십개근천'(十个勤天)이라는 라벨을 붙였는데 이것은 예능 '농사짓자'(种地吧)의 파생상품이다. 프로그램의 인기는 오프라인 시장을 이끌었고, 소비자는 대부분 프로그램과 멤버의 팬이다. 어떤 슈퍼마켓은 7시 30분에 문을 열었는데 상추는 8시에 이미 매진되었다. 한 네티즌은 6시 반에 일어나서 8시까지 줄을 섰는데 "1인 1인분" 구매 제한에도 불구하고 구매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원래 가격이 4.9위안인 상추가 중고시장에서 한팩에 300위안에 판매한다는 글까지 올라왔다. 이에 대해 많은 누리꾼들은 "내 머리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아침 일찍 지나가다 보니 젊은이들이 면접을 보러 온 줄 알았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 누리꾼들은 "모두 질서 있게 줄을 서고 있어 이해할 수 있다"며 "불매해야 할 것은 암표상"이라고 말했다. "농사짓자" 파생 상품이 세기연화(世纪联华)에서 처음 판매된 것은 아니다. 작년 5월부터 상추, 민물 새우, 모샘치, 화련어, 백련 등 일련의 생선 제품이 여러 차례 판매되었는데 판매될 때마다 팬들의 구매가 쇄도하고 있다. 베이징상보에 따르면 2023년 2월 방영된 '농사짓자'라는 24시간 풀타임 192일 전방위 촬영을 통해 10명의 도시 소년들이 땅으로 가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며 시골의 농경생활을 실감하는 시골 농사 리얼리티쇼다. 예능 프로그램 '농사짓자'가 2023년 다크호스로 중국 국산 예능 시장에 뛰어들었다. 2023년엔 눈에 띄게 부진한 예능 시장에서 '농사짓자'는 일반인들이 농사만 지을 뿐 방송 전에는 시청자 기반이 전혀 없었던 예능으로 190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더우반(豆瓣) 평점 9.0으로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인기와 함께 골칫거리도 동시에 닥쳐왔다. 뉴스에 따르면, "10개근천"은 과거 방송에서도 노점상, 라이브방송 등을 통해 자신이 재배한 농작물을 팔아 자신의 노동성과를 사람들의 식탁에 올려 가치를 실현하고 사람들에게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작년 5월부터 항저우의 일부 슈퍼마켓에서는 '10개근천'에서 판매한 상추, 민물새우, 모샘치, 화련어, 백련 등 일련의 생선 제품을 여러 차례 판매한 적이 있는데, 팬들도 앞다투어 구매했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에 파는 것까지는 아니였다. 프로그램이 점점 더 인기를 끌면서 시즌2 '농사짓자'가 시작됐고, 프로그램과 참여 멤버들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부 나쁜 팬덤 풍조가 만연하여 덕질 굿즈로 야채를 비싸게 되팔아 놀라움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