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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줘루의 기고문(5) - 조선의 광복을 회고하고 축하함1945년10월25일 충칭의 중앙일보에 실린 줘루(邹鲁)의 기고문입니다. 줘루는 중산대학 초대 교장입니다. 범재 김규흥과 중국동맹회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제 침략하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망국민의 실상을 목도하고 돌아온 후 줘루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늘어나서 중산대학 교장 재임기간, 한국학생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돕기 위해 이씨 성을 가진 한인 한 명을 고용하여 한국 청년들의 중산대학 입학을 도왔다고 합니다. 범재 김규흥이 고정 수입이 없을 때 줘루가 용돈을 대어 주었습니다. 광동정부의 고관이 되어 매월 200위안을 받았으나(당시 서민 한 달 생활비 8위안)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의하면 아랫사람 월급 주고 빌린 돈 갚고 나면 어머니께 드릴 용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정수입이 있어도 돈이 부족하면 늘 줘루에게 빌렸습니다. 이 글에 의하면 줘루에게 돈을 갚으려고 하면 받지 않아 범재는 인삼밭 계약서 하나를 줘루에게 주고 매년 인삼밭 소출을 줘루에게 준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한 교수님이 확인한 바, 그 당시 한국에 김규흥에게는 인삼밭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재가 사기꾼이라고 비판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만 참고로 하시고 김규흥과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국인 줘루의 글을 읽어봅시다. 범재의 손자께서 풀어쓰신 글입니다. 조선의 광복을 회고하고 축하함 글쓴이 줘루(추노, 邹鲁,1885-1954), 1905년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907년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신해혁명 후 1913년 선거에서 국회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2차 혁명 실패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면서 1914년 중화혁명당에 가입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 집행위원에 당선되었고 서산회의에 가담했다. 1927년 국민당 통합 이후 국민정부위원, 중앙특별위원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상 전동현『두 중국의 기원』(서해역사책방 16) 서해문집p 367 참조 조선의 건국은 기자(箕子)로부터 이미 수 천 년이 된다. 조선은 일본에 대하여 많은 공로를 세웠다. 일본이 문화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시초가 조선이 전해 준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일본은 이리와 같은 야심을 가지고 끝내 조선의 큰 적이 되었다. 즉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도와준다는 미명 아래 조선이 중국과의 관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마침내 1910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는 이미 조선과는 40여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전에 내가 중국 남쪽에서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김범재(金凡齋)라는 조선인 한 사람이 참가했다. 그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먼저 중국의 혁명이 성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하러 왔다”고 했다. 김범재 동지는 아주 성실했다. 나는 비밀 자료를 많이 갖고 있었는데, 전부 그에게 보관시켰고, 많은 정보도 전부 그로 하여금 전달토록 했다. 특히 그는 조선의 옛날 옷과 관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김동지는 진영사(陳其美)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 때까지 나는 진선생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진선생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가 상세히 말해 주었고, 동시에 나에 관한 모든 것을 김동지는 진선생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와 진선생은 마음속으로 깊이 사귀었다. 무창봉기 이후 나는 광동 북벌군의 병참총관으로 선두 부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상해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에게 잠잘 방과 많은 비품이 필요했는데, 진선생은 나 대신에 사람들을 시켜 완전하게 준비를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전적으로 김범재 동지가 사전에 연락을 취해준 때문이다. 광복 이후 김동지는 광동성 정부의 고문이 되었다. 고문이 되기 전에는 그의 용돈을 내가 대주었다. 또 그는 나의 돈을 꾸어 간 적이 있는데 고문이 된 후 얼마 안되어 계약서 한 장을 들고 와서 말하기를 “나는 여러 번 당신 돈을 꾸었는데, 내가 돈을 갚으려 하면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위하여 조선에 인삼 밭 하나를 샀는데, 이 서류가 바로 인삼 밭 계약서다. 앞으로 여기서 소출된 삼이 매년 당신에게 보내어 줄 것이고, 이 삼 밭은 바로 당신의 사업이니 그리 알아 주시오”하고 말했다. 그 후 김동지는 해마다 삼을 보냈지만 그 당시 나는 조선에 가 본적이 없었다. 어쨋던 나는 조선에 삼밭을 갖고 있었고 이는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조선인과 교류가 많았고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아졌다. 민국 12년(1923년) 나는 국부 손문의 명을 받아서 국립 광동대학을 설립하고 멀리 월남, 대만 및 조선 청년의 입학생을 모집했고, 입학시험에 편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수업료 면제 대우까지도 하고, 또 의복과 책도 공급하여 조선 등의 청년들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입학하도록 하여 조선의 광복 활동 인재를 많이 양성코자 했다. 국부가 서거하고 난 이후 나는 학교를 떠났지만 조선 학생들이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들었고 귀국한 조선 학생들이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수난을 당한다는 말까지 듣고 있었다. 민국 18년(1929년) 나는 전 세계 29개국을 돌아보고 귀국한 뒤 국내의 정치 상황이 안정되지 못함에 크게 상심하여 일본으로 가서 휴양을 했다. 그 때 황염배 선생이 저술한 조선에 관한 책을 보니, 일본의 조선통치가 우수하다 평하고 그로 인하여 조선의 교육, 공업, 농업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민생은 어떻게 안정되었는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것이 아주 이상하다 생각하여 조선으로 직접 가서 실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마침 이때 중동로사건(中東路事件)이 발생하여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했고 나는 조선과 동북 3개성을 살펴보고 황염배 선생이 책에 쓴 내용이 실제와 같은지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바로 눈에 보이는 그 곳은 비인간적인 사회인지라, 이때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詩로 썼다. 집들은 납작납작하고 그 위로 넓은 하늘, 달은 휘영청 밝다. 길쌈은 별 것 없고, 사는 모습은 희미하다. 비쩍 말라, 뼈대만 남고 정신도 지쳤다. 간간이 들리노니 신음소리뿐이다. 길가에는 낡은 옷과 모자를 내다 놓고 팔아서 쓰겠다고 점포를 차렸구나. 몇 가지 중국 물건을 함게 파는 모습 내 마음이 상하여 눈에 계속 아른거린다. 부산에서 경성가는 기차를 타고 북으로 달리며 자주 창밖을 바라다보니 곳곳이 처참하고 황량하여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다시 오언(五言) 시를 읊는다. 기차는 부산을 떠나 북향하여 경성으로 달린다. 철로변의 민가 모양 내 마음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동쪽이 찌그러졌는가 하면 서쪽도 내려 앉았구나. 황량하여 가시와 잡초더미지붕은 제대로 이지 못했고 네 벽은겨우 진흙 칠을 했구나 조그마한 서너자의 집이지만 한 가족이 들어가 사누나. 쓸쓸하게 세간은 없고 이리저리 잡초만 무성하다. 마소와 같이 잠자고 닭, 오리와 같이 밥을 먹는다. 산하는 그래도 예쁘고 미더우나 산사람을 살았다 할 수 없다. 벼와 밀 이삭은 실하지만 농사짓는 이가 먹을 수가 없네. 사는 모습이 어찌 이리 참혹한가 아 망국민의 슬픔이여 이로써 황염배선생의 글과 내가 본 것이 상반됨을 알 수 있다. 황선생은 자료를 어디에서 얻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는데, 나중에 황선생의 서문에 보니, 그의 조선 방문은 일본인 초청에 의한 것이고, 그가 취재한 것은 도서관에서 얻은 것이고, 황선생이 어떤 지역을 방문하면 전부 일본인의 안내에 의했다 한다. 그래서 나는 황선생이 당시 조선의 망국인민 실상을 볼 수 없었음을 확실히 알았다. 열차가 경성에 도착하여 각지를 살펴보고 느낌도 많았고, 시도 몇 편을 썼는데 여기서 여덟 수를 기록한다. 산하는 예대로이지만 주인은 옛 주인이 아니로다. 남아 있는 궁궐은 빛에 바랬구나. 흥망을 보노라니 감개가 무궁하고 公子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네 – 경성의 저녁– 고궁에 곡식을 심다니, 자못 애처롭다. 웃음 띈 홍안은 다시 볼 수 없구나. 지난 날 가무 울림은 묻지도 마라 사슴만이 쌍을 지어 손님을 맞네 – 동물원으로 꾸민 옛날 창경궁을 방문함 – 창경이란 옛 이름을 아직도 가졌지만 짐승들과 놀이기구 어지러이 널렸구나. 구경 끝날 즈음 상심케 하는 전시물 하나. 지난 날 고국의 일을 말하고 있구나 - 창경궁의 조선의 옛 물건을 모아둔 박물관을 보고– 패배의 기분은 성안에 가득하고 나라 안은 해와 달이 다시 시작되네. 독립 향한 교두보는 찾을 길 없고 이 강물만 여전히 漢字 이름 가졌네 - 한강 다리위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 넓은 들판 군사들로 가득하다. 기병 보병 포병 공병 나누어져 있네. 삼엄한 보루는 기세등등한데 자세히 보니 한국군이 아니고 일본군이로구나. - 들판의 군병을 보고 - 또 다시 박람회 열었다더니 땅과 물에서 나는 만물 다 모았구나. 문득 지난 날 이상한 기억이 생각나네. 만주 몽고 산물이 한국과 대만에 온 것인지. - 9월에 경성에서 조선 박람회가 열렸다. 일본이 전에 동북 3성과 몽고 물산 전을 열면서 생산지 이름을 만주, 몽고 외에 조선, 대만으로 나란히 썼다. – “다 함께 배우고 일으켜 동화하자!” 달콤한 말로 어찌 세인의 공감을 받겠나. 오래된 간격을 그리 쉽게 건너려 하다니 골목마다 울리는 음악 소리 못 듣는가? - 일본 본토와 조선을 동화시키고자 일본은 조선에서 선전 활동에 열중한다. – 이완용을 매국노라 원망하는데 후영은 이등박문 찬양시를 썼구나. 지금 엉뚱한 사람을 아버지라 할 지경인데 이등을 다시 욕하고 말고 겨를이 없네 - 이번 경성 여행 시에 이완용이 이등박문에게 보낸 시를 보았다. 그 시에– 인생 백 가지 일 기약할 수 없으니 흰머리 되고 난 후 만남 또한 기이하다. 삼십년 전 그대에게 준 말 기억하오? 좋은 세월 다시 오면 만나자고요. 나는 경성 구경을 끝내고 평양으로 가서 기자릉을 참배했다. 기자릉을 보기 전에는 일본이 조선 인민을 고압적으로 다룬다는 것 만을 대단히 원망했다. 그러나 기자릉을 한번 보고 난 후에, 조선사람들이 능 주변 숲을 꾸민 기술과 그 웅장한 기세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능을 잘 보존하는구나 생각하니 불현듯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때 그 느낌을 한편의 시로 쓴다. 기자 나라에 와서 마침 기자릉을 참배하니 상나라 주나라 성하고 망함은 비교도 안 되네. 이 능도 숲이 우거져 오히려 기상 넘치고 대동강 물 휘이 돌아 구불구불 흘러간다. 모란봉 위에는 큰 나무가 푸르렀고 아름다운 산과 물 잘 보존했구나. 삼천 년 지난 지금 이곳에 내가 와서 계단을 밟고 올라 재배하니 감개무량하다. 길고 긴 역사 중에 흥망을 거듭해 왔으니 이 나라 문화도 일찍부터 열렸구나. 오늘에 와 기자를 성인이라 부르며 그 동안 몇 왕조를 이루었구나. 관리들 서로 의지하여 역사를 만들어와 삼십년 전 까지도 나라를 유지했는데 오늘 통치는 간데없고 오히려 능멸뿐이라. 소 말 노예처럼 채찍 받고 달리누나. 성인 기자의 영감 그대로 샘물은 여전히 솟아나고 기자의 기운도 바야흐로 솟아나니 원컨데 기자 샘은 마르지 말고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낼지라. 능 주위에 빽빽이 둘러 선 수 많은 나무들 이 능을 포근히 덮어 주듯이 천추만세 그치지 말고 이어지고저. 나는 조선을 둘러보고 조선인의 망국의 아픔을 목격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는 열정도 이에 따라 늘어갔다. 그 후 중화민국 20년(1931년)에 내가 다시 중산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 조선 청년의 입학을 더욱 지원했다. 그 때 이 모 선생으로 하여금 조선 학생 입학시키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한번은 의학원의 어떤 조선 학생이 일본 영사관에서 몰래 보낸 사람에게 체포되어 갔는데, 나는 직접 일본 영사관에 교섭하여 석방을 요청했지만 일본 영사관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영국 대사관에 교섭하여(일본영사관은 그 때 샤면의 영국 조계에 있었다.) 그 조선학생이 비로소 자유를 회복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하는 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 사람은 나에게 광주에 있는 조선혁명당 인사 및 운영 상황을 말하라고 요구했는데,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참나무 껍질로 몽둥이를 만들어서 나를 때렸다.(참나무 껍질로 사람을 때리면 상처는 나지 않으나 뼈가 부러지고 나아가 죽을 수도 있다.) 내가 발설하도록 고문을 하였으나 나는 아픔을 참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나는 풀려났는데, 내 몸은 이미 많이 상했다. 다행히 학장이 바로 와서 나를 구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치료가 늦었으면, 그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서남정무위원회를 맡고 있어서, 광동성에 오는 조선 당인과 그 조직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 당인과 조선 학생이 학교에 많았다. 노구교사건(1937.7.7) 이후 우리나라(중국)는 수천 년 간 볼 수 없었던 신성 항전의 깃발을 올려 대 일본 전쟁에 뛰어들었다. 조선 학생과 조선 당인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의 항일 진영에 참여하고 마침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중국의 항전이 승리하고 독립운동이 마침내 성공했다. 이에 즈음하여 당(국민당)중앙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고 조선 인민과 중국 인민 모두 즐거워한다. 나는 수 십년 동안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그 즐거움은 재론의 필요가 없이 큰 것이므로, 이에 이 글로서 축하의 뜻을 표한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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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옥천 문정리 출신 범재 김규흥(4)2013년 1월 한국에 갔다가 옥천 문정리 범재 김규흥 지사의 생가를 찾았습니다. 마침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의 눈을 푹푹 밟으며 문향헌으로 들어갔네요. 그 때는 소형 카메라를 들고 다녔는데 설정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사진을 찍어 이미지 질이 안 좋은데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김규흥의 증조부는 세도정치를 피해 충복 옥천군 교동으로 낙향한 조선시대 세가였습니다. 당시 기와 85간, 초가 12간을 가진 거부였으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할 때 시 무리한 과세를 요구해 집안이 몰락하던 때에 범재공은 청풍 김씨 23세손으로 1872년 6월 13일 옥천읍 문정리 문향헌에서 출생했습니다. 친척 어른으로부터 한학을 익히고 1901년부터 상경하여 민영환(閔泳煥, 1861-1905)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국가 근대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종교의숙에서 교원을 하면서 교육으로 자강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목화밭에 진명(후에 창명으로 개명)학교를 설립했는데 현재 옥천 중향초등학교의 전신입니다. 현 죽향학교에 남아 있는 현존하는 건물입니다. 김규흥의 고택 문향헌은 1920년대 중국에서 돈이 급해 처분하여 현재는 춘추민속관 고택체험 민박지가 되었습니다. 삐뚤삐뚤한 손글씨 문패가 걸려 있네요. 민영환과 여러 차례 고종황제를 알현했는데 고종황제는 김규흥에게 중국 아청은행에 예치된 자신의 비자금을 찾아서 무관학교를 설립하라는 밀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길도 떠나기 전에 누설되어 가택연금을 당하다가 1908년 초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름을 김복(金復)으로 바꾸고 광저우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기를 ‘复’의 본명은 김규흥(金奎兴)이니 이 점 양해하시고 제(弟)의 성명 및 진행사항은 절대로 신보(新报)나 잡보(杂报)에 등재하지 마시고 비밀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회신은 광동성 旧仓巷 图强医院 朝报事务所로 보내주시기 바라며……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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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상품이 선전이 상하이보다 50% 비싼 것으로 드러나!코스트코(Costco) 선전 매장이 문을 연 지 열흘이 지났지만 열기는 여전하다. 최근 어떤 소비자들은 일부 같은 종류의 상품에 대해 선전 매장의 가격이 상하이, 소주 및 기타 매장보다 비싸고 할인 가격이 다른 매장의 원래 가격과 같다는 글을 올렸다. 그 중 코스트코 '왕훙'(网红) 제품인 베이글(贝果), 쇠고기롤(牛肉卷) 등이 포함된다. 베이글은 종종 코스트코의 필수 구매 리스트에 포함되며 심지어 한때 품절되기도 했다. 1월 22일, 룽화구에 위치한 코스트코 선전 매장에서 베이글은 한 봉지에 6개 포장이고 한 번에 두 봉지씩 구매해야 하며 오리지널 맛, 참깨 맛, 베리 맛, 계피 맛 4가지 맛이 있으며 판매가격은 54.9위안이다. 그러나 같은 베이글은 상하이에서 한 봉지에 34.9위안에 판매되고 있으며 할인 시 약 30위안에 판매된다. 또한 코스트코 선전 매장의 소고기롤은 개당 28.9위안, 상하이, 소주 등지에서는 개당 19.9위안에 팔려 가격 차이는 거의 10위안이다. 베이글, 소고기롤과 같이 표준화 수준이 높은 제품이 매장마다 가격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선전 매장의 할인율이 더 약한 걸까? 1월 22일, 코스트코 측은 "선전 매장에서 파는 베이글은 다른 매장과 다르며 다른 품목에 속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공예 제품을 적용한 베이글은 선전 매장에서 처음 판매되었으며 향후 점차 각 매장으로 보급될 것이다. 그리고 선전 매장의 소고기롤은 다른 매장보다 고기 양이 50퍼센트 더 많았으며 선전 매장에서 "초대형 소고기롤"을 판매하였다. 코스트코에서 4km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유명 창고 슈퍼마켓인 샘스클럽(山姆) 룽화점이 있다. 2017년에 개업한 이 매장은 샘스클럽이 선전에 있는 세번째 매장이다. 선전은 샘스클럽이 중국 시장에 진출한 첫번째 매장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1996년 샘스클럽은 선전의 부자 동네인 샹미호(香蜜湖) 일대에 아시아 최초로 매장을 열었다. 그런데 코스트코의 중국 남부 첫 매장 역시 선전에 터를 잡았다. 창고형 회원상점은 매년 수백 위안의 회원비가 필요하고, 게다가 국내의 자동차 보유율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샘스클럽은 중국에 들어온 후 오랜 기간을 거쳐 한때 폐점 직전까지 갔다. 2016년 이후 샘스클럽은 2016년부터 2023년까지 39개의 매장을 열었다. 2023년 말 현재 샘스클럽은 중국 시장에 47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다. 샘스클럽은 2023년에만 상하이, 선전, 푸저우, 우한 등지에 5개의 매장을 열었다. 지난해 샘스클럽 차이나는 약 20개의 매장이 준비 중이며 2024년에는 6~7개의 신규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이에 비해 중국 시장에서 코스트코의 확장 전략은 더 보수적이다. 2024년 1월 초 현재 상해, 닝보, 항저우, 선전에 있는 6개의 매장만 오픈했다. 샘스클럽이 온라인 소매 및 전국 배송을 할 때 코스트코는 여전히 오프라인에서만 판매한다. 월마트는 2021년 11월에 샘스클럽의 중국 유료 회원이 400만 명을 넘어섰고 샘스클럽의 유료 회원이 500만 명을 넘어설 것을 보수적으로 추산하고 있다. 260위안의 회비로 계산하면 매년 샘스클럽이 중국에서 버는 회원비만 13억 위안이 된다. 흥미롭게도 1월 4일, 코스트코 차이나에 따르면, 코스트코 선전 매장은 이미 9만 명 이상이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 중 약 10%가 홍콩계 회원으로 또한 샘스클럽 선전 매장의 중요한 고객층이다. 199위안의 오픈기념 회원가입비만 개업 전에 약 1,800만 위안을 유치했다. 앞으로 창고형 회원제 슈퍼마켓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샘스클럽과 허마셴셩(盒马鲜生)은 “싸움”이 한창이고 영휘슈퍼마켓(永辉超市), 푸디(fudi), 메트로(麦德龙) 등도 배치를 가속화하고 있다. 코스트코가 나중에 앞설 수 있을지는 여전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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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대한인국민회 문양목 회장이 김복에게 보낸 편지(3)이편지는 미국 대한인국민회의 문양목회장이 광저우에서 김복(김규흥)이 보낸 편지를 받고 쓴 회신입니다. 김복은 광저우에 조선신문사를 설립하려고 하다가 인쇄기 구입할 돈을 사기당해서 한글 활자가 있는 인쇄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의 상황을 어떠했을까요? 문양목회장이 김복에게 보낸 편지(1911.05.25) 오늘 조국의 상황은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둥지(터전)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 뒤집혀진 현상인 바 마치 계란이 눌리어져 깨어지기 직전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조국의 비참한 현실은 원수 왜적의 교활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큰 홍수가 밀려와 봇물이 터지고 둑을 흘러 넘쳐 넓고 멀리 퍼진 것처럼 중국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동포들은 슬프고 참혹한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잎사귀들이 벌레에 먹혀 힘없이 떨어져 분분히 날려 흩어진 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호, 이러한 시기에서의 진정한 지사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온갖 정성으로 공을 세우는 영웅이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이 어려운 때를 인내하며 더욱 내핍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좋은 효과를 나타내기에 알맞은 입지를 만들고 그 때의 시세를 고루고루 관찰하여 정확한 판단아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략으로는 군사와 외교 이 두가지 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의 정략이 짜임새 있게 진행된다면 이는 실로 신묘한 계책입니다. 이를 빗대어 말씀드리면, 군사상의 문제는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감히 내지(朝鮮)에서 살겠다는 희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버려야 하고 반드시 중국에 적(籍)을 두고 서로 돕는 힘을 갖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외교상의 관계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는 교유할 수 없을 것이며 반드시 중국과 연면(連綿)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국 사람에 있어서 중국의 토지는 곧 이와 입술과 같은 관계로서 서로가 의지하는 종족이며 한편, 뼈와 살이 서로 친근해지는 까닭이 바로 군사인 것이며 외교인 것입니다. 중국과 군사와 외교 양 방면을 추진하는 것은 실로 긴요하고 절실하게 착수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중국에서 이러한 일을 착수할 수 없게 된다면 오늘날 패망한 한국의 장래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조국의 독립 쟁취라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중국의 운명이 아직 왕성하지 못한 이때에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실현 방법의 하나는 스스로 본회(國民會)를 성립한 후에 뜻을 기울여 하나하나의 모든 행동이나 동정에 있어서 관연 중국의 뜻있는 인사들과 더불어 친교를 맺어 대의로서 긴 안목의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도모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형세가 어렵고 힘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 시도하는 바가 현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주저앉지 말고 반드시 그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데까지 힘써야 할 것입니다. 청(請)해 오신 것에 대하여 대략 진술하고자 합니다. 미국에 건너온 한인들의 실상을 말하면 그 가부(可否)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주 전역에 산재한 동포의 수는 모두 칠백여인으로 헤아려집니다. 그들이 미국에 건너온 초기에는 가지고 온 돈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기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들은 빈손으로 상륙하여 서둘러서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한 곳이 노동계인데, 자기 한 몸 생활하는데도 몹시 힘들고 곤란한데다 또 하나의 상황은 내지(本國)에 살고 있는 부모 형제 처자들, 딸린 식구들이 살아가는 실정은 춥고 배고픔의 연속이었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나가고자 기를 쓰는 이들이 백명 중 아흔아홉명은 그러하다고 헤아려 집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 누구든 목석이 아니고서야 자기의 친속들이 추위에 얼어붙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찌 구제하지 않고 방관만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실제로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없는지라, 이에 동포들은 서로가 힘을 합치고 온 힘을 다하여 밤늦게까지 꾸준하고도 부지런하게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각기 의무를 다하면서도 서로 논(論)하는 것은 간(肝)과 뇌(腦)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은 애국을 하고자 하는 성향(性向)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포들은 본회 기관보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유지를 위한 제반 경비의 지출과 용도를 알아채고 성심껏 후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피 같은 돈으로 근근이 유지는 하고 있으나 그날그날의 경비를 맞추는데 급급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별다른 여력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신한민보 역시 필히 구입해야 할 기계도 아직 못 들여오고 있는 형편이니 어떤 행운이 있어 본 기관보를 계속 운영하는 소임을 다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 속에 적혀 있는 일반회원(발기인을 뜻함, 구봉갑. 진형명, 추노 등)들은 멀지 않은 앞날에 북치는 소리 둥둥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는 분들이며 지조(志操)가 고상하며 세속을 초탈한 기상(氣像)을 지니고 있는 대단히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세력은 다 같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어 뜻하는 바를 성취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듯합니다. 오호라! 우리들의 처지가 어찌하여 이와 같이 어려움이 심하단 말입니까. 조국의 미래에 빛을 던져주는 희망을 발견했지만, 큰 기대를 갖고 요청한 일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에 긴 한 숨만 나올 뿐이며 가슴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무엇으로든 채워 넣어야 할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이 안타까움에 덧붙여 말씀드리기가 민망하여 이만 줄이옵니다. 이에 바라건대 오로지 좋은 일만 있기를 축원합니다. 의사(義士)님의 건강이 크게 편안하시어 나라를 소종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시옵소서, 아아! 그 일들을 하시는데 하늘의 돌보심이 있어 탈이 없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에 대업을 시행할 수 있도록 좋은 일만 정착되기를 빌고 또 바라옵니다. 檀聖紀元 四千二百四十四年(檀紀 4244년) 五月 二十五日 (5월25일) 대한인국민회북미총회장 문양목(文讓穆) 총무 조원두(趙元斗) 서기 김형필(金亨弼) 등 김복 대인 각하(金復 大人 閣下)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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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범재께서 미주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 (2-3)弟는 即时로 그 서한을 여러분께 보이니 모두가 기꺼히, 各各 出资하여 数日 동안에 资金이 모였습니다. 이리 하여 제반 설비가 완비되고(*새 机器 값은 벌써 尹에게 보냈고) 机器의 到着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此日彼日 미루어진 것이 数个月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불쑥 回信이 왔는데 전하는 말이 前日 尹이 担当한 机器에 关한 것이었고 말인 即 趙锺缙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돈을 훔칠 계획을 꾸미었고 지금은 이미 그 사기친 돈을 가지고 멀리 달아났다고 하며 尹 역시 어느 곳에 있는지 行方을 모른다......라고 云云합니다. 그러니 弟는 사기를 당한 바가 되었으며 그것과 더부러 이미 消费한 돈을 合하면 机器한틀값을 훨씬 넘겼읍니다. 그런데 机器는 끝내 오지 않으니 推进하던 重要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人情(心)이 어찌 이와 같이 열악하단 말 입니까? 弟 한 사람이 信用을 잃는 것은 同情(矜恤)할봐 못 된다 치더라도 이번 기회가 진실로 아깝고 쓰라려서 重言复言(缕述)아뢰오니 엎드려 诸兄께 바라건데 会议를 열어서 充分히 议论하신 后 그쪽 会馆에서 두 세사람의 要员을 选出하여 至急히 广东으로 派遣하여 이 事业을 더부러 协助하고 推进했으면 합니다. 一部 机器 및 活字粒 等을 마련하는 것은 或 의연금이나 或 共同出资로 하여 美国으로 부터 购买해 带同해 오신다면 目前에 合头된 아주 어려운 局面에 다시 없는 크나큰 幸福이요, 만약에 이번 기회를 잃는다면 아주 아주 餘望이 없읍니다. 统亮(弟)은 눈물이 다 하고 목소리 마저 갈아 앉아 글월이 꼼꼼하게 格式도 차리지 못 하였을 뿐더러 원만하지 못한점 널리 용서하시 옵소서. 孔圣2462(1911년) 3월 7일 金复谨上 거듭 엿줍거니와 "复"의 本命은 奎兴이니 이점 谅解하시고 弟의 姓名 및 进行事项은 绝对로 新报나 雜报에 登载하지 마시고 秘密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回信은 广东省 旧仓巷 图强医院 朝报事务所로 보내 주시기 바라며 여러분이 会议하신 结果에 希望있는 단서가 있으시면 우선 전보로 알려 주시기를 간절히 仰望 하나이다. 여러 同志의 劳心에 큰 慰安이 되었기에…… 마지막 한 장 发起人 名单은 省略합니다. 여기에 적힌 분들은(发起人) 하나 같이 모두 志士兼势力 있는 분들이며 그 外에 여러분 역시 请心으로 얻기 어려운 분들입니다. 이를 밝히오니 헤아려 주시옵소서. *统亮은 벼슬의 一种인듯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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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범재께서 미주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 (2-2)하지만 现今의 중국은 日本과 러시아의 风潮가 침투하여 나라 전체를 크게 울려 흐들거리게 하므로(오히려) 국민의 애국심(民气)이 四方으로 퍼져 나가고 있으니, 이야말로 光复成就를 为한 아주 좋은 때(大可为之秋) 일 것입니다. 广东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开化한 땅 일뿐 아니라 倭贼을 증오하고 원망하는 '골'이 아주 깊게 파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 까닭에 弟는 수년동안 广东에서 寄居하였고 그러는 동안 여러 志士의 돌봄으로 자못 彼此에 知己之间이 되었으며, 지난 겨울에는(그들 志士들과) 会议를 하여 하나의 新闻社를 组织하고 新报를 发刊하기로 하여 한국과 중국의 人心을 鼓吹사키는 한편 상호 연락기관으로 할 것을 决议하였고 그 后 다시 하나의 开垦公司를 创立하고 널리 资金을 모집하여 만주에 떠도는 한국 동포를 满洲 또는 蒙古 等 넓은 땅에 各各 안전하게 定着하도록 하였는데, 名目은 荒忙地를 开垦하는 것으로 하였으나 이는 倭敌의 의심을 피하자는 것이고 实际로는 屯兵制度를 施行해서 기회가 오는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대충 짐작컨대 倭놈들의 조급한 妄动은 몇해 않가서 중국 또는 미국과의 战争을 발발하게 할 것입니다. 이때에 중국과 한국의 民兵이 크게 联合하여 极히 짧은 时间에 奋起하여(不意에 一击을 加한다면) 우리 韩国은 光复을 찾을수 있을 것이고 中国은 自己防御를 할 수 있을 것이니 그 成果가 一击에(两得이 아니라) 그 外중에도 더 좋은 일이 많을 것입니다. 좋은 计策을 准备함에 있어 이 보다 더 완벽하고 나은것이 없을 것이며, 이는 特히 弟 한사람의 意见이 아니라, 이곳 여러 同志들과 熟议하고 妥协하여 决定 한것입니다. 现在 이미 이곳의 同志中 오한지(吴汉持)君이 东三省에 가서 한국인의 情况과 形势를 调查하여(환영을 받었기에) 이 新闻发行 事业만은 꼭 实行해야 할 첫 단계에 있는 것이거늘...... 事情의 어려움은 있으나 节义로서 주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여러 兄弟들이 이 역만리에 寄寓하면서 또 온갖 고통을 끈기 있게 견디면서 오로지 우리가 所望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도모하고 해 내야 할 일이며, 이 "일" 外에는 다른 일이 있지 않을것 입니다. 小弟의 目的은 后线에서 光复事业에 스스로 호응하여 반드시 이런 기회를 잃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당초 新闻事业을 发起했을 때 그 자금은 광동에 있는 여러 중국인사가 所擔하고 그 机器 등은 내가 스스로 부담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前年에 上海의 X东报馆에 美洲会馆에서 보내온 机器가 있는데 이것이 现在 놀고 있다고 하기에 弟는 李锡永, 李殷翊 두 사람을 上海로 보내어 찾게 하였더니, 그 回信에 그 物件은 现在 尹氏 姓을 가진 사람이 갖고 尹의 行方은 北京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내어 그 물건을 요청한 즉 尹의 말이 美国에서 온 物件은 活字体의 날알만 数万个인데 그나마 문드러저서 使用할수 없는 것이니, 别途로 새 机器한틀만 购入하신다면 自顾해서 义理로 协助하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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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범재께서 미주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 (2-1)From Conton China 보내는 이 : 清国广东省城小北门内十八洞二十七号 받는 이 : 米国桑港大韩人总国民会馆 僉兄閣下 위 사진은 100여년 전 김복(범재 김규흥)이 광저우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하는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편지봉투입니다. 미국에 계시는 범재 김규흥의 손자께서 봉투 사진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비록 미국에 소재하는 대한인국민회에 보낸 글이나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사료인지라 전문을 올립니다. 편지글은 김규흥께서 쓰신 한문 문장을 손자되시는 분께서 읽기 쉽게 풀어 주셨습니다. 美洲 地域에 留하고 계신 大韩民国会 여러 兄弟阁下: 오호 时局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편안하게 돌아갈 곳이 어디 있으리가. 4천년 역사의 우리 나라와 우리 집안은 어쩌다가 원수같은 오랑캐의 毒手에 걸려들어 잔인하게 부서져야만 합니가. 2천만 단군의 자손과 기자의 후예가 추악한 오랑캐의 도마 위에서 왜 난도질을 당하며 점차로 소멸되어 가야만 합니까. 지금 이러한 것은 세계의 인종(各民族)들이 서로 자기가 우위에 서려고 다툼질을 하는것이 끊임엇이 高潮되면서 그들이 저마다 豪气를 부리고 있을 지금. 우리들은 어쩌다가 오금마저 펴지 못하는 노예의 地位에 떨어져서 남들의 비난과 웃음거리가 되어 가만히 앉아서(素手无策) 처량하고 메마른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异域江山 이어야 합니까. 무릇 기회를 만나고도 나아가지 않음은 지혜있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 할 바이며 강폭한 도적이 무서워서 뒤로 물러서는것은 壮夫로서 取할 바가 아니옵고 기우러진 国运을 부추겨서 바로 잡으라는 것은 危险으로부터 安定시키는 것이고 비상시에 세상을 救济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험난 하기에 어려워하고 꺼려 하는 곳 일지라도 거기에 나아가 危险한 国境을 벗어나게 하는데 달렸거늘 한편에서는 편안히 앉아 자기 분수에 넘치는 행동으로 섬 오랑캐 놈 들에게 나라를 훔쳐서 팔아 넘기기에 이르렀으니 人伦道德 등을 自负하는 우리 韩民族 모두의 人情은 너무 놀라서 어처구니 없이 부르르 떨었고 이에 하도 기가 막혀 분통을 터트리고 맞서 일어나 길거리에서 마저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는 사람 그 누구 이리요? 그 때의 비참한 광경은 하늘도 해도 암담하였으나 교활한 그 오랑캐는 우리 나라를 병탄(并吞) <*남의 재물이나 영토를 한데 합해서 제것으로 만들어 버림>하기 위해서 이미 계획을 세워 치밀 하게 배치하고, 악랄한 수단에 또 可酷한 행위 마저 뒤 따르니 赤手空拳으로는 저들 강도의 枪과 铳炮 앞에 속수무책으로 물려 뜯기고 있읍니다. 아~아! 원통하기 그지 없읍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热血의 志士들이 이를 악물고 소리(분통)를 삼키면서 복수하려는 마음이 날로 팽창해가고 밖으로는 忠义의 烈士들이 분하고 성이 나서 주먹을 불끈 쥐고 조국광복을 도모 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 합니다. 한편 지금 정세는 일본이 러시아와 연계하여 중국을 쪼개 먹을 일에 先锋을 서고 있읍니다. 그런데 중국은 워낙 큰 나라요 人物도 많고 土地도 广大해서 세계 열강이 번번히 찍접대고 있지만 쉽게 넘 보지는 못할거 입니다. 다만 病弊가 되는 것은 王权의 专制가 하도 오래 쌓여서 잠 자는 사자라는 이름이 붙여 졌읍니다. 이 잠 자는 사자가 깰려고 하자 섬 나라의 돼먹지 많은 씨알머리는 그 사자가 잠에서 깨지 않았을 때의 "틈"을 노려서 표독한 음모를 재 빠르게 꾸며내어 앞 뒤를 가리지 않고 사납게 처 부수어 손상을 입힘으로 제 2의 한국처럼 만들려고 기약하고 있으니---바야흐로 중국의 人情(心)은 들끓고 있으며 한 하늘 아래서는 더부러 살수 없는 원수처럼 여기고 그 분개함이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이 우리에게는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로 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弟는 평범한 사람으로 변변치는 않으나 쪽바리 鸟兽의 무리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大义만은 자못 알고 있습니다. 但 지혜와 术策이 천박 하고 못나서(浅短) 어느 곳에서나 실패하여 国内에 있지 못하고 멀리 중국으로 망명하여 기구한 고생을 겪고 있습니다. 다만 제 어리석은 意见을 말씀드리면 지금의 이 世界는 저마다 한결같이 自己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다투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돌이켜 볼때 地球上 五大洲중 우리 한국과 이해관계가 一致하는 곳이 중국만한 나라가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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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챗 계좌이체와 위챗 홍바오, 어느 것을 반환해야 할까?일상생활에서 친구 사이에 위챗을 통해 홍바오를 보내거나 계좌이체를 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측이 분쟁이 생겼다면 계좌이체와 홍바오로 인한 경제적 거래는 같은 성질일까? 최근 베이징시 하이뎬구 인민법원(北京市海淀区人民法院)은 대출(借款) 분쟁사건을 종결하고 위챗 홍바오(微信红包)와 계좌이체(微信转账)의 성질이 다르며 홍바오는 증여(赠与)에 속하고 계좌이체는 대출(借款)에 속한다고 판결했으며, 이에 따라 피고 저우씨는 원고 류여사에게 빌린 12,900위안을 갚아야 하는 판결을 받았다. 류여사는 2019년에 위챗을 통해 저우 씨를 알게 됐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우 씨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여러 차례 그녀에게 돈을 빌렸다. 2020년부터 2021년까지 류여사는 은행 계좌이체, 위챗 홍바오 등 방식을 통해 총 15,669위안을 저우씨에게 송금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돈을 갚을 것을 독촉했지만 모두 결과가 없었다. 이에 대해 저우 씨는 사건에 연루된 돈은 차용금이 아니라 증여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류여사가 위챗 홍바오, 위챗 계좌이체 두 가지 방식으로 저우씨에게 자금을 제공했는데 위챗 홍바오 자체에 증여의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이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과 함께 류여사가 저우씨에게 생활지원 차원에서 보낸 위챗 홍바오는 총 2,769위안으로 류여사의 증여행위에 해당해 저우씨가 갚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류여사가 위챗 계좌이체를 통해 저우씨에게 지불한 12,900위안에 대해 저우씨는 증여라고 주장하지만, 류여사가 이와 관련하여 증여의사를 밝혔다는 증거가 없으며 저우씨가 류여사에게 대출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류여사가 위챗 계좌이체를 통해 지불한 금액은 그가 저우씨에게 제공한 차용금(借款)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저우씨는 이를 상환해야 한다. 이 사건에 대해 법원은이같이 판결했다. "위챗 계좌이체와 위챗 홍바오, 둘 다 위챗 소프트웨어를(微信软件)를 통해 결제되지만 위챗 소프트웨어의 다른 기능과 속성에서 두 결제 특성을 구별하고 결정해야 한다." 법원은 "위챗앱은 소셜 도구로서 일상적인 의사소통 기능 외에도 소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위챗 홍바오는 위챗앱의 소셜 기능을 전형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제시했다. 위챗 홍바오의 금액 상한선은 200위안으로 "홍바오"라는 이름은 중국의 민간풍습에 따라 “홍바오"를 지급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발적인 증여를 의미하며, 반환할 필요가 없다. 위챗 계좌이체는 홍바오와 달리 "증여"의 의미가 없으며 위챗 앱에서 설정한 결제기능일 뿐 사회 주체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결제 방법 중 하나이다. 이 사건에서 원고는 위챗 계좌이체로 민간 대차관계(借贷关系) 성립을 주장하고 있으며, 피고가 자금의 성격을 증여라고 할 경우 해당 증거를 제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증거로 입증할 수 없는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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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범재 김규흥이 조선신문사를 설립하려던 광저우 웨슈구(越秀区) 주챵샹(旧仓巷)(1)벌써 10여년 전, 2012년 7월이었습니다. 옥천신문사 사장님과 연구가 몇 명이 광복절 67주년 특집으로 옥천의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을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으러 광저우에 왔습니다. 급하게 마련된 점심시간에 제가 동석을 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김규흥께서 추노(邹鲁), 호한민(胡汉民), 진형명(陈炯明), 오한지(吴汉持)등과 신해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손중산의 혁명동지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때여서 추노, 호한민, 진형명, 오한지는 알지만 우리나라의 범재 김규흥은 첨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방문단이 남긴 자료 중에 자료중에 김규흥이 미국한인회에 보낸편지가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에 의하면 김규흥 가명은 김복이며, 광저우 주창샹에 있는 도강병원(图强医院)에 조선신문사(朝报事务所)를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중국지사들이 장소와 경비를 제공하고 범재는 한글 인쇄기만 구입하는 조건이었지요. 상하이에 인쇄기가 있다고 해서 돈을 마련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그만 동포한테 사기를 당해 돈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중국인들과 이미 약속이 된일인지라 낭패할 수 없으니 대한국민회가 인쇄구입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글이었습니다. 이 자료를 접하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퇴근 후 도강병원이 있었다는 주챵상을 찾았습니다. 캄캄한 밤, 휑한 골목, 여기 어디선가 있었을 도강병원, 신문사 설립 장소와 경비를 확보하고 인쇄기 도착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돈을 사기당했습니다.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범재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다하고 목소리마져 가라앉아 편지를 제대로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범재가 편지를 쓴 날은 1911년 3월 7일입니다. 저의 김규흥에 대한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옥천신문사 이안재 사장은 이렇게 특집기사를 썼습니다. “우리고장 출신 독립운동가로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김규흥 선생이 있습니다. 선생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규흥 선생은 일제 강점기 나라를 되찾겠다고 나선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초기 독립운동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지원하고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던 분입니다. 아직 제도권 역사학계에서의 연구가 초기단계이기에 그 전무를 알 수 없는 김규흥 선생의 일대기를 그 후손과 연구가, 김규흥선생이 활동했던 중국 현지를 돌며 자료를 확보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바로잡는데 이번 기획취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생애 전체를 알 수 없는 김규흥 선생의 일대기를 다시 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합니다. 아직 기성 역사학계의 본격적인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하긴 하지만 초기 독립운동을 이끌고,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독립운동가들을 중국 혁명세력과 연결하고 지원한 분이라는 데에는 역사학계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김규흥 선생이 풍찬노숙하며 거인처럼 누볐던 중국대륙의 흔적을 더듬어 하나하나 조각을 맞추는 작업은 이제 시작입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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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만 했을 뿐인데 내 명의로 된 회사가 몇 개 생겼다22세의 이학(李学)은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23년 7월 닝샤에서 대학에 다니던 그는 얼굴 확인이 필요한 '아르바이트'로 개인정보가 유출돼 엉뚱하게 쓰촨의 여러 회사의 법인대표 임원이 됐다. 그는 그해 9월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가 자격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시험에 응시하지 못했다. 올해 1월, 이학은 자신의 사연을 SNS에 올렸고 비슷한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을 찾아냈다. "사칭 피해자"라는 단톡방에는 400명 가까운 피해자들이 신원이 도용당해 배경 조사에 통과하지 못하여 공무원 시험, 편제 시험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현재, 이학은 이미 관련 상황을 쓰촨 현지의 시장감독관리부서에반영했으며 추가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당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같은 도시의 한 네티즌은 이학에게 "한 모바일 앱이 막 출시되어 '신규 사용자 유치'(拉新)와 '사람을 끌어오는'(引流)단계에 있기 때문에 앱을 사용하는 인원이 필요하다. 가입 후 앱에서의 활동도에 따라 최대 2,000위안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보수의 유혹에 이학은 친구 몇 명을 데리고 약속된 장소로 갔다. 상대방은 휴대전화에 '새 앱'을 다운로드하고 신분증을 준비해 앱의 안내에 따라 안면인식을 하고 실명인증을 완료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상대방이 '천부통판'(天府通办)이라는 모바일 앱을 다운해라고 요구했는데, 실명인증, 얼굴인식 등 본인이 조작해야 하는 절차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 과정을 "그들이 조작했다"고 회상했다. 이 과정에서 이학은 실명인증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으나 "안정적"이라며 "너 같은 대학생들이 많이 와서 몇 만위안을 벌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절차를 마친 뒤 상대방은 "시스템 업그레이드 때문에 당분간 보수를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그들의 핸드폰에서 "천부통판"을 삭제했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천부통판" 모바일은 쓰촨성 "일망통판" 모바일의 총 포털이며, 성(省)의 기본 지원 시스템에 의존하여 자연인과 법인을 위한 원스톱(一站式) 온라인 통합정부 서비스 플랫폼의 통합 문제관리 등 기본 채널을 제공한다. "천부통판"의 모바일 지침에 따라 "기업개설" 기능을 클릭하고 모든 절차 요구에 따라 명칭, 세무, 공안 및 기타 사항 등록을 완료하고 투자자, 법인대표, 위탁대리인 등 관련 인원이 안면인식 및 전자서명을 진행하면 이 신청이 심사과정에 들어갈 수있으며 통과되면 사업자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상기 절차에 따라 쓰촨에서 사업자등록증을 신청하는 절차는 본인이 현장에 오지 않아도 되며 전 과정을 모바일에서 완성할 수 있다. 일부 해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전체 세트가 100U(가상화폐로 환산하면 약 700위안이다.)"라며 안면인식 관련 데이터를 공개적으로 판매하는 상인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 판매자가 보내온 캡처 사진에서 그들이 가리키는 "전체 세트"는 신분증 앞뒷면 사진뿐만 아니라 본인이 신분증을 들고 있는 사진, 심지어 안면인식 생체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얼굴 돌리기"하고 "오른쪽으로 얼굴 돌리기" 등 짧은 동영상까지 포함된다. 상하이정책변호사사무소의 쑤청(苏程) 변호사는 만약 당사자가 개인정보가 범죄자에 의해 도용되거나 회사의 주주 또는 고위 관리자(이사, 감사, 법인대표)로 부정하게 등록한 것을 발견할 경우 상황에 따라 다른 권리 보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관할 시장감독관리국에 사칭등록(비안) 취소 신청서를 제출하고 조사를 신청하고 관련 등록을 취소한다. 또는 인민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해당 회사가 사칭신분의 공상등기를 취소할 것을 법원에 청구한다. 또는 공안기관에 신고하고, 공안기관에 도용, 사칭 혐의가 있는 범죄자에 대한 행정(치안) 처벌을 요청한다. 쑤청은 “안면인식 정보”가 “사칭”에 대한 유일한 기준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시장감독관리부서는 서류자료, 현장검증, 감정결론 등을 통해 사칭 여부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