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中 여러 지역 관광지 입장 무료 혹은 할인, 광서, 안후이, 산동, 사천 등 성(省) 포함최근 동북 사람들이 남방 관광객들에 대한 따뜻한 접대에보답하기 위해 광시성 여러 관광지에서는 동북지역 관광객을 위한 무료입장 등 우대 행사를 진행한다고 발표하였다. 바이써(百色) 1월 8일부터 2월 29일까지 바이써시의 모든 A급 관광지(51개)는 동북 3성 관광객에게 입장료 우대 정책을 시행한다. 충쭤시(崇左) 1월 8일부터 2월 8일까지 동북 3성 관광객은 유효 신분증을 가지고 충쭤시 모든 A급 관광지의 첫번째 입장권 전액 면제 정책을 누릴 수 있다. 허저우(贺州) 1월 5일부터 2월 9일까지, 5A급 관광지 황요고진(黄姚古镇)은 첫 번째 입장권을 면제한다. 4A급 관광지 린허고성(临贺故城)관광지, 중공광시성공위기념원관광지, 부천고명성관광지는 장기무료이다. 난닝 다밍산(南宁大明山) 관광구 1월 8일부터 2월 8일까지 동북 3성 관광객은 유효한 신분증을 가지고 입장권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춘절 연휴가 다가옴에 따라 전국의 많은 관광지에서는 입장권 무료, 반값 할인 행사 등 할인 혜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안후이(安徽) 황산풍경구 소식에 따르면 2024년 1분기 공휴일이 아닌 매주 수요일(총 12일)에 전 세계 관광객을 대상으로 '입장권 무료 개방의 날'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간쑤(甘肃) "간쑤발표" 소식에 의하면 2024년 춘절 연휴 및 보름날에 명사산 월야천(鸣沙山月牙泉), 옥문관 유적지, 야단(雅丹)세계지질공원이 관광객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동시에, 4개월간의 겨울과 봄 관광 시즌에 막고굴 참관 동굴이 8개에서 12개로 증가하였으며, 비행기를 타고 둔황(敦煌)에 가는 관광객은 관련 증명서를 가지고 시 소속 관광지를 무료로 참관할 수 있다. 티베트(西藏) 포탈라궁의 공식 플랫폼에 따르면, 3월 15일까지 포탈라궁은 무료 예약과 무료방문은 물론 러시아워를 피하고 유동량을 제한하며 예약제를 실시한다. 방문 시간은 9시 30분에서 15시 20분이다. 산시(陕西) 산시성 문화관광청의 소식에 따르면, 2024년 1월 31일까지 화산관광지는 전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화산 입장권 무료 정책(입산 승차권과 케이블카 티켓 제외)을 실시하며, 최소 1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복건(福建) 우이산 관광지 소식에 따르면 2024년 1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관광지는 전국 관광객에게 입장권을 면제한다(관광버스 티켓과 대나무 뗏목 표류티켓은 포함하지 않는다). 쓰촨(四川) “쓰촨 발표” 소식에 따르면 2024년 3월 말 이전에 아바주(阿坝州), 간쯔주(甘孜州), 량산주(凉山州)와 판즈화시(攀枝花市) “3개주 1개시” 국유 4A급 및 그 이상의 관광지에서는 “티켓 구매 1+1”, 국유 4A급 이하의 관광지에는 입장권 전액을 면제하는 우대정책을 실시하며 구채구, 황룡, 따오청야딩, 쓰구냥산 등 인기 관광지를 포함한다. 산둥(山东) 2023년 12월 8일에 제정(济郑) 고속철도 전노선이 개통된다. 산둥성 문화관광청 소식에 따르면 2024년 2월 8일까지 제정 고속철도를 타고 산둥에 오는 관광객은 3일 이내에 고속철도 티켓으로 국유 A급 관광지 첫 입장료의 50% 이상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천하제일천, 태산, 노산, 이멍산, 태아장고성, 봉래각, 취푸 "삼공" 관광구, 천불산 등이 포함된다.
-
심천 회원제 대형마트 곧 롱화에 오픈 예정!코스트코(开市客)와 선전은 기업과 정부 사이의 '쌍방향 행보'다. 1월 4일, 코스트코 중국 본토 총경리 장수원(章曙蕴)은 선전은 젊고 활력과 혁신이 가득하며 국제화 및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시장 환경이 특히 코스트코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1월 12일에 정식 오픈 후 코스트코(영어: Costco)은 선전에 기반을 두고 대만구(大湾区) 소비자에게 국제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코스트코 선전매장의 오픈은 중국 남부지역에서의 브랜드 사업 배치의 핵심 부분이다. 선전 회원점은 룽화구(龙华区)에 위치해 있으며 코스트코가 중국본토에서 오픈한 6번째 매장이자 중국 남부 지역 최초의 오프라인매장이며 총 면적은 44,500㎡, 거의 15,000㎡에 달하는 쇼핑 공간이 있다. 코스트코 선전회원점은 선전의 도시 발전 잠재력과 경제 허브의 지위를 활용하여 선전 주민과 대만구가정에게 글로벌한 쇼핑경험을 제공하고 만구 소비를 촉진할 것이다. 코스트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 창고형 회원제 할인매장으로 "대규모"와 "세계화"라는 우세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870개 이상의 매장이 있고, 회원은 1억 2천만 명에 달한다. 코스트코는 글로벌화 구매 플랫폼의 장점을 활용하여 생선육류, 미용 및 건광관리용품, 가정용품, 가구 및 계절 상품을 포함하여 4,000개 이상의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제품을 엄격한 기준으로 선택한다. 통일된 높은 수준의 매장경험과 창고형 도매 모델을 통해 소비자는 매장제품을 스스로 탐색할 수 있으며 독창적인 보물 찾기식 쇼핑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 2019년 상하이 민항(闵行)에 중국본토 1호점을 오픈한 이후, 화동지역 소주, 항저우, 닝보 등 지역에 많은 매장을 오픈하여 점점 더 많은 중국 소비자들이 코스트코에 들어가 코스트코만의 특색 있는 고품질 쇼핑경험을 즐길 수 있다. 장수원은 "코스트코는 줄곧 중국을 중요한 전략시장으로 여겼다."며 "올해 우리는 난징에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며 주유소 사업에도 앞장서 중국의 더 많은 지역으로 비즈니스 발자취를 넓힐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코스트코의 온라인 쇼핑 경험도 디지털 시대의 온라인 소비 트렌드에 발맞춰 올해 안에 점진적으로 시범 운영될 것이며 소비자에게 더 다양한 쇼핑 경험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8)망국민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니유기석 지사는“망국민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의 조국과 민중을 열렬히 사랑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국가가 없는 망국민은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험한 유기석은 정치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국제법이나 당국의 보호라는 것은 집권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오직 망국 민중이 각성해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재중국 독립운동은 민족주의파, 공산주의파, 무정부주의파로 갈래가 나눠집니다. 유기석은 무정부주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30년간 일제의 잔혹한 착취와 종족 말살 폭정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망명과 유랑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한국독립운동사를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조일문이 가져온 일제의 자료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유기석은 전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획득한 적측 자료를 보고하고 충칭의 조선 혁명 단체와 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나는 조와 함께 징현(景縣)에서 장시(江西) 옌산(铅山)으로 가고 있었다.” 결국 이 자료를 충칭의 임시정부에 보고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일을 끝내고 기지가 있는 안후이(安徽)로 돌아가려고 잉저우(颍州)를 지날 때,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폭죽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순식간 거리에는 기쁨과 환희에 벅찬 사람들이 몰려나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동안 민중들이 이렇게 기뻐 날뛰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망국노의 굴레를 벗은 날, 유기석은 너무 기뻐 모든 피곤을 깨끗이 잊어버렸습니다. 온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평소 3일간 걸리던 100km의 길을 이틀 만에 걸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1945년 5월, 유기석 지사는 서울을 방문하여 만 2개월 머물렀으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남은 여생은 중국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역사학자로 살았습니다. 1952년 11월부터 장수 사범대학(江苏师范学院) 역사과 교수로 취임하고 1955년 조선국적을 취득했습니다. 사범학원이 수저우대학(苏州大学) 사회학원(社会学院)으로 개편된 이후에도 사망참할 때까지 재임하고, 1980년 11월 심장발작으로 75세의 일생을 소주의 자택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참고문헌 유기석, 『30년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년12월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년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자유문고, 1982년.이정규,『우관문존』,(사)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2014년면담 이정식,『혁명가들의 항일회상』민음사, 2006년.국사편찬위원회, 「중국에서의 무정부주의 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44권한시준, 「백범 김구와 한인애국단」,『한국독립운동과 의열투쟁』, 이봉창•윤봉길 의거 8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홍석표, 「독립운동가 류수인, ‘멀리서 돌아온 그대 떠니니, 다시 이별시를 짓다’」이대학보 2014년 11월 2일.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7) 호랑이 잡으로 호랑이 굴로1945년 봄, 일본 괴뢰국 왕징웨이(汪精卫, 1883~1944)정부가 운영하는 국립중앙대학에 반일 사상이 투철한 조선 학생 10여 명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날마다 패배하고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도 흔들려 추락할 때입니다. 1944년 중앙대학에서 매국노 교장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동맹 휴학 운동을 일으켰는데 당국이 학생운동 간부를 체포했습니다. 그중 신변 위협을 느끼고 학교에서 탈출한 박철원(朴哲遠)과 중국 친구들로부터 일본군 중국 파견군 사령부 연락부(특무기관)에 통역관으로 일하는 조일문(趙一文, 1917~2016)이란 한국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일문은 1980년 건국대학교 제8대 총장이십니다. 조일문은 나카하라 스스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중국 동학들과 일본 동학들도 조일문을 일본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조일문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입조심을 하면서 조선인과도 왕래가 없었기 때문에 연락부(특무기관)에서 상당한 높은 직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조일문은 졸업 후 큰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반일 사업에 참가했습니다. 유기석은 혁명동지들을 일본군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상인과 왕진 의사로 변장해서 난징에 잠입했습니다. 이들과 일은 상의하려면 회의해야 하는데 5명 이상 사람이 모일만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조일문이 일하는 특무기관 응접실에서 회의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연락부에 가서 나카라하 스스무를 찾고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유기석은 갈색 군복을 입고 망토를 걸치고 긴 가죽신을 신은 괴뢰군 소장으로 가장해서 응접실로 들어갔습니다. 중앙에 자리 잡고 나카하라 스스무가 통역하면서 10~20분 정도 중·일 친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경비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모두 7명이 일본어와 중국어로 대화하고 중요한 일은 조선어를 사용하며 약 1시간 동안 일본군에서 기의를 일으키는 방법, 적의 포위망에서 탈출해 후방으로 오는 길, 일제 점령 지역에서의 연락 장소 등을 알려주었습니다. 난징을 떠날 때, 유기석은 괴뢰군의 고급 군관으로 가장했습니다. 중국 친구 두 명이 호위병 복장을 하고, 완장, 이정표 등을 준비해서 경호해 주었습니다. 기차를 탈 때는 차표조차 끊지 않고 열차에 올랐습니다. 검표원이 차표를 검사할 때, 호위병이 우선 장관을 차에 오른 후 기차표를 사겠다고 하고 기차를 탔습니다. 우호(蕪湖)역에 내려서는 최고급 호텔로 갔습니다. 우쭐거리며 기차역을 나와 인력거를 타고 몇 개 모퉁이를 돌아 비밀지역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었는데 유기석은 호랑이 가죽옷 덕분에 고급 군관 대접을 받았습니다. 나카라라 스스무는 적군 특무기관(연락부)에서 일주일 동안 몰래 살피다가 아주 주요한 기밀자료를 훔쳤습니다. 칭다오(靑島)에서 샤먼(廈門)까지 연해 지역 일본군 방어지도, 미군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현재의 적 상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 분자 활동 상황 등이었습니다. 일제로는 심각한 타격입니다. 전략 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 사업이 모두 노출되었으니까요. 조일문은 상급 비밀자료를 훔친 후 일본 군복과 일본 칼을 착용하고 난징을 떠나 유기석을 찾아왔습니다. 일제 특무기관에서는 월요일이 되어서야 조선 관적 인원이 출근하지 않은 것을 알고 조사한바, 기밀문건 한 무더기와 지도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비군에게 뒷조사하라고 명령했을 때 이들은 벌써 안전 지대에 진입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6)한교전지공작대(1944~1945)1938년부터 일제는 '육군 특별지원병 명령'을 공포하고 조선 청년들은 징용해서 중국 전쟁터에 종군시켰습니다. 일제는 조선 관적 병사들이 총부리를 돌릴까 봐 별도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일본관적 병사 부대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중국 전쟁터에 일본군에 소속된 수만 명 조선관적 병사가 총알받이로 등장합니다. 유기석 지사는 일본군에 소속된 조선족 병사들을 주목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소속된 부대에서 “의를 일으켜, 기의(起義)” 즉 한인이 일본 군에 강제 종군하는 불의를 의식하고 탈출하도록 지휘해서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일입니다. 임시정부가 류저우에서 충칭으로 이동하는 사이, 유기석의 동지 정현섭(鄭賢燮, 1896~1981)이 일본군에서 탈출한 조선족 병사들을 모아 푸젠(福建) 젠양(建陽)에서 한·중합동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정현섭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일행이 있는 충칭으로 가려고 하다가 계획을 변경해서 푸젠성 젠양으로 왔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잘 아는 중국동지들과 긴밀히 연락하고 또 우리 동지를 규합하여 한·중합동유격대를 조직한다면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결성된 한·중합동유격대는 시안(西安)에 주둔하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협력했습니다. 1939년 5월부터 9월까지, 임시정부는 스촨성 치장(綦江)에서 관내의 모든 독립운동 단체와 당(黨)을 해산하고 하나의 단일조직으로 단합을 시도했으나 최종적 합의를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정치권 단합이 실패하자 김신(金信, 1922~2016)과 이하유(李何有, 1909~1950) 등 청년들이 나서서 “상하이에서 지하 공작하던 사람들 중심으로 우리만의 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전방으로 나가겠다”며 김구에게 의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 중인 동지들을 설득해서 결성한 공작대입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중합동유격대는 유기석과 정현섭 등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선으로 시안에서 서북 방위를 담당하고 있던 중앙군 제34집단군사령관 후종난(胡宗南호종남) 장군의 태항산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었습니다. 이런 일은 아나키스트인 후종난의 스승 예징슈(葉淨秀)와 후장군의 비서이자 결의 형제인 후보이(胡保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중합동유격대는 후방을 교란시키고, 일본군 점령지역까지 잠입하여 산발적인 유격전도 전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인도 모집했습니다. 모집된 청년들은 서안으로 후송되어 국민당 중앙부가 경영하는 한국 청년훈련반(약칭 한청반)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전지공작대 대원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활발한 군인 모집 활동을 통해 결성 당시 28명이던 대원이 1940년 말에는 100여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정현섭이 젠양에 한·중합동유격대를 조직할 때 유기석은 안후이(安徽) 우호(蕪湖)에서 전시공작대를 조직했습니다. 우호에서 기관총을 들고 완전무장을 한 한인 군사 7명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중국군과 접촉하며 활동하다가 전시공작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유기석은 한국 군인들과 일하려고 수많은 난관을 뚫고 한국광복군 제1지대와 제2지대가 주둔하는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饶)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광복군 제1지대와 제2지대는 구대장과 분대장 사이의 반목으로 인해 협력하지 못하고 대원들은 이유 없이 적대시하며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유기석은 상라오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동포 연합을 위해 몇 개월 동안 작업을 벌여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제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를 결성했습니다. 인원은 일본 군대에서 기의를 일으킨 병사와 의사, 상인, 노동자, 학생, 전도사 등 모두 십여 명이고 유기석이 부대장 직무를 맡았습니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 사병들이 중국 정규군이나 유격대에 발견되면 젠양이나 상라오에 주둔하는 한국인에게로 넘겨졌습니다. 한·중 동지와 그 휘하의 청년들, 일본군에서 탈출해 온 장병들 등 한 부대를 편성할 만한 인원이 되자 젠양에 주둔하는 중국군의 협조를 얻어 1939년 초가을에 한교전지공작대를 발족했습니다. 한교전지공작대의 주된 작업은 일제 침략 전쟁을 반대하고 한적병사가 일본군 부대에서 기의를 일으키도록 책동하고 필요하면 일본 병사에 대해서도 반전을 선전했습니다. 1944년과 1945년, 한교전지공작대는 적 점령지인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공작 활동을 벌였습니다. 특히 조일문이나 박철원 등 난징 중앙대학 출신들과 첩보영화 같은 반일 공작을 전개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모 남성, 37일 연속 휴가 내고 해고돼 법원: 회사 8만여 위안의 배상금 지급해야리싱(가명)이 두 달 동안 37일 휴가를 내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계속 휴가를 내려 했지만 회사는 그의 휴가 신청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싱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 출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휴가를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근하지 않았고 회사는 무단결근을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그는 회사의 행위가 불법적인 노동관계 해지에 해당함으로 마땅히 회사가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생각하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2013년 9월 30일, 리싱은 전시장 매니저로 회사에 입사했다. 양측이 체결한 노동계약의 기한은 2018년 10월 1일부터 2023년 9월 30일까지이며, 리싱은 주 6일 근무하고 1일 휴식하는 종합노동시간제를 시행한다. 2021년 3월, 4월에 리싱은 출근하지 않고 딩딩(钉钉) 시스템을 통해 휴가를 신청했으며 그 중 승인된 휴가기록은 3월 사적휴가 7일, 연차 8일, 육아 휴가 12일, 4월 1일부터 3일까지 육아 휴가 3일, 사적휴가 7일로 총 37일이다. 승인되지 않은 휴가 기록은 10일이며, 휴가 신청 사유는 모두 가족 돌봄이다. 2021년 4월 11일과 12일의 미승인 휴가 사유에 대해 딩딩(钉钉) 시스템에 따르면 회사 행정관리자 손씨는 "2021년 3월 20일부터 4월 3일까지 육아 휴가를 신청했고, 4월 5일부터 7일까지 2021년 4월 15일, 22일, 29일의 휴일을 미리 사용했으며, 4월 8일과 9일 이틀간 가족을 돌보기 위한 사적휴가를 사용하도록 승인했다. 회사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더 이상 정당한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사적 휴가 신청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보충했다. 리싱은 "가족을 돌보는 것이 부당한 이유입니까? 사적휴가를 낼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회사가 인정하는 사적휴가를 낼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무엇입니까? 아무 문제가 없다면 계속 사적휴가를 쓰겠다"라고 답했다. 2021년 4월 14일, 리싱은 곽모 회장에게 "행정관리자 손씨가 내일부터 무단결근을 계산하고 월 3일 누적되면 해고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3월부터 어머니는 정신적인 문제로 입원했고,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으며, 아내는 출산 예정일이 늦어졌고 큰 아들은 신장에 물이 차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 후 간헐적으로 열이 나서 감염 진단을 받고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딸은 태어난 다음 날 용혈성 황달 진단을 받았고 일주일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단기간 내에 출근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회사의 요구에 따라 정기적으로 휴가를 신청했지만 손경리는 승인을 거부했습니다. 회사에서 사적휴가 일수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습니까? 저는 회사에서 8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힘들고 저를 필요할 때 무단결근을 이유로 저를 해고한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병원에서 발급한 증빙서류를 첨부해 드립니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곽모는 "회사 입장에서는 회사 제도에 따라 처리합니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세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2021년 4월 15일, 회사는 리싱에게 "2021년 4월 16일 제때에 출근하여 회사에 무단결근 사유를 설명하세요. 기한내에 합리적인 설명을 해 줄 수 없다면 무단결근으로 간주되며 회사는 '직원 출근 및 휴가 관리 제도'에 따라 무단결근에 상응하는 처분을 내릴 권리가 있다"라는 내용의 통지서를 우편으로 보냈다. 리싱은 출근하지 않았고 그 후 회사는 리싱에게 노동계약 해지 통지서를 보냈다. 리싱은 노동쟁의 중재를 신청할 때 회사가 그를 해고하는데 제도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가정을 돌보는 무거운 짐이 한 사람에게 짓눌려 있고 그의 휴가 신청은 원인이 있으므로 무단 결근에 속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진단증명서, 퇴원진단증명서, 산부인과 퇴원기록, 베이징시위중신생아 이송병력, 퇴원기록 등을 제출했다. 심사후 중재 판결은 리싱의 모든 청구를 기각했고 그는 이 판결 결과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며칠 전 베이징시 제2 중급 인민법원은 회사가 리싱의 노동 계약 해지에 대한 경제적 보상금 87,679.04위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리싱의 세 가족이 잇따라 병에 걸리고 아내가 출산하고 본인의 수입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회사에 사적인 휴가를 신청한 것은 법적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필요이자 인륜도덕의 구현"이라고 판단했다. 해당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 본인은 대체 불가능하며, 리싱이 사적인 휴가를 신청하는 사유 또한 필요하고 합리적이다. 반면 회사는 리싱이 특정 상황에서 사적인 휴가를 내야 하는 이유를 무시했는데 이는 사적 휴가에 대한 규정과 취지를 위반했다.
-
업주 단체방에서 부동산관리회사에 대해 불만을 말했다고 경비들이 찾아와 뺨을 때렸다?! 경찰 수사에 개입마씨는 산시성 단봉현의한 아파트에 사는 '00后'이다. 그는 2023년 1월 하순, 자신의 차가 아파트 단지에 주차되어 있을 때 누군가에 의해 긁힌 자국이 났다고 소개했다. 그는 관리실에 CCTV를 통해 가해자를 찾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가치 있는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2023년 12월 31일 오전 6시쯤, 마씨는 밖에서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을 때 전기차와 오토바이가 질서없게 주차되어 있어 차를 주차할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주차자리에 있는 오토바이와 전기차를 옮기고 차를 세웠다."며 말했다. 그러던 참에 차가 긁혔던 일이 떠올라 업주 단체방에서 부동산관리회사에 대해 불평하고 욕설을 몇마디 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던 그는 부동산 관리 직원과 경비가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2023년 12월 31일 오전 9시쯤 아파트 관리 직원과 경비원 7~8명이 우리 집에 왔다. 자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일어나라고 하셨다."며 말했다. 그가 침실 문을 열고 외투를 입고 있을 때 관리 직원과 경비가 들이닥쳐 업주들 단체방에서 누구를 욕했느냐고 물었고, 그 후 쌍방은 다툼이 발생했다. 당시 그를 때린 사람은 네다섯 명이었는데, 그는 "전 과정에서 반격하지 않았고 그동안 그의 아버지는 줄곧 싸움을 말렸다"고 말했다. 마씨는 그날 맞은 후 입을 다쳐 피가 났고 어지럽고 귀가 울리고 얼굴이 저렸다고 말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한 후, 그는 자신을 때린 몇 사람을 지목하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 후, 경찰은 부동산 회사의 여러 사람을 파출소로 데려가 조사했고, 그는 가족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마씨가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얼굴이 부분적으로 붓고 입술에 찰과상을 입어 진단 결과 의사는 급성 외상 후 두통으로 입원 치료를 권했다. "사건 발생 후 부동산관리회사에서 아무도 병원에 나를 보러 오지 않았고 그들은 부모님을 찾아 개인적으로 화해를 하자고 말했다."며 말했다. 부동산관리회사 직원 소씨는 "사고 당일 아침 5~6시에 마씨가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다. 마씨는 주차자리에 몇 대의 오토바이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자리를 옮긴 후 자신의 차를 가로로 세워 차 한 대가 세 자리를 차지했다. 그 후 마씨는 업주 단체방에서 부동산관리회사에 대한 욕설을 했다. 이날 오전 9시쯤 관리소 경비원 몇 명이 마씨의 집을 방문해 상황을 파악했고 마씨는 휴식하고 있었다. 마씨가 옷을 입고 일어나는 동안 서로 언쟁을 벌였고, 경비원이 현장에서 경찰에 신고했다. 마씨가 퇴원하면 당사자 양측이 파출소에서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 씨가 "전에 아파트 단지에서 차가 긁혔다"고 말한 것에 대해 소씨는" 관리소에서 CCTV를 확보했지만, 차량의 긁힌 부위가 측면에 있어 CCTV가 보이지 않아 관리소는 마씨에게 신고해 처리하라고 건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후 부동산 관리회사는 이미 해당 경비원과 직원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고 "일의 조사 처리가 끝나면 관리회사는 추가 처리 의견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1월 2일 오전, 단펑현 공안국 관련 책임자는 "초기 파악에 따르면, 사고 당일 아침에 마씨가 차를 가로로 세워 세 자리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경비가 그에게 차를 옮기라고 권했고 마씨는 차를 옮긴 후 속으로 불복하여 업주 단체방에 몇 마디 투덜댔다. 이를 본 아파트 경비원이 마씨의 집에 찾아갔고 쌍방은 말다툼을 벌여 충돌을 발생했다. 신고를 받은 후, 현지 파출소는 즉시 현장에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현재 조사 처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5)국민당 유격대 활동구역에서 학교 설립유기석은 아나키즘 이론가이자 행동하는 아나키스트였으며 교육자입니다. 1938년 말, 일제는 난징까지 점령해서 지하공작도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기석은 공작조 작업과 활동을 마무리하고 상하이를 떠났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임시정부 일행을 따라갈 수도 없고 상하이에 발붙일 곳도 없는지라 창장(長江)에서 배타고 장수(江苏) 북쪽 지방 하이먼현(海門縣) 링춘(靈旬) 항구에 내려 국민당 계통의 유격대가 활동하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일제 기밀문서에 유기석이 상하이를 떠나 몰래 홍콩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한 걸로 보아 일제는 유기석의 종적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유기석은 장수의 북쪽 국민당의 유격대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한인들과 연락도 못 하고 부인만이 유기석이 한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녀들도 아버지가 한인인 것을 몰랐습니다. 1938년 이후, 유기석은 중국 국민당 유격대 정훈처에서 일했는데 심히 부패하여 실망하고 유격대를 떠났습니다. 1940년 여름, 장수(江蘇) 북쪽 동타이현(東台縣)에서 문화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유기석은 문화사 사회복지부 직원 신분으로 학교를 창립하고 교장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장수 문화사가 교육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3천 원을 제공하고 매월 500원씩 학교 경상비로 지원했습니다. 관제묘(关帝庙)에 학생 기숙사와 교실을 만들고 동악묘(东岳庙)는 직원숙소로 삼아 기초 건물을 간단히 보수했습니다. 교사 10여 명을 초빙하고 9월 중순, 고등학교 40명, 중학교 1~2학년 80명으로 개학했습니다. 학교설립 목적은 문무를 겸한 애국 항전 간부 양성입니다. 일반 보통 중학교 과정 외 군사훈련과 체육활동을 중시했습니다. “성실”, “돌진”, “정의”, “용감”이라는 교훈을 현수막에 써서 걸었습니다. 학교 담장에는 중국 지도를 크게 그리고, 지도 위에는 “우리의 강산을 돌려 달라”는 표제를 쓰고 양쪽에는 ‘단결 분투’와 ‘항전 필승’이라는 여덟 글자도 썼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은 희망과 열정을 가지고 화기애애하게 운영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운영비를 지원하던 문화 인쇄소가 전쟁으로 인해 이전하게 되어 부득불 문화중학은 폐교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기석은 이상적인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성 정부에 신청하여 카이윈(關云)에 성립 향촌사범학교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지방관청이 협조해서 지주의 창고를 빌어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두 차례 시험을 거쳐 100명이 넘는 신입생을 모집하고 정식으로 개학도 했습니다. 약 한 달 이상 수업을 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이 소탕한다며 출동했습니다. 학교 문앞에 화광이 충전하고 연대본부가 불탔습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긴급 소집해서 적이 공격하니 집이 먼 곳에 있는 학생은 잠시 근처의 천척이나 친구 혹은 학우집에 가서 기거하라는 휴학을 선포하고 돌려보냈으나 그 이후 학교는 다시 개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광동성 최신 평균 채용급여 발표, 선전, 평균 채용급여 광동성 1위최근, 즈렌자오핀(智联招聘)은 2023년 4분기 《중국 기업 채용급여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2023년 4분기에 38개 도시 기업의 평균 채용급여는 월 10,420위안으로 전 분기의 월 10,115위안보다 3% 상승했다. 선전, 평균 채용급여 광둥성 1위 보고에서 모니터링한 전국 38개 핵심 도시 중에서 선전은 3위를 차지했으며 평균 채용 급여는 13,067위안이다. 광저우, 주하이 등 도시도 채용 급여 순위 10위권에 들어 평균 채용 월급이 11,186위안, 10,508위안이다. 동관, 불산 순위는 각각 14위, 15위이며 평균 채용급여는 10,086위안, 10,019위안이다. 산업 측면에서 2023년 4분기 금융 산업의 채용급여가 여전히 앞서고 있다. 그 중 펀드/증권/선물/투자 산업의 평균 채용급여는 13,804위안으로 가장 높았고 평균 급여가 10,000위안을 넘었다. 은행(11,736위안)의 급여 수준은 6위이고 평균 급여는 10,000위안 좌우이며, 보험(11,517위안)산업은 10위로 급여의 평균은 9,215위안이었다. 4분기 컴퓨터 소프트웨어 산업의 평균 채용 급여는 12,146위안으로 전분기 대비 8.2% 증가하여 순위가 10위에서 2위로 올라섰다. 주로 채용직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4분기에 컴퓨터 소프트웨어 직종의 채용직 중 행정, 재무, 고객센터 등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직종의 비율이 감소하여 직종의 평균 채용급여 수준을 상승시켰다. 또한 전자 기술/반도체/집적 회로, IT 서비스, 에너지/광물/채굴/제련전문 서비스/컨설팅 및 항공/우주 연구 및 제조 등의 업종은 채용 급여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 국내 서비스 소비가 지속적으로 반등함에 따라 4분기 호텔요식업, 교통 운수 업종의 채용 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4%, 1.5% 증가하여 상위 10위권에 랭크되었다. 또한 무역수출입, 의약생물, 교육양성, 컴퓨터 소프트웨어, 펀드증권, 검사/시험/인증 및 계측 및 산업 자동화산업도 TOP10 산업을 가속화하고 있다. 국내 기업의 채용급여는 전월 대비 증가, 전년 대비 소폭 감소 직업 측면에서 인공지능 엔지니어는 이번 분기에 칩 엔지니어를 제치고 고임금 직업 1위로 올랐으며 월평균 채용급여는 22,788위안이다. AI 대형 모델 기술의 신속한 반복 및 적용은 관련 기술 인력 수요와 임금 상승을 추진한다. 칩 엔지니어의 채용 급여는 22,274위안으로 3위를 차지했다. 기술직과 연구개발직의 급여 수준이 가장 높다. 그 중 소프트웨어 R&D, 하드웨어 R&D, 모바일 R&D, 자동차 전자 엔지니어 및 데이터 엔지니어 등의 채용 급여는 14,000위안 이상이고 에너지절약/에너지 엔지니어, 바이오/의약연구개발, 프론트엔드개발, 전자/전기/자동화엔지니어, 테스트 엔지니어, 기계 설계/제조 엔지니어 등의 직무는 급여가 12,000~14,000위안이다. 전년 동기 대비 직업채용 급여 증가율의 관점에서 4분기 접촉서비스 직종의 채용급여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가사/보수 등 주민서비스와 관광서비스, 음식서비스 등 소비서비스 직종의 채용급여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8.4%, 5.1%, 2.9% 증가했다. 소비촉진정책이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국경절연휴 등 요인으로 인해 올해 4분기 국내 접촉형, 집결형 서비스업이 빠르게 회복되고 호텔, 요식업, 관광, 교통운수 및 기타 산업의 활력이 강화되었으며 관련 서비스직의 임금이 순차적으로 인상되었다. 교육 분야의 채용급여도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그 중 어학훈련과 재능특기훈련은 전년 대비약 5% 정도 증가했다. 2023년 4분기의 부동산 거래 직종의 급여는 전년 동기 대비 12.4% 증가하여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자동차 판매 및 서비스, 환경과학/환경보호 엔지니어, 기계 설계/제조 엔지니어, 의료기기 판매/연구개발 및 기타 직업도 전년 대비 채용급여 증가율 TOP 20에 나열되어 있다. 즈렌자오핀(智联招聘) 데이터에 따르면 2023년 4분기 국내 기업의 채용 급여는 전월 대비 증가했고 전년 동기 대비 소폭 감소했다. 상하이, 베이징, 선전, 항저우 등 도시, 금융, 정보기술 산업, 인공지능 엔지니어 및 기타 기술 직종의 급여는 지속적으로 앞섰다. 작년에 비해 장강 삼각주의 우시, 닝보, 쑤저우, 항저우, 허페이 등 도시의 급여는 꾸준히 증가하였고, 신에너지 산업 및 소비자 서비스 직종의 급여는 빠르게 증가했다.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4)상하이 지하 공작조1937년 12월, 한인들은 일제의 공격을 피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난징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일본군은 난징도 점령했습니다. 난징 대학살이 있기 직전, 임시정부는 동포를 난징으로 불러들여 물가가 가장 저렴한 창사(長沙)를 향해 떠났습니다. 1938년 봄부터, 상하이 공공조계지와 프랑스조계지는 실제적으로 일본 특수공작원 기관이 지배했습니다.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홍커우(虹口)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1,000명은 대부분 조선거류민회에 소속되어 아편과 마약류를 판매하거나 위안부를 운영하는 친일 분자였습니다. 유기석의 임무는 지하 공작조를 인솔해서 상하이 조계지 등에서 일제에 타격을 가하는 활동입니다. 지하 공작조에 참여한 인원은 한국국민당 계통의 일부 청년과 아나키즘 계열의 청년 10여 명이었습니다. 공작조 인원은 적지만 이들은 모두 반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열혈 청년들입니다. 회계를 담당한 이동명(李東明)은 대학교 재학 중이었으며 유명한 운동선수였습니다. 이들은 중학교 교사 등의 신분으로 가장하고 만약을 위해 각자의 거주지조차 서로 알리지 않고 유기석만 이들과 연락했습니다. 상하이 지하 공작조는 후방과 어떤 연락도 없이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프랑스 조계지에서 활동했습니다. 지하 공작조가 암암리 프랑스조계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파나 주구들도 감히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조계지도 역시 점점 친일파 천하로 변했습니다. 지하그룹 10명의 주요 임무는 일제 기관을 파괴하는 등 직접 행동입니다. 우한에서 수 개월간 특수 제작한 폭탄을 광저우로 운반할 때였습니다. 중국 친구 왕 씨가 자원해서 자신은 중국인이라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교통 상황도 비교적 잘 안다며 무기와 폭탄 운반을 자원해서 맡았습니다. 그런데 상자 모양으로 제작된 특수폭탄을 운반하던 중 열차 안에서 헌병에게 발각되었습니다. 폭탄이라는 소리를 들은 헌병이 놀라 폭탄 상자를 물속에 던지고 왕 씨는 체포되었습니다. 폭탄 제조를 도운 광저우 정부 당국이 출처를 조사해서 왕 씨는 석방되었지만 상자 폭탄은 물속에서 폐물이 되고 계획한 일은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틀 후 국민당 광둥성 정부의 주석 위한모(余漢謀, 1896~1981)가 편지를 보내 미안함을 표시하고 다시 폭탄을 제조하여 손실을 보상해 주겠다는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배상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한모 수하에 있는 누군가가 고자실을 안 한다고 보장을 할 수 없는지라 계획했던 일을 취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