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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칼에 이어 코흡입 에너지바가 초, 중,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 이미 중독된 아이도 있어"등교 전 한 모금, 방과 후 한 모금" 무칼에 이어 최근에 “코흡입 에너지바”가 초, 중,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에 “코 흡입 에너지바”의 판매량이 많고, 여러 제품의 월 판매량은 수만 개에 달하였다. 최근 초등학생 2명이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사장에게 빨리 물건을 들여오라고 외치며 "중독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일부 부모들은 "어떤 학생은 이미 중독되어 놓을 수가 없다"고 반영했다. 아이들이 신체 발달 시기라며 '코흡입 에너지바' 사용에 대해 의문과 우려를 제기했다. 판매상의 홍보에 따르면 제품은 주로 멘톨, 보르네올, 식물성 에센셜오일 및 기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향기가 나며 일부 제품에는 소비자의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술 성분도 첨가되어 있다. 일부 상인들은 수업 시간에 정신을 맑게 할 때 사용하기에 적합하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소비자 평가에 따르면 많은 학생들이 이를 구매하고 일부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사주기도 한다. “코 흡입 에너지바”를 파는 한 전자상거래가게의 고객센터 직원은 "현재 중학생들이 더 많이 사용하고 있고 초등학생은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부 초등학생들은 여전히 맛보기를 위해 “에너지바” 제품을 구매한다. 그럼 “수업시간 수면방지신기”가 정말 인체 건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북경대학인민병원이비인후과 주임의사 싱지민(邢志敏)은 '코흡입 에너지바를 콧구멍에 집어넣는 행위는 전혀 옳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콧구멍에 이런 것을 함부로 집어넣으면 안 돼요. 첫째는 세균도 있고 둘째는 코 점막도 파괴할 수 있다'며 말했다. 다른 전문가는 '코흡입 에너지바에 들어있는 장뇌와 박하는 천연 성분이지만 과도하게 사용하면 인체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뇌를 장기간 또는 다량 흡입하면 신경계 손상, 간 손상, 호흡곤란, 메스꺼움 및 구토와 같은 증상을 초래할 수 있다.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비강 점막을 손상시킬수 있으며 때로는 코에서 피가 날 수도 있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장시간 사용하면 약물 의존성이 생길 수 있다. 즉 사용하지 않을 경우 무기력증이나 정신적 권태의 증상을 유발할수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장시간 사용하는 것은 권장하지 않는다. 사회 경험이 부족한 청소년의 경우, '코흡입중독'이라는 행동은 어느 정도 그들의 마약에 대한 방비 심리를 떨어뜨릴 수 있고, 그들이 마약 관련 함정에 더 쉽게 빠지게 할 수 있다. 동시에 관련 경영 상인은 아동 및 학생용품의 구매 및 제품선택에 더 신경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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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시 개인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단체방에 가입하면 혜택이 있다? 과도한 개인정보 유출에 유심해야일상생활에서의 거의 모든 쇼핑, 음식 주문, 주차요금은 휴대폰으로 코드를 스캔하여 지불하므로 소비자 편의 뿐만 아니라 운영자의 인건비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유출하여 범죄자들에게 악용되지 않을까? 조사에서 기업이 코드 스캔 소비를 강제하거나 유도하는 문제가 더 일반적이며 소비자가 이미 매장에 있더라도 일부 불필요한 개인 정보를 요구받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호남성 창사에서 한 직원이 자기 가게에서 코드를 스캔하면 개인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확인 결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코드를 스캔한 후 애플릿의 개인정보 보호지침을 볼 수 있으며 먼저 위치를 수집한 다음 클립보드, 방향 센서, 자기장 센서, 프로필 사진 등 기타 개인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많은 소비자들이 코드 스캔 소비를 선택할 때 피동적인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 사 여사는 '소비자가 프라이버시 정책 설명을 읽더라도 개인 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관련 상품 구매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기업이 코드 스캔 소비를 추진하는 목적은 회원을 고정하고 2차 마케팅을 위한 고객 및 소비 데이터를 축적하는 동시에 노동력을 절약하고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소비자의 자주적 선택권과 알 권리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으며 범위를 넘어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의심된다'며 전했다. 2021년 11월 1일 시행되는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 수집은 처리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범위로 제한하고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개인정보처리자는 개인이 자신의 개인정보처리에 동의하지 않았거나 동의를 철회했다는 이유로 제품이나 서비스 제공을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사이버 보안 전문가들은 코드 스캔 소비에도 숨겨진 리스크가 있다고 소개한다. '일부 사람들은 악의적인 QR코드를 유혹적인 곳에 끼워 넣는다. 예를 들어 훙바오를 받는 등 스캔을 해서 여는 사이트가 있을 수 있고 신분증번호, 카드번호 등을 입력하라고 요구하는데 돈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며 소개했다. 현재 개인 정보를 절도, 판매하고 전신사이버사기를 실시하는 것은 이미 검은 회색 산업 사슬이 되었는데 공민의 개인 정보 유출은 그 중 가장 중요한 일환이다. 소비자의 경우 강제로 코드를 스캔하는 상황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 할까? 쓰촨성 더양에서 소비자 뤄씨는 자신의 개인정보가 강제로 요구되자 상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22년 5월, 뤄씨는 훠궈 가게에 식사를 하러 갔고 종업원은 '상가의 공식계정을 팔로오해야 한다'는 이유로 메뉴판을 제공하지 않았고, 뤄씨에게 코드를스캔하여 주문하고 강제로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뤄씨는 해당 훠궈 가게의 행위는 합법적, 정당하지도 않고 불필요하며 자신의 개인정보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상가를 법원에 고소하고 훠궈 가게에 개인정보를 삭제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기소를 받은 후, 법원은 "뤄씨가 훠궈 가게에서 식사할 때 휴대폰 번호, 생일, 이름, 위치, 주소록 등 음식 소비와 무관한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식당이 권리침해를 중지하고, 판결 효력 발생일로부터 10일 이내에 취득한 뤄씨의 개인정보를 삭제하라고 판결내렸다. 코드 스캔 소비를 강제하는 외에도 코드를 스캔하면 선물을 주는 것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사기형태가 되었다. 사기꾼들은 일부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무료 선물에 QR코드를 인쇄하여 코드 스캔을 유도해 사기 행각을 벌인다. 베이징, 상하이 및 기타 지역의 네트워크정보사무실은 관련 주관부문과 함께 일련의 관리조치를 수행하고 코드 스캔 소비 서비스를 규제하기 위한 관련 정책을 발표하였다. 상하이 자딩의 한 쇼핑몰은 최신 '청정 버전' 주차 코드를 출시했다. 소비자는 코드를 스캔한 후 번호판 바인딩, 요금 조회, 지불의 3단계만 완료하면 된다. 현재 상하이시네트워크정보사무실은 음식점, 주차 코드, 어린이 교육, 슈퍼마켓 쇼핑, 소규모 금융대출, 부동산 중개, 자동차 4S 매장, 충전기 대여 등 8개 소비 분야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분야에 대해 지속적으로 집중 단속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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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공항 국내선·국제선 다수 신규 개설 및 추가!민항 항공시즌 변경에 따라 10월 29일부터 심천공항은 “겨울/봄시즌 항공편 계획”을 시행할 예정이다. 겨울/봄시즌: 2023년 10월 29일 ~ 2024년 3월 30일 이번 항공시즌 편성 후 심천공항의 항공편 용량은 더욱 증가할 것이며 일평균 항공편수는 처음으로 1,300편을 넘어 2019년 같은 시기보다 20% 가까이 증가할 것이다. 새로운 항공시즌에 심천공항의 계획된 주간 항공편수는 9,100편을 초과할 것이며, 그 중 주간 여객항공편수는 8,200편 이상, 화물항공편수는 950편 이상, 국내외 여객 화물취항 지점은 170개가 넘을 것이다. "항공시즌"이란, 민항 시스템이 매년 두 차례 시행하는 항공편 계획 조정을 말한다. 여름/가을 시즌은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토요일까지, 여름/가을 운항계획을 시행한다. 겨울/봄 시즌은 10월의 마지막 일요일부터 다음해 3월의 마지막 토요일까지 겨울/봄 운항계획을 실행한다. 항공편 계획은 겨울과 봄, 여름과 가을에 따라 조정하는데 한편으로 계절에 따라 여행객의 이동 특성이 다르기때문에 여행비수기와 이동 주기에 따라 항공편을 조정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계절별 날씨변화로 인해 비행 기준이 크게 달라져 비행 안전을 위해 항공편 조정이 필요하다. 심천공항은 이번 항공시즌 변경을 계기로 시장 수요에 따라 항공사와 연합하여 원산(文山), 신양(信阳), 뤼량(吕梁) 등 국내 취항 지점을 신규 개설하고 심천에서 베이징, 상하이, 난징, 항저우, 우시, 충칭, 청두, 하얼빈, 쿤밍 등 38개 도시의 항공노선을 추가한다. 계절성 관광 수요와 결합하여 심천에서 동북, 서남 방향으로 향가는 항공편이 대폭 증가할 것이며, 심천에서 하얼빈과 심양을 왕복하는 주간 항공편이 100편을 넘을 것이다. 심천공항은 공공비즈니스 이동 수요의 안정적 회복세를 결합하여 항공사와 연합하여 고품질 비즈니스고속선의 빈도와 운영품질을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둘 것이며 그 중 심천에서 상하이(푸둥, 훙챠오)와 베이징(수도, 다싱)을 오가는 매일 120편 이상의 항공편이 계획되고 심천에서 쿤밍, 청두쌍류, 칭다오, 난징 등 기타 노선을 오가는 주간 항공편수는 30-40편이 증가할 것이다. 항공편 시간도 더욱 최적화되여 여행객의 이동 수요를 더욱 만족시킬 것이다. 새로운 항공시즌에는 심천공항의 국제여객운송서비스도 더욱 재개되어 매주 700편 이상의 국제 및 지역 여객운송 항공편이 계획된다. 그 중 심천-프랑크푸르트, 테헤란 등 국제선은 10월 말과 11월 초에 잇따라 운항을 재개할 것이며 심천-카이로, 후쿠오카 등 신규 노선은 올해 말에서 내년 초에 개설될 것으로 전망되어 국제선의 네트워크 방사력이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시즌 변경 후 국내외 항공사들은 심천공항에서 화물 운송 능력을 늘리고 심천-푸껫, 부다페스트 등 새로운 국제화물노선을 개설하고 심천-로스앤젤레스, 시드니 화물 노선을 추가하며 심천공항의 일평균 계획된 화물 항공편수는 100편을 초과하여 심천 특색산업의 해외진출과 크로스보더 전자상거래 등 새로운 대외무역 형식의 발전을 위한 원활한 항공운송 통로를 구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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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중국 공산당 팔로군 기지로 가자조선의용대는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소속이며 독자적인 작전권이 없었습니다. 전단을 살포하거나 벽보를 부착하고 대일심리전을 전개하는 등 후방에서 제한된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1939년 말, 조선의용대 대원이 늘어나 모두 314명이나 되었습니다. 제1구대 일부 대원과귀순 포로 등을 합하여 조선의용대 제3지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때 공산당 팔로군은 타이항산구(太行山區)에 들어가 총을 들고 직접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 조선의용대원들은 국민당이 지시하는 후방 업무에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의용대대원 중 일부는 하루빨리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나 태항산구에 들어가 팔로군과 협력하며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이나 공산당 모두 함께 일하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원 숫자는 많지 않지만 모두 건강한 신체를 가졌고 한·중·일 3국의 언어를 잘 구사했습니다. 중국어와 일어 문자에도 익숙하며 대부분 민족 혁명에 대한 확실한 이론과 전술을 갖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고 생각도 순수하며 사회적 관계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렵고 힘든 생활도 잘 견디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조선의용대제2구대 지도위원이었던 최창익(崔昌益, 1895~1960)은 한인 청년들이 중국 항일운동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동북 노선'을 주장했습니다. 동북으로 진입하기 전에 먼저 중공팔로군과 협력하기 위해 공산군과 합류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최창익은 1939년 3월, 조선의용대를 탈퇴하고 제2구대 18명을 인솔해서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옌안(延安) 공산당 구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화북 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자 다수의 민족주의자가 최창익의 ‘동북 노선’에 공감하며 공산당 구역으로 자진해서 이동했습니다. 1940년 말부터 1941년 5월 사이, 화중과 화남에 흩어져 주둔하던 조선의용대 120여 명이 조심스럽게 뤄양 국민당 구역에 집결했습니다. 이들은 기회를 이용해 국민당군사위원회의 동의 없이 4진으로 나뉘어 몰래 공산당 팔로군 구역으로 들어갑니다. 조선의용대가 국민당의 승인없이 공산당구역으로 진입한 일은 장제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조선의용대 대원 40여 명과 충칭에 남아 있던 김원봉은 북상하는 의용대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반공 인사들은 김원봉이 조선의용대 역량을 공산당에게 넘겼다고 비판했지요. 공산당 팔로군의 역량은 강해지고 국민당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국민당은 조선의용대가 좌경화되어 공산당 근거지로 이동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용대 친공 성향이 뚜렷해지자 장제스의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팔로군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원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중국군사위원장 허잉친(何應欽, 1890~1897)은 조선의용대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더 이상 확대하거나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무마했습니다. 김원봉의 난감한 입장도 가히 짐작됩니다. 모두 자신의 지휘하에 진행된 일이니까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공산당 대표에게 자신도 타이헝산으로 보내 달라고요청했습니다. 저우언라이는 김원봉에게 충칭에 남아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옌안행을 거절했습니다. 한편 김원봉에게는 국민당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만약 김원봉이 충칭을 떠나면 국민당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지원이 중단되어 당장 민족혁명당 가족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장제스는 점차 김원봉을 불신하고, 김구와 임시정부를 정통 독립운동 기관으로 인정했습니다. 김구의 제안으로 중국 군사위원회는 한국 광복군 창설을 승낙했습니다. 한국 광복군은 국민당 군사위원회에 소속되어 국민당 군사위원회가 군비를 지출했습니다. 김원봉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선의용대를 취소하고 대한민국 광복군 부총사령관으로 취임했습니다. 충칭에 남은 소수 대원을 인솔하여 대한민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했습니다. 충칭에서 김원봉은 좌우파로부터 오해를 받았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김원봉을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고 공산주의 계열의 좌파들은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시각으로 김원봉을 평가하시겠습니까?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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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남학생 장난질에 친구는 중상 입고 부모는 10여만 위안 배상하게 되어광저우시 중급인민법원이 발표한 민사 사건에서 광저우에 있는 모 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샤오제(가명)가 같은 반 친구 쓰쓰(가명)가 일어나서 말하는 틈을 타 몰래 의자를 뒤로 당겨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후, 쓰쓰의 부모는 샤오제와 그의 부모, 학교를 공동으로 법원에 고소했고 결국 법원은 학교측은 책임이 없고 샤오제와 그의 부모는 쓰쓰에게 10만여 위안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 발표에 따르면, 2021년 9월 어느 날 점심시간, 쓰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자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자리를 지나가던 샤오제는 '장난심'이 튀어나와 몰래 그녀의 의자를 뒤로 빼냈다. 쓰쓰는 앉을 때 부주의로 허공에 앉아 뒤로 넘어지면서 뒤통수가 의자에 닿으면서 바닦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동시에 머리가 아프고 물건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며칠동안 쓰쓰는 여러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선후로 뇌외상, 시야 흐림, 두 눈의 시신경 타박상 등의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 샤오제의 부모는 치료비의 일부를 쓰쓰의 부모에게 지불했다. 결국 쓰쓰의 부모는 샤오제의 부모 및 학교와 보상협상을 이루지 못하자 쓰쓰의 이름으로 그들을 함께 소송해 의료비, 입원급식보조비, 영양비, 간병비, 정신적 피해 위자료 등을 청구하였다. 법원은 이 사건에서 진단증명서, 관련 감정, 의사의 지시 병력을 통해 쓰쓰의 통증, 시력 저하, 시야 흐림 등의 증상이 샤오제가 의자를 뒤로 당긴 권리침해 행위와 인과관계가 있음을 입증할수 있다고 판단했다. 샤오제는 권리침해 행위를 했을 때 만 12세가 되어 그 행위가 초래한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가 쓰쓰의 의자를 뒤로 당겼을 때 이미 그 행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한 것이다. 이 행위는 결국 쓰쓰가 넘어져 부상을 입고 경제적 손실을 입었으므로 샤오제는 쓰쓰가 자신의 불법 행위로 인해 입은 모든 손실을 부담해야한다. 샤오제는 민사행위 능력제한자에 속하기 때문에 그의 보호자인 부모가 배상책임을 져야 했다. 학교 측의 책임인정 관련해 법원은 '쓰쓰와 샤오제가 다니는 학교가 평소 규율교육, 안전관리 등의 책임을 다 했다'고 판단했다. 사고 발생 시 점심 휴식 시간이었고, 각 층마다 한 명의 교관이 관리하지만 중학생은 입학할 때 만 12세가 되어 일정한 규칙 의식과 자기 통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학교 선생님은 사고 후 가장 먼저 학부모에게 학교에 와서 처리할 것을 통지하고 쓰쓰를 데리고 함께 병원으로 갔다. 따라서 학교는 교육 및 관리 책임을 다 한것으로 간주되며 이번 사건에서 배상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최종적으로 광저우시 난사구 인민법원은 샤오제의 부모가 쓰쓰에게 의료비, 입원급식 보조비, 간병비, 영양비, 교통비, 정신적 피해 위로금 등 총 10만여 위안을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샤오제와 그의 부모는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했지만 광저우시 중급인민법원은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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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중국 국난을 돕는 조선의용대 결성1937년 7월 7일,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습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3일이 지난7월10일, 장제스는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들을 초청했습니다. 민족주의 계열의 김구, 좌파 계열의 김원봉, 무정부주의 계열의 류자명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은 두둑하게 지원할 테니 한중 연합 항일전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중화부흥사(中華復興社, 藍衣社) 간사로 일하는 김원봉의 황푸군관학교 동기생 캉쩌도 김원봉에게 한국청년들을 중국군대에 파견해서 군사훈련을 받게 하자고제의했습니다. 김원봉은 신속히 행동을 취했습니다. 긴급히 광저우 등지에서 100여 명의 한국청년을 모집해 1937년 9월, 난징의 중앙군사학교싱즈(星子)분교로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싱즈분교특별훈련반에서 훈련을 시작한지 채 한 달도 안 되어 일본당국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본은 장제스가 외교관례를 깨트리고 비밀히 추진한 일이라고 노발대발항의했습니다. 한인 훈련반은 후베이(湖北)성 장닝(江寧)진으로 옮겨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그동안 일제는 중국의 중부권과 연해지역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장제스는 전민족이 힘을 모아 일제에 저항해야 할 시기임을 파악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선언하여 항일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합법적인 지위를 확보받고 한커우(漢口)에 정치부 사무실을 설치했습니다. 국민당정부가 난징을 떠나 우한으로 피난할 때, 김원봉도 조선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인솔해 우한으로 옮겨갔습니다. 주요도시는 대부분 일제가 차지하고 우한이 유일한 중국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우한은 항일도시로 변했습니다. 국제적인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해방 운동가들이 우한에 집결하여 진심으로 중국이 우한을 보위하기를 희망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정의의검’이라고 불리는 소련공군의용대도 출동하여 일본전투기의 우한공격을 저지했습니다. 1938년 7월 7일, 중일개전 1주년을 맞아 김원봉은 중국항전의 ‘지원군’ 무장부대(조선의용대) 결성계획안을 중국군사위원회정치부에 제출했습니다. 군사전투력은 중앙군관학교장 닝분교에서 훈련을 마친 한국청년 90여 명과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분교에서 훈련을 받은 김구파 한인 청년 92명을 포함해 약 180여명었습니다. 김홍일(金弘壹, 1898~1980)이 이들을 인솔하여 우한의 한중학교에 수용시켰습니다. 장제스는 “조선의용군은 단독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중국군대안에서 활동한다.”, “조선인에 대한 모든 지휘와 명령권은 중국에 속한다.”, “조선인은 정찰과 구호사업에 종사하고 일부는 군대에서 복무하되 군 복무시는 반드시 전구 사령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등의 조건으로 조선의용대성립을 승인했습니다. 1938년10월 10일, 본대와 제1분대, 제2분대로 편성해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했습니다. 김원봉, 김성숙, 류자명, 최창익 등 5명이 조선의용대지도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의용대설립초창기에는 정치부 제2청에 소속되어 캉저가 담당하여 군비처우는 국민당군대와 같았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창립된지 13일 되던 날 일본군이 우한을 점령했네요. 우한이 함락되기 이틀전 조선의용대 제1지대 70여명은 중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일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진행중인 제9 전구 창사(長沙)로 이동했습니다. 제2지대 73명은 제5 전구 리종런(李宗仁, 1891~1969)사령부가 소재하는 후베이성의 라오허커우(老河口)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우한을 떠나기 직전, 조선의용대 2 지대 일부 대원들은 폐허가 된 우한시내의 도로와 벽에 항일표어를 쓰고 플래카드를 걸었습니다. 국민당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 제3청 장궈모뤄(郭沫若, 1892~1978 )가 자동차를 타고 우한을 빠져나갈 때, 우한일본조계지의 주민들은 이미 빠져 나가고 시내는 마치 텅 빈 묘지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의용대친구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아스팔트 도로나 벽에 역청으로 글을 쓰고 어떤이는 사다리에 올라가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궈무뤄 눈길을 끌었다. ‘병사들은 후방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향락을 즐긴다’, ‘병사들은 피와 생명, 장정들은 금 훈장’ 이런 표어 문구는 자신이 어제 작문한 것인데 벌써 벽과 도로에 올라앉아 보는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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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민족혁명당 창당재중 한인 독립운동계는 30년대초까지만 해도 통일된 기구가 없었습니다. 1935년 7월 5일, 김원봉은 난징 중앙대학교에서 한국독립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미주 대한독립당 등 5개 정당을 통합해서 민족혁명당을 창당했습니다. 재중 항일운동계에 있어서 규모가 가장 큰 정당입니다. 김원봉이 레닌 정치학교를 운영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의 몇몇 임시정부 인사들을 민족혁명당 참여를 거부했습니다. 이들을 제외하고 좌우파 재중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거의 집결하여 민족혁명당 인원은 약 500여 명이 되었습니다. 민족혁명당 창당 시 서기장은 김원봉, 조직부 부장에 김두봉(金枓奉, 1889~1960), 선전부 부장에 최동오(崔東旿, 1892~1963), 국민부 부장에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중앙집행위원 이청천(李靑天, 1888~1957) 등 15인과 후보위원 4인, 중앙검사위원 5인 등을 선임했습니다. 당명에 대해 좌파 측은 조선민족혁명당이라고 주장하고 우파 측은 한국 민족혁명당이라고 주장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1936년 초에 이르러 상하이, 난징, 광둥, 난창, 베이징, 만주, 조선 등 요충지에 민족혁명당 지부를 조직하고 지방조직망도 갖추었습니다. 민족혁명당은 삼민주의 역행사로부터 월 2,500원의 경상비 지원 외에도 국민당 정부 및 중국측 요인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실질적인 당운영은 서기장인 김원봉이 장악하고 의열단원들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생, 민족혁명당 당원이 당의 견인 역할을 하는 간부를 맡았습니다. 김원봉이 당권을 장악하고 민족혁명당이 점차 공산주의로 방향으로 운영되자 여타 계열의 인사들이 의열단 중심의 독선적인 운영에 반발했습니다. 1935년 9월, 먼저 지청천(池靑天, 1888-1957) 계열이 김원봉의 독점적 당 운영에 불만을 품고 탈당했습니다. 창당 전부터 노선 문제로 갈등이 컸던 조소앙(趙素昻, 1887~1958) 계열도 9월 25일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하며 탈당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점차 민족 유일한 대당이라는 성격을 잃었습니다. 그런 데다 조선공산당의 최창익(崔昌益, 1896~1957)과 그의 부인 허정숙(許貞淑, 1908~1991)을 비롯해 소련에서 유학한 한빈(韓斌, 1901~1957) 등 사회주의 인사들이 잇따라 조선민족혁명당에 합류했습니다. 원래 이들은 중국에 조선공산당을 설립하려고 중국에 와서 자문을 구하러 소련대사를 방문했습니다. 소련대사가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라고 추천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혁명당을 은신처로 삼고 조선혁명당은 점점 좌파 성향으로 기울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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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김원봉이 기회주의자라고 지적되는 이유1931년 레닌주의 정치학교 3기 학생을 모집할 즈음, 일제가 만주를 점령했습니다. 중국은 일대 위기에 직면하고 첫 과제는 만주를 점령한 일본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중국의 다급한 상황을 직감한 김원봉은 레닌 정치학교학생 모집을 중단하고 곧바로 국민당 정부에 근무하는 황푸군관학교 동창 캉쩌(康澤, 1904~1967)와 텅제(滕杰, 1905~2004)를 찾아갔습니다. 이러한 김원봉 행동에 대해 기회주의자라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실 기회를 잘 잡았습니다. 국민당 정부와 협력해서 항일 투쟁을 할 좋은 기회이니까요. 동창생 텅제는 국민당의 특무대인 역행사(力行社) 서기입니다. 텅제에게 민족혁명당이 국민당과 협력해서 항일운동을 하고 싶다는 의도를 전달했습니다. 텅제가 김원봉의 의견을 수렴하고 김원봉이 인솔하는 민족혁명당의 취지, 구성원 및 활동 상황 등을 장제스에게 보고했습니다. 1932년 5월, 장제스가 김원봉을 초대해 그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김원봉은 중국과 한국의 적인 일본 천왕을 타도하고 한국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 혁명 간부훈련반을 창설해서 단기적으로 혁명 간부를 육성하려고 하는데 국민정부의 재정과 장비, 훈련장소 등 학교설립 지원이 필요하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습니다. 장제스는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 탈환’을 목표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산하에 간부훈련반 5개 대대가 있는데 조선혁명간부학교는 대외적으로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대’로 불리고 내부에서는 ‘조선혁명간부학교’ 또는 ‘의열단 간부학교’로 불렸습니다. 1932년 10월 20일, 난징 교외 탕산(湯山)에 선사묘(善祠廟)라는 허물어져 가는 절을 수리하여 기숙사 겸 이론교육을 하는 교실로 삼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개학했습니다. 학생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밤 9시에 취침하기까지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김원봉이 교장을 맡고 입교생과 교관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월30~40원의 월급도 받았습니다. 일제가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운영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중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여 난징 황룡산(黄龙山) 톈닝사(天寧寺)로 이전했습니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1932년 10월~1933년 4월, 1933년 9월~1934년 4월, 1935년 3~9월, 모두 4년 동안 6개월간의 교육 기간으로 1기 26명, 2기 55명, 3기 44명 등 총 125명 청년 투사를 양성했습니다. 군사교육 외 정치교육으로 삼민주의와 유물사관도 가르쳤습니다. 중국 정부가 1기 졸업생 공작금으로 3만 원을 보조하는 등 4년간 40만 원을 지원했습니다. 1기 졸업생은 2~3명이 한 조가 되어 조선이나 만주로 잠입하여 학생을 모집했는데 윤세주는 평톈(奉天)에서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를 포섭했습니다. 또 김원봉은 부산시 동래에 사는 처남 박문희(朴文熺, 1901~?)에게 신간회 회원이나 동래 노동조합원중에서 5명을 포섭하라고 지시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그 무렵 민족혁명당 본부는 난징 화루강(花露崗)였습니다. 난징 중화문 안 북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화루강이라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 웅장한 절이 하나 있는데 입구 화강석에 ‘妙悟律院(묘오율원)’ 현판이 새겨져 있는 절입니다. 절 문으로 들어서면 양쪽에 있는 2층 누각이 바로 민족혁명당 활동기지입니다. 조선민족혁명당 사람들은 여기에 머물면서 학습반을 개설하고 회의도 했는데 매년 국치일이 되면 하루 금식을 하며 망국의 비애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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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 4일만에 7세 어린이 백폐(白肺) 발견! 중국 여러 지역 마이코플라즈마폐렴 감염자 발생최근 심천의 한 7세 여자아이가 고열이 내리지 않고 심한 기침 증세를 보여 부모에 의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CT 검사 결과 아이가 마이코플라즈마폐렴(肺炎支原体)에 감염되어 폐가 백폐(白肺)로 변한 것을 발견하였다. 아이의 엄마 친여사는 며칠 전 아이가 기침과 열이 있는 여동생과 접촉해 기침과 열이 났고 처음에는 열이 약간 나다가 다음날부터는 고열이 내리지 않고 기침도 심해져 3일째에는 페니실린을 먹어도 효과가 없어 4일째에 입원했다고 말했다. 의사의 검사 결과 아이의 오른쪽 폐 전체가 대부분 백폐로 변했고 폐에 병소가 있어 검사 결과 마이코플라즈마 폐렴 감염으로진단되었다. 마이코플라즈마(支原体)는 바이러스와 세균 이외의 미생물 병원체이다. 소아과 의사들이 말하는 “마이코플라즈마”는 일반적으로 폐렴 마이코플라즈마를 가리킨다. 바이러스와 세균의 중간 영역에 위치하는 미생물이며 직경은 2~5마이크로미터이다. 의사는 마이코플라즈마는 주로 우리의 호흡기 비말을 통해 전파되며 어떤 아이는 1~3일, 어떤 아이는 5~7일 정도의 잠복기를 가진다. 주로 항마이코플라즈마의 치료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지트로마이신(阿奇霉素)과 같은 마크로라이드계(大环内酯类) 약물을 선택한다. 내성이 있는 경우 독시사이클린(多西环素) 치료를 선택할 수 있다. 병원 치료를 받아 현재 여자아이는 위험에서 벗어나 회복 중이다. 최근 전국 여러 지역의 병원에서 마이코플라즈마폐렴 감염 환자가 많이 발생하며 대부분 감염자가 어린이다. 광저우의과대학부속제1병원 소아과 위봉계(卫凤桂) 주임의사는 '마이코플라즈마 감염이 일반적으로 3~7년에 주기적으로 성수기에 달할 것이다'고 말했다. 마이코플라즈마폐렴 감염은 어느 계절에나 발생할 수 있지만, 북방은 가을과 겨울에 유행하고, 남방은 여름과 가을에 유행한다. 만약 남북 지역을 비교하면 광저우는 최근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감염자가 북방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상기 병원체는 세포벽이 없기때문에 페니실린, 헤모글루빈류 등 잘 알려진 세포벽에 작용하여 항균효과를 내는 약물은 '어쩔 수 없다'며 현재 이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백신도 없다. 마이코플라즈마폐렴 감염은 주로 5세 이상의 어린이들이 많이 감염되지만 5세 미만의 어린이도 발병할 수 있다. 주로 비말 및 직접 접촉을 통해 전염되며 잠복기는 1~3주에 달할 수 있으며 잠복기부터 증상 완화까지 몇주 동안 전염성이 있다. 발열과 기침은 마이코플라즈마폐렴 감염의 두 가지 주요 임상 증상이다. 감염 후 환아의 기침은 비교적 심하고 열이 나고 기침이 5일이 넘도록 가라앉지 않으면 반드시 진찰하여 병세가 심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인터넷 정보가 발달하여 부모들의 독학 능력이 뛰어나므로 아이가 병에 걸리면 바로 각종 치료 지식을 보충한다. 많은 부모들이 아지트로마이신이 마이코플라즈마 폐렴 감염에 대처하기 위한 가장 선호되는 항균제라고 들었는데 일부 가정에서는 약을 구입해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가 병에 걸린 후 얼마나 오래 먹어야 할지, 언제 약을 끊어야 할지에 대해 많은 부모들이 막연해한다. 의사는 '아지트로마이신은 확실히 소아과에서 마이코플라즈마 폐렴 감염 치료를 위한 첫번째로 선택하는 약물이다. 왜냐하면 하루에 한 번만 복용하면 되고 하루에 여러 번 약을 먹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의존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항균제 사용은 여전히 신중해야 하며 부모는 절대 임의로 아이에게 추가하여 약을 써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약을 복용하고 약을 중단해야 한다'며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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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개설해놓고 내버려 둔 플랫폼에서 아직도 회원비를 받고 있더라?!최근 베이징의 정 여사는 유쿠 동영상(优酷视频) 앱에 로그인했을 때 회원요금 차감통지를 발견했다고 반영했다. 그녀는 조회를 통해 2018년 8월부터 유쿠는 매월 알리페이에서 15위안의 회원비를 공제(扣费)해 왔고, 5년 2개월 동안 공제한 총 금액은 915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견 당일, 정 여사는 유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회원 권익을 사용하지 않은 기간의 회원비 총 915위안을 환불해달라고 요구했다. 정여사는 2018년 7월 동영상을 올리기 위해 유쿠 회원을 개설했는데, 당시는 맴버십 갱신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 달 이후 유쿠 플랫폼의 맴버십 이용권을 이용하지 않았음에도 유쿠는 매월 정기적으로 요금을 받고 있었다. 정여사는 문제를 발견하고 즉시 회원 갱신 항목을 종료했지만 5년 동안 915위안을 내게 되었다. 정여사는 '자동공제 기간에 유쿠에서 차감을 알리는 어떤 뚜렷한 메시지도 보낸 적이 없었다. 유쿠 동영상 앱을 켜서야 알게 되었다'며 말했다. 그러면서 '유쿠 동영상 앱에 로그인하지 않으면 사용자들은 자신의 매월 돈을 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전했다. 정 여사는 '인터넷거래감독관리방법' 관련 규정, 즉 인터넷 거래 경영자가 자동 갱신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자동 갱신 날짜 5일 전에 뚜렷한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주의를 주어야 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유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5년 동안 자동 공제된 회원 요금을 환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유쿠측은 4월에 한 번 계정에 로그인하고 한 번 검색 기능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정 여사의 5년간 회원 요금 전액을 환불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고, 5개월치만 환불해 줄 수 있다고 답하였다. 정 여사는 회원의 권익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액 환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 유쿠측은 정 여사에게 44개월치 회원비 660위안을 환불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정 여사는 거절했다. 그녀의 거절에 대해 유쿠측은 전액 환불 요구를 진지하게 고려해보겠다고 했고 구체적인 환불 금액은 아직 협상 중이라고 밝혔다. 10월 13일, 유쿠측은 정 여사의 상황이 사실임을 확인했으며 청구가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이미 가입자에게 연락하여 61개월 회원비 전액 총 915위안을 환불해 주며 영업일 기준 3일내에 입금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소비를 하고, 모르고 재계약을 당하는상황에 직면했을 때 법적으로 플랫폼의 책임은 있을까요 소비자들은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절강풍국변호사사무소의 천쑹타오 주임은 '만약 상가가 명확한 통지 없이 돈을 차감한다면 이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지만 플랫폼 측에서는 광고가 위법 광고가 아니라면 플랫폼이 인지한 상황에서 플랫폼이 책임을 져야 하며 나머지 상황은 플랫폼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알리페이는 금액 차감 전에 차감계약서가 있는데, 소비자가 차감 확인사항을 동의 및 체크한 후 알리페이는 비로소 금액을 차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앱은 제목을 주고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할 수도 있다. 소비자가 전체 텍스트를 클릭하지 않고 동의하면 계약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며 자발적으로 취소하지 않으면 차감된다'며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