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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황포군관학교 입학지하공산당 조직은 인력거와 마차를 수리하는최정무에게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때 17세였죠. 너무 의외였습니다. 훌륭한 군관을 양성하는 황포군관학교에 자신이입학한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황푸군관학교에 와서 당시 시대의 위인으로 손꼽는 정치부 주임 저웅언라이(周恩來, 1898~1976), 군사부 교관 예젠잉(叶剑英, 1897~1986) 등을 만났습니다. 최석천(崔庸健, 1900~1976), 양림(楊林, 1901~1936)과 같은 유명한 조선인 교관들도 만났습니다. 황푸군관학교 조선인 학생들은 토요일이 되면, 학교에서 모이거나 광저우 시내 조선인이 운영하는 국숫집에 모였습니다. 국내외 정세와 정치이론을 토론하고 서로의 견해를 털어놓으며 열렬히 토론하는 시간입니다. 황푸군관학교에 입교 후, 최정무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혁명정신도 더뜨거워졌습니다. 마치 자신이 무산계급 전사나 된 듯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중국혁명을 위해 평생토록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받았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학교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7년 4월, 교장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황포군관학교내 공산당을 색출하고 체포했습니다. 군교내 자신이 소속되었던 조직의 교관과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 흩어졌습니다. 이에 항거하기 위해 최정무는 그해 12월,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폭동에 참여했으나공산당 폭동은 3일 만에 무참히 실패했습니다. 문제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자신이 소속된 조직과 헤어진 것입니다. 최정무가 중국에서 의지할 곳은 오직 공산당 조직인데 대오가 분산되니, 마치 고아가 된 듯, 자신의 신분조차 증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하이에 가서 자신을 황푸군관학교에 소개한 공산당 조직을 찾아야 했습니다. 경비가 없네요. 때로는 걸식하고, 날품도 팔아 끼니를 때우면서 꼬박 넉 달을 걸어서 상하이로 가서 당 조직을 찾았습니다. 상하이 공산당 한국지부는 최정무에게 영국 조계지에 있는 자동차 수리 공장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국민당이 공산당원을 색출하는 시기였습니다. 공산당원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과 학살이 강화된 시기인지라 공산당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체포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다. 사상 전향을 하거나 공산당에서 탈퇴하는 자들도 속속 늘었습니다. 최정무와 함께 중국에 온 동지 중 몇 명은 이미 러시아로 돌아갔고, 한 동지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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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러시아에서 온 꼬마무산계급 전사최정무는 황푸군교 6기 입오생이며 혁명한다고 16세에 중국에 와서 평생 중국공산당에 투신한 분입니다. 장시 루이진 중앙소비에트 지역에는 김훈(삐스티) 무정, 최정무, 김홍묵 한인 4명이 활동했는데 그중 한 명입니다. 최정무(崔鼎武, 1910~?)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쌍성자) 하구촌에서 태어난 연해주 이주 한인의 후손입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두 형과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던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어요. 혁명의 덕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집단농장이 생겨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학교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이론을 배우면서 계급사회에 대해 조금 눈을 뜨고 보니, 최정무는 조선 해방과 세계 공산주의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삼형제들은 모여 앉으면 “세계혁명을 논하고 무산대중을 위해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를 토론하고 고민했습니다. 그의 두 형은 공산당에 가입하고 홍군에 입대했습니다. 최정무는 자신의 고민을 이웃에 사는 공산주의자 박우동과 상의했습니다. 박우동은 중국혁명과 조선 혁명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중국혁명에 참여하는 것이 곧 조선 혁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1926년, 중국은 북벌 전쟁에 한창열을 올리고, 망국노 되기를 원치 않는 소련, 중국, 조선의 젊은이들은 국경을 넘어 중국 북벌전쟁에 참가하며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한다고 일러 주면서 상하이 조선공산당 책임자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박우동은 상하이에 가면 그에게 전해주라고 손수건도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16세가 되자최정무는 공산청년단 친구5명과 밀수꾼을 따라 우수리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습니다. 상하이는 빈부격차가 무척 심한 자본주의 사회였습니다. 최정무의 눈에는 상하이가 마치 하나의 지옥처럼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태운인력거를 끌고 거리에는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실업자가 많이 보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많았는데 이들은 마치 남의 나라에 와서 무례하게 행패를 부리는 건달로 보였습니다. 최정무는 박우동이 알려준 여운형의 집을 찾아가 손수건을 전달했습니다. 여운형이그 손수건을 약물에 담그니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정무일행을 소개하는 비밀 편지였습니다. 지하 공산당 조직은 최정무에게 인력거와 마차를 수리하는 곳에 일자리를 찾아 주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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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시간, 8억 위안의 베이징 최고급 호텔 폭우에 훼손 심해7월 31일, "폭우에 휩쓸린 베이징 최고급 호텔"이 검색어에 올랐다. 8월 1일 오후 베이징 시담호텔(北京悉昙酒店)은 여러 공식 계정을 통해 "재난은 지나고 아름다움도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평안을 전했다. 태풍 '독수리' 영향으로 베이징은 이미 여러 날 동안 많은 비가 내렸고, 일부 지역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7월 31일 한 누리꾼은 먼터우거우 탄저사 근처에 있는 산기슭을 따라 지어진 인기 호텔인 베이징 시담호텔 본당이 홍수에 휩쓸려 파괴됐다고 전했다. 8월 1일 오후 6시경, 호텔은 폭우와 홍수가 닥쳤을 때 신속하게 비상 대응 조치를 가동하여 모든 투숙객과 직원들의 안전을 확보했다고밝혔다. 동시에 정부 지원 하에 가장 먼저 하산 통로를 뚫어 손님들이 호텔을 떠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현재 시담의 모든직원들은 모두 무사하며 호텔 로비의 침수와일부 경관 훼손이 심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괜찮은 것으로 밝혀졌다. 2022년에 개업한 베이징시담호텔은일본 국립 조경가인 노무라 칸지가 설계한 로레샤토 중화권의 7번째 회원 호텔로 8 년에 걸쳐 8 억위안이 투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 초기부터 백년고목과 고건축물에 대한 보호를 충분히 고려하여 전체적인 설계는 자연환경과 실내외 경관의 조화로운 융합에 중점을 두었다. 호텔 로비는 반개방식이며청송, 폭포, 천연 성질의 천정민 퇴석과 결합된 자연의 벽을 가지고 있다. 홀의 큰 벽화는 벨기에 예술가들이 현대 회화 기법과 베이징 고법인 경태람 공예를혼합하여 만든 것이다. 호텔은 13개의 기능 구역과 38개의 객실, 17개의 정원이 있다. 식당, 바, 카페, 선수실, 차 공간, 도서관, 헬스장, 요가실, 스파, 수영장, 영화관, 회의실이 갖춰져 있다. 실내에는 전 세계 예술가들의 수공예품과 예술 소장품들이전시되어 있으며, 38개의 객실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의 개인욕조가 설치되어 있다. 영부연(荣府宴)은미슐랭 스타에 이름을 올린 신영기 산하의 프리미엄 레스토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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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실습증명을 허구하는 것도 산업체인으로 발전?여름방학기간에는 대학생들의 인턴십 성수기인데, 많은 친구들이 스케줄 차이, 일자리가 마땅치 않은 등 이유로 인턴십에 참가하지 않는다. "후각이 예민한" 업체들은 이런 비즈니스기회를 발견하고, 검사가 가능한 실물회사의 회사도장(公章), 포토샵으로 만든 가짜 전자 도장 등 수법으로 진짜 또는 가짜 도장 서비스를 제공해 학생들의 인턴증명서를 허위로 만드는 것을 도왔으며, 가격은 몇위안에서 몇백위안까지 다양하며 판매량이 좋은 달에는 6,000여 개를 판매할 수 있다. 현재, 여러 플랫폼에서 은폐 거래 현상이 존재하는데 도장 제작, 증명 제공, 판매 후 재방문 등 완벽한 산업 사슬이 형성되였다. 인턴십은 대학 인재 양성의 관건적인 일환으로 학생들이 기한내에 졸업 인턴십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이 연기된다. 인턴십은 학생의 실천력, 구직능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취업 시장에 진입하여 해당 업종의 인턴십 경력은 구직자의 능력을 채용단위에서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실습을 하지 않고 허위 인턴증명서의 길을 걷는 학생들이 적지 않고 특히 여름철에 수요가 더욱 많아졌다. 모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인턴증명을 구하는 구매자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인턴도장을 찍어주세요', 'XX타입의 직장 도장을 찍어주기 바람, 가격협상 가능' 등 구매청구를 게시했으며 어떤 사람은 30위안의 가격을 표시하고, 어떤 사람은 1,000위안을 지불할 수 있고 9,999위안의 "중금"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광저우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샤오펑은 '여름 방학에 진학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실습은 나에게 아무 소용없고 완전히 시간 낭비이다'며 말했다. 그의 인턴증명서는 모 인터넷 쇼핑몰에서 만든 홍보 회사의 도장을 자신의 인턴증명서에 복사하여 붙여넣었다고 말했다. '15위안을 들여서 한 시간도 안 돼 끝냈어요. 이것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에요. 많은 선배들이 이렇게 한다'며 말했다. 광저우의 모 '쌍일류' 대학 학생 샤오쩡은 공무원 시험 준비로 실습할 시간이 없었다. '여름방학은 황금 시험 준비 기간이다. 저는 기회를 잡으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200위안을 내고 도장을 찍었다. 이 회사는 실제로 존재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학교에서는 보고서를 냈는지 안 냈는지만 볼 뿐 실제 실습 여부는 조사하지 않는다'며 말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 '나는 적당한 실습을 찾아 실무 능력을 높이고 앞으로 취업을 위해 기초를 다지려고 한다. 하지만 전공때문에 일자리가 너무 적다'며 대학원 2학년 우모는 실습을 할 수 없어 결국 인턴 증명을 위조할 수 밖에 없었다. 인턴증명서를 판매하는 상인들은 대개 뻔한 문구로 장사를 하지 않고, '정규도장'의 탈을 쓰고 직인을 위조하는 거래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 쇼핑몰에는 수천 개의 크고 작은 문인, 도장 파는 가게가 있는데 어떤 가게는 첫 화면에 눈에 띄는 위치에 개인 서명 디자인, 도장 제작 서비스만 진행한다고 설명하며 허위 인턴증명서 작성을 거부했다. 또 어떤 점포는 "각종 증명서, 각종 계약서에 필요한 도장을 제작"할 수 있다고 표시하는데 이런 종류의 점포는 월 판매량이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천개까지 나오는 경우가 있고 가격은 구매자의 요구와 도장을 새기는 난이도에 따라 몇 위안에서 100위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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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8위안 항공권을 환불하는데 수수료만 3,310위안? 모 남성: 너무 터무니없어7월 3일 저녁, 양씨는 가족과 휴가시간을 보내기 위해 7월 7일 베이징에서 청두로 떠나는 3장의 항공권을 구입했다. 그러나 7월 4일 저녁, 양 씨는 뉴스를 통해 쓰촨성 여러 지역에 폭우가 지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날 밤 티켓 예약 앱에서 환불을 신청했다. 그러나 총 4,244위안의 항공료를 환불했는데 953위안밖에 입금되지 않았다. 항공사에서 받은 수수료는 3,310위안이였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양씨는 즉시 플랫폼에 신소를 제기했고, 온라인 고객센터에서는 항공사와 확인해야 한다고 피드백을 주었다. 다음날 오전, 양씨는 요금 공제측이 하이난항공 산하의 샹펑항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일 그는 샹펑항공 고객센터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 양씨는 항공권이 3일 안에 재판매될 가능성이 충분한데 항공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3,310위안을 깎았다며 "정말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이런 비정상적인 날씨로 인한 환불은 소비 계약의 각도에서 이해하면 "요금을 깎지 않거나 적게 받거나 해야 하는데 나는 더 많은 요금을 내게 되었다"며 전했다. 양씨는 또한 티켓 구매 게시판의 환불 기준이 눈에 띄지 않아 소비자가 위험성을 완전히 숙지하고 주문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원터치 쇼핑을 하는 습관하에 이처럼 눈에 띄지 않고 심지어 갑에게 이득을 주는 조항은 일종의 소비계약 함정이 아닐까?"라며 '합리적인 환불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항공업계는 이에 대한 통일된 규정이 없으며, 많은 항공사들이 매우 높은 비율의 환불 수수료를 설정하고, 최종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결국 소비자'라고 말했다. 샹펑항공은 '양씨 일행 3명이 플랫폼을 통해 구입한 2023년 7월 7일 베이징-청두 항공편은 V석(6.8% 할인)으로 제공했다'고 밝혔다. 7월 4일, 양씨는 플랫폼에 환불 신청서를 제출했고 클래스 등급 규정에 따라 항공편 예정 출항 시간 72 시간 전(미포함)부터 출항 예정 시간 48 시간 전(포함) 까지 환불 신청 금액의 85% 에 해당하는 환불 수수료가 부과된다. 샹펑항공은 양씨가 열악한 기후 등 특수한 원인으로 환불을 요구한 것에 대해 쓰촨성 기상 소식에 따르면 7월 3일 20시부터 4일 20시까지 쓰촨성 주요 강우 지역은 다저우, 광안, 루저우, 량산, 판지화 5개 시, 주와 의빈 남부, 간쯔시 서남부 일부지역에서 큰비, 폭우가 내리고 강수량은 30~50mm이다. 양씨가 구입한 베이징-청두 항공편은 주요 강우구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항공사는 "특별 날씨에 발권한 항공권의 취소와 변경에 관한 규정(特殊天气下发客票退改签规定”条件)"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샹펑항공은 항공사의 항공권 환불 및 변경 정책은 모두 민항국 규정에 부합되며 수수료에 대한 세율 및 금액은 고객이 구입한 운임의 클래스 등급 및 고객이 변경을 위한 환불을 요청한 시간까지의 항공편 예정 출발 시간 영향을 받으며 OTA 및 항공사 자체 발매 플랫폼 등에서는 탑승자의 구매 단계에서 환불 변경 안내가 제공된다. 결국 양측은 10%의 비율로 수수료로 합의보았으며 7월 10일, 양씨는 회사로부터 추가 환불을 받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회신했다. 항공사는 관련 규정에 따라 환불 규칙에 자세한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항공권 가격 변동은 비행기 좌석, 비행시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소비자는 항공권 구매 시 구매하는 좌석 정보를 최대한 유의해야 하며 좌석마다 대응하는 반환 규칙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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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한국학교 신송훈이사장 장학금 기탁2023년 광저우한국학교의 도약이 여러 방면으로 돋보이고 있다. 이번 7월 본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증진시키고, 학업 능력 향상을 위한 면학 분위기 조성을 독려하기 위하여 신송훈 이사장이 150,130위안을 학교발전기금으로 기탁하였다. 이번에 기탁된 장학금은 2023학년도 1학기 말 고1, 고2에 해당하는 10, 11학년 학생들의 학기 말 국어, 영어, 수학교과목 우수 학생에게 2학기 등록금을 지급하는 신송훈이사장 지정장학금과2023학년도 졸업식에서 초, 중, 고 학교장상을 수상하는 학생에게 총 2만 위안의 우수 졸업생 장학금으로 수여될 예정이다. 2023학년도 성적 장학생의 영예는 10학년 박상윤, 한예림, 11학년 권하경, 김예은 학생에게 주어졌다. 11학년 김예은 학생은 더욱더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다며, 이번 장학금 수혜를 계기로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고 사회에도 기여하는 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번 장학금 기탁 전에도 신송훈 이사장은 이사장에 추대된 이후 2021학년도 졸업식부터 매번 우수 졸업생 장학금으로 2만 위안의 장학금을 쾌척하여왔다. 각각 초등, 중등, 고등 졸업생 중 졸업 사정에서 1등으로 학교장상을 수상하는 학생이 장학증서를 받았다. 신송훈 이사장은 태영 금속 제품 유한공사 대표로 2022년2월 한국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사장 취임 이전부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 자녀교육을 위한 한국학교를 세우는 데 한 마음으로 동참하며 운영위원, 재단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2021년 가을 학교이전 추진위원장을 맡아 2027년 4월 임대 기간이 만료되는 현재 야윈청 교사 이전을 위해 10여 곳의 이전 후보지를 찾아다니며 관련 당사자를 직접 접촉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신송훈 이사장은 광저우한국학교를 중국에서 제일가는 명문 학교로 만들고 싶다며, 학생들의 학업 역량을 길러줄 수 있도록 여러가지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자료제공: 광저우한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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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남성, 바퀴벌레를 머금고 고급 음식점에 10배 배상을 요구해최근, 북경에서 고급 음식점을 겨냥해 갈취하는 사건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바퀴벌레를 머금는 범행수법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남성은 북경 모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바퀴벌레가 음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였다. 음식점은 가게 평판과 고객 식사체험을 고려해 즉시 무료로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정상으로 계산하고 떠났다. 음식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성은 전화 와서 10배 배상을 요구하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 음식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는 것을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말하였다. 이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음식점은 남성과 배상금을 협상하고 그의 요구에 따라 1,000위안을 이체하고 중화담배 한 개비를 주었다. 사후, 가게 셰프의 자세한 관찰하에 ‘바퀴벌레’의 수상한 점을 발견하였는데 즉 바퀴벌레의 모양이 조리해 형성된 것과 달라 즉시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근처 음식점에서도 이런 상황이 발생했으며 모두 한 사람을 지목하였다. 경찰은 용의자 천씨를 체포하고 그의 몸에서 껌병으로 담은 바퀴벌레를 찾아냈다. 천씨는 '일자리도 없고 돈도 얼마남지 않아 이런 방식을 생각해냈다'며 '고향에서 바퀴벌레를 구입하고 조리해 껌병에 넣었고 밥을 먹을 때 다른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을 때 입에 넣고 다시 배터내고 음식에서 나왔다고 말했다'며 범행수법을 자백하였다.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그는 고급 음식점에서 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온라인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으로 배상금을 받았으며 이미 여러번 성공하였다. 현재 그는 갈취(敲诈勒索) 혐의로 형사구속을 받게 되었다. 형법 274조 규정에 따르면, 갈취죄 기준은 금액이 크거나 여러 차례 두가지가 있으며 공사재물(公私财务) 갈취 금액이 2,000~5,000 이상이면 금액이 비교적 크고, 2년 내에 갈취 행위가 3회 이상이면 여러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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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센트(腾讯) 부동산 시장 진출?! 관계자: 공업단지 프로젝트 필요였다최근, 텐센트과학기술(腾讯科技)심천유한회사는 경영항목에 신규 부동산 개발경영(房地产开发经营)과 비거주부동산임대(非居住房地产租赁) 항목도 경영범위에 보충하였다. 텐센트가 부동산에 진출하려는 것일까? 텐센트 내부 관계자는 ‘텐센트에서 부동산 개발 및 임대 경영범위를 신청한 것은 일반 의미상의 부동산업무가 아니라 건설 중인 따찬완프로젝트(大铲湾项目)개발 과정에서 필요한 업무수요을 만족하기 위해서다’며 전했다. 따찬완프로젝트는 텐센트가 자체 사용 산업단지를 핵심으로 동시에 사무실, 부동산 관리(物业), 회의중심, 상업 등 공공 부대시설을 설립하며 이와 같은 부속시설(附属设施)의 개발과 운영은 대외경영과 관계되기 때문에 법규에 따라 관련 자질을 보충해야 했다. 앞으로 텐센트 따찬완산업단지는 심천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업단지이다. 텐센트본부도 따찬완에 옮겨 심천 ‘인터넷+’미래과학기술성(未来科技城) 건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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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소련에서 온 혁명 아가씨 오지숙 - 실현하지 못한 웅대했던 꿈1927년 7월 말, 학교에 음산한 공기가 흘렀다. 7월 15일 우한정부의 정책이 반공으로 돌아서면서 우한분교 교도단과 학생 4천여 명이 무장해제를 당했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학교에는 교도단과 학생 1,700여 명이 남았다. 장파쿠이는 자신의 4군을 2방면군으로 개편하고 학교에 남아 있던 1,700여 명을 자신의 부대로 영입했다. 한인 사관과 생도 200여명은 특별히 갈 곳이 없는지라 대부분 2방면군에 배속되었다. 1928년 7월 말 장파쿠이는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토벌한다는 “동정토장(東征土蔣)”을 선포하고 허룽(賀龍, 1896~1969)과 예팅(叶挺,1896~1946) 사령관에게 선봉대를 인솔해서 구강(九江)에 가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했다. 그러나 허룽과 예팅은 구강에서 장파쿠이 사령관을 기다리지 않고 수하의 군인들을 인솔해서 난창(南昌)으로 가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등 중공 지휘부와 연대해 8월 1일 난창 공산당 봉기를 일으켰다. 7월 31일 저녁, 장파쿠이 사령관은 우한 양호서원(兩湖書院)에 남아있던 2방면군 교도단과 우한국민정부 경호단을 인솔해서 선박 5척에 나눠 타고 장시(江西) 구강으로 출발했다. 장파쿠이는 우창을 떠날 때만 해도 난창에서 공산당원들이 봉기를 준비한다는 것을 몰랐다. 8월 3일 정오, 후속 대원들이 구강에 도착해서야 장파쿠이는 교도단들이 탄 모든 선박을 강 가운데 정박시키고 무기를 압수하고 선박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었다. 이 날 공산당 교도단들이 난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장파쿠이는 원래 반공주의자가 아니어서 자신의 수하에 적지 않은 공산당원이 있다는 것을알고 있었다. 장파쿠이는 교도단들을 집결시키고 공산당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은 보내주겠으니 나오고, 공산당원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부대에 남으라고 명령했다. 공산당조직은 공산당원으로 정체가 드러난 사람은 비밀리 2방면군에서 철수시키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은 당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2방면군에 남으라고 긴급 지시를 내렸다. 교도관들은 며칠동안 배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한인 교도관들 중에도 공산당에 편향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지라 2방면군에 그대로 남았다. 장파쿠이는 장제스를 토벌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광둥(廣東)으로 향했다. 오지숙은 배위에서 저항하다가 공산주의자임이 폭로되어 무기를 압수당했다. 전향하면 동포 교도관들과 함께 광둥으로 갈 수 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동포들과 헤어지더라도 혼자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했다. 동포 교도관들이 배위에서 오지숙을 위한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 아래 있을 고국 강산을 굽어보면서 모두들 죽지말고 살아서 칼을 들고 싸워 이겨야 한다는 강철같은 굳은 결심을 고별사로 대신했다. 이국의 풍운에 새까맣게 그을고 골 깊게 파인 검은 얼굴에 큰 줄기 눈물을 죽죽 흘리며 작별 인사를 하는 동포교관들을 보면서 오지숙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오지숙은 홀로 상하이로 가는 배로 갈아탔다. 배는 마치 망망한 바다에 떠있는 한 조각 나뭇잎 같았다. 황혼이 점점 깊어질 때 품 속에서 생명처럼 간직해 오던 군관학교 졸업증서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키스를 하고 두 조각으로 찢어 바다에 던지고 난간에 엎드려 울고 또 울었다. ‘왜 죄 없는 졸업장을 찢었는가?’ 졸업장을 희생시켰다는 애석한 생각이 들면 ‘졸업장은 우한정부가 추진하는 가치없는 일에 종사한 무의미한 결과물’이며 혁명을 배신한 난징정부와 우한정부가 싫어서 졸업장을 무참하게 희생시켰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한인 교도관들은 국민혁명군 2방면군 2영 5련에 배치되었다. 2영 5련의 중공당 조직 책임자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이었다. 한인들이 광둥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1월 17일 장파쿠이와 광서 군벌간의 전쟁이 발생했다. 용감한 한인 교도단들은 장파쿠이가 정권을 잡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장파쿠이 정책은 곧 공산당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927년 12월, 장파쿠이가 광시 군벌을 추방하려고 자오칭으로 나갔다. 12월 11일 새벽, 광저우 병력이 미약한 틈을 이용해 중국공산당은 광저우정권을 탈취하려고 폭동을 일으켰다. 장파쿠이의 주력군이 곧 광저우를 탈환하여 공산당 봉기는 ‘삼일 천하’로 끝났다. 오지숙과 구강에서 눈물로 석별했던 조선동지 중 90여명이 전사했다. 광둥의 거친 황야에서 의지할 곳 없었던 90명 전사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값없이 죽은 것이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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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소련에서 온 혁명 아가씨 오지숙 - 중국혁명을 동경했던 소녀우한(武漢)군사정치학교(황푸군교 우한분교)에 재학했다는 한국인 수기가 한 편 있습니다. 1932년 8월 발행된 『三千里』 제4권, 8호에 실린 「廣東事變으로 朝鮮軍官九十名戰死記, 武昌女子軍官學校 卒業한 朝鮮人 女子士官 吳智淑 孃 手記」입니다. 이 문장에 대해 편집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광동사변 때에 조선인 군관 90여명이 일시에 전사하였다는 숨기엇든 사실이 이제 함께 출전하얏다가 포로 되여 후년 석방된 당년 28세의 묘령의 오지숙 양의 수기로부터 알니어 젓습니다. 오지숙 양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하야 본명을 「올니까요가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소녀시대에 시베리아에 가서 교육을 밧엇고 그뒤 이동휘의 주선으로 상해로 건너가서 거기에서 다시 여운형 현정건의 조력으로 무창에 이르러 여자군관학교를 2백명 중에서 제17호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맛치고 그러고 곳 여자 사관이 되여서 동료인 90여명의 조선청년장교와 수천의 중국 장졸로 더부러 광동 전장에 출전하엿다가 그만 자기만 적탄에 부상하여 포로가 되고 남은 동지들은 이역만리에서 일시에 명예의 전사를 하엿든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기술을 중략한 곳이 만흐나 그 때 생사를 가치하든 오양의 수기인것 만큼 이 일편의 기록은 실로 귀중한 역사적 문헌이 될 것인 줄 아노라. 아오지숙이름은명단에서누락된것으로사료됩니다. 오지숙이 쓴 문장은 길기도 하고 읽기도 어려워 요약해서 2회 올립니다. (1) 중국혁명을 동경했던 소녀 1926년 오지숙은 중학교 2학년 때 중국혁명이 성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무되어 중국으로 왔다. 블라디보스토크 예루만돕쓰까야라는 3~4백호가 사는 농촌중학교이다. 눈이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토요일, 교실 난로에는 연탄이 타오르고, 칠판 위에는 레닌 초상화, 칠판 양 옆에는 혁명문구와 세계 각국의 생산지표가 여러 점 걸려 있는 교실에서 선생님은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 상황을 보고했다. 광둥혁명군이 북벌전쟁의 깃발을 든 지 불과 몇 달 만에 벌써 난창과 상하이를 점령하여 중국혁명이 곧 승리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중국혁명을 생각하면 오지숙의 가슴은 무거운 납덩이라도 녹일만큼 뜨거워졌다. 그날 밤 부친을 졸라 중국행을 허락받았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1873~1935)가 이웃에 살고 있었다. 이동휘는 상하이 조선공산당원 여운형(呂運亨1886~1947)을 찾아 가라고 소개해 주었다. 오지숙은 교묘하게 소련 국경지대를 넘고 중국의 수이펀(綬芬) 산차거우(山采溝)라는 곳에서 중국행 기차를 타고 하얼빈, 창춘, 펑톈, 판스를 돌아서 닝커우(宁口)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왔다. 여원형이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 여군 모집시험에 응시하라고 추천해주었다. 전국 각 도시에서 중졸 여학생이 500여 명의 지원했는데 그 중 195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합격자가 발표되던 날, 조선청년과 사관생도 수 십 명이 찾아와 축하를 해주고 오지숙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927년 2월 12일 개학식날이었다. 1기생 여군 100여명과 2기 신입생 195명이 넓은 운동장에 줄을 섰다. 단발머리에 군모를 쓰고 회색 군복에 허리띠를 졸라 맨 단정한 여성 교관이 여학생대의 입장을 지휘했다. 그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송칭링(宋慶齡, 1893~1981), 덩옌다(鄧演達, 1895~1931), 왕자오밍(汪兆銘,1993~1944), 장파쿠이(張發奎, 1896-1980) 같은 인사들이 신입생에게 축사하며 훈화를 했는데 그 중 장파쿠이의 간곡한 강연이 오지숙의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 입학식이 끝난 뒤 한 여성단체가 여군들을 황학루(黃鶴樓) 다과회에 초대했다. 쑹칭링은 인사말을 마치고 내빈들을 향해. 우한분교 여군 중 유일한 외국인 오지숙을 소개했다. 매일의 일과는 새벽 5시 기상이다. 15분간 이불을 개서 침대위에 반듯하게 놓고 세수하고 머리 빗고 군복갈아 입고 내무검사를 받는다. 하나라도 제자리에 놓이지 않으면 3일간 영창 구류를 당한다. 내무검사를 받고 아침제조와 사격연습이 끝나면 수업이다. 매일 8시간 역사, 수학, 군사과목 등을 배우고 밤 9시 반 취침시간이다. 쑨원주의는 매일 학습하는 필수과목이고, 매주 월요일 아침이 되면 연병장에서 학생과 1만 명의 군중이 모여 쑨원의 유촉을 외우고 3분동안 묵상하고 상급장교의 훈시를 듣는 특별 의식이 있다. 졸업후 오지숙은 소대장직을 수행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동포동지들이 있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었다. 철군으로 불리는 4군에 동포 교관들이 많았다. 북벌전쟁에서 한인 혁명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싸운지라 국민혁명군 장성들이 서로 한인 교관들을 자기 부대에 영입하려고 애를 썼다. 이에 고무된 한인 혁명청년들은 열광적으로 화북타도를 외치고 내친 김에 조선까지 진출하여 일제를 타도하기를 열망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