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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터 입장료가 2,000위안? 가장 큰 물고기를 3만 위안에 회수?낚시질을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 외에 최근 낚시질을 도박처럼 즐기는 사람도 있다. 강문 신후이(江门新会)의 아청은 ‘지난해 12월달부터 집근처에 낚시터가 생겼으며 대부분은 태래어(罗非鱼)를 취급하였다. 입장료는 1,680위안(약 28만 한화)이고 네시간 낚을 수 있다’며 말했다. 하지만 낚은 물고기를 집으로 가져가는게 아니라 낚시터에서 다시 회수한다. 물고기는 표어(标鱼)와 비표어(非标鱼)로 구분하며 표어의 지느러미에 있는 라벨이 물고기의 회수가격(回收价格)을 대표한다. 비표어 가격은 동일하다. 비표어는 한마리에 100위안으로 회수하며 표어의 가격은 500~2,000위안이며 최고가격은 3만 위안이다. 낚시의 즐거움과 물고기 가격의 유혹에 동관, 중산의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갔지만 기대보다 실망이 컸다. 낚시꾼 아청은 ‘이미 1만 여위안(약 200만원)을 손해보았다’며 말했다. 낚시꾼들은 한마리라도 낚으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물고기를 낚는 성취감도 누릴 수 있어 낚시터를 찾아갔다. 아청이 있는 낚시터단체방에는 78명이 있었는데 직원은 단체방에 낚시하는 동영상을 올렸고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다음 차례 신청자 정보를 올려 주었다. 오전 9시가 넘자 낚시터의 60여개 낚시자리에 이미 20여 명의 낚시꾼이 앉았으며 4시간 뒤에 단지 몇 명만 물고기를 잡아 2,000여 원의 입장료를 만회하였다. 4시간 사이에 낚시터의 수입은 3만 위안이 넘었다. 강문 외에 동관에도 비슷한 낚시터가 있는데 낚시꾼은 ‘낚시터의 입장료는 1,600위안이며 가장 큰 태래어 가격은 3만 위안, 작은 것은 200위안이다’며 소개하였다. 심천에서 낚시하러 온 한 낚시꾼은 ‘지난해부터 낚시하러 왔는데 이미 가족 몰래 몇 만위안을 손해봤다’며 말했다. 중산 모 낚시터 주인은 ‘입장료는 400~800위안이며 60여 마리의 표어가 있으며 가장 큰 물고기 회수가격은 8,000위안이다’며 소개하였다. 그럼 이와 같은 낚시질은 도박에 속하지 않는냐는 질문에 변호사는 ‘고가의 입장료를 받고 값 비싼 표어를 낚시터에 넣은 것은 도박혐의가 있다. 강서 안휘 우후(芜湖) 등 지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여 낚시터 관계자는 도박장개설죄로 입안되었다’며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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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주조선민족협회 회장 김철용 회장 - 광동성 한민족 골프로 하나 되다!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 광주지회 광주조선민족협회 회장 김철용 회장 ■ 고향:길림성 화룡시 I 1975년생 ■ 기업: 스피드물류 / 삼구김치 ■ 골프 구력: 20년 이상 광주의 동포사회는 광동성 각 지역 중에서 조선민족과 한국인의 화합이 가장 좋은 곳으로 평이 나있다. 특히 광동성 동포사회에서 자랑할 만한 전통대회가 하나 있는데 바로 광저우한민족골프대회다. 이 대회는 광주조선족협회와 광주한국인상공회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광동성의 200여명의 조선민족과 한국인 골프애호가들이 함께 모여 우정을 나누며 한민족의 화합을 다지는 대회이다. 그리고 한민족 화합에 큰 기여를 한 광주조선민족 민속축제가 2019년 개최되었는데 이날 행사에는 약 5000명의 관중들과 선수단, 각 단체 인사들이 민족을 불문하고 대거 참석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위상은 물론 한민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장이 마련되어 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크고 굵직한 행사가 치뤄지는 데 숨은 공로자는 바로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광주지회 회장이면서 광주조선족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철용회장이다. 김철용 회장은 1993년, 19살 광주에 첫 발을 딛어 지금까지 광주 토박이로 살고 있다. 광주 발전은 물론 광주 조선민족 사회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 지에 대해서 누구 보다 자세히 알고 있기에 광주조선족협회 회장으로 그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 젊기에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발전해 나간 김철용 회장은 광동에서는 최연소 성공사업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시절이 있었다. 골프 역시 이 시절에 시작했다. 당시 광동성 통틀어 조선민족 중 골프 치는 사람이 30~40명 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2002년 광동성형제골프회 설립 멤버로 활동하며 한달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을 가졌다. 그 후 2004년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가 설립되면서 당시 형제골프회 강문화 초대 회장이 하나골프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정식으로 지역별 골프지회를 설립하였다. 김철용 회장은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 설립초부터 협회 부회장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광주 민족사회에서 활약하면서, 광주골프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광동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를 잡은 조선민족들은 2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일본 비즈니스를 했고, 또 90년대에 광동에 온 사람들이다. 김철용 회장은 일찍이 광동에는 왔지만 일본이 아닌 한국과 관련된 악세사리, 완구 무역과 제조를 하다가 시대의 흐름을 읽고 물류사업에 뛰어 들었는데 이게 성공가도를 달리게 해 주었다. 김철용 회장은 사업이던 골프던 남과 똑같은 방식, 똑같은 시스템으로 경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늘 남다른 혁신과 개발, 역발상을 추구했다. 물류경험이 없었어도 빠른 시간에 업계 선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객의 니즈(needs) 핵심을 파악하고 광동 물류의 특성을 제대로 캐치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한국 15일 물류를 7, 8일로 줄였다가 경쟁사가 동일한 방법으로 따라오면 그는 더 빠른 길을 찾아 3, 4일로 물류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다 보니 고객이 줄을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2000년 초반 <스피드물류>는 물류업계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면서 광동의 물류브랜드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과거 젊은 사업가로 돈 좀 벌었다는 소리를 듣었던 김철용 회장은 월매출이 100만원이었던 지난 날에 많이 벌기도 했지만, 그만큼 쓰기도 많이 썼다고 한다. 늘 위기감을 갖고 신사업을 개척하며 도전하고 보냈기에 누린 것도 많고, 아쉬움도 있지만 지난 일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물류사업과 골프는 먼 거리가 아니다. 김철용 회장은 주로 운동을 하면서 고객접대를 하였고, 자연스럽게 사업에도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그에게 골프는 일이면서 운동이고, 운동이면서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필드를 나가는데, 골프가 제일 재미있었을 때는 막 시작하고 몇 년인 것 같다고 말한다. 골프는 꾸준함이 없으면 바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 비기너들에게 팁을 주자면 일주일에 연습장 3번, 필드 2번 정도를 꾸준히 하다 보면 안정적인 실력을 보장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한다. 덧붙여 필드만 많이 나가서도 안되고 연습장을 꼭 같이 병행할 것을 당부했다. 홀인원 경험은 한 번 있다. 2019년 风神高尔夫(풍신골프클럽), 8번 코스 8번 홀에서 170야드로 굉장히 어려운 코스여서 감히 생각도 못했는데 홀인원이 된 것이다. 구력 20년인데 19년만에 들어간 첫 홀인원 기분은 ‘나도 할 수 있네’ 정도였지 크게 흥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광주골프협회는 회원 단합과 화목을 굉장히 중요시 한다. 현재까지 광주골프협회에 등록된 인원수는 130명이나 정기모임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40명 정도이다. 주중 일정이다 보니 개인사업가는 상관 없지만 기업 임원들은 시간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가 광동성 타지역 협회와 골프 문화가 좀 다른 것은 내기를 하되 원칙이 있다. 게임에서 아무리 잘 친 사람도 그린피는 직접 지불한다. 예를 들어 4명이 내기를 해서 3천원을 땄다면 거기서 그린피를 내고 나머지는 다 돌려 준다. 그리고 꼴찌가 캐디비용과 일부식비를 담당하는 문화이다. 이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과거에는 내기를 좋아하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가 끼리끼리 모이니 화합에도 영향이 있어서 지금은 추첨을 해서 잘치는 사람과 못 치는 사람이 섞이게 한다. 그리고 내기를 해서 딴 돈은 개인 주머니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끼리 사용되도록 건강한 광주골프협회만의 룰을 정한 것이다. 김철용 회장이 생각하는 골프는, 단순한 운동이지만 골프매너가 그 사람의 사업의 위치와 거의 정비례 된다고 생각한다. 사업을 잘하는 사람은 센스가 있고 판단력도 좋기에 사업을 잘하는 사람과 골프를 치면 시작부터 끝까지 상대를 배려해 주기에 유쾌함은 물론 그 사람에게 사업과 골프에 대해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어 매우 유익하다. 전반적으로 사업을 멋지게 하는 사람들이 골프도 즐기며 치고, 내기를 하더라도 돈과 상관 없이 과정을 즐기기에 그들은 감정을 주고 받는 것을 중시한다. 그는 20년간 골프를 쳤는데 시간대 별로 골프를 치는 마음과 태도가 다르다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스스로 ‘나는 매너가 좋고, 멋있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는 70점 밖에 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오히려 지금이 그때 보다 성장했다고 말한다. 또, 김철용 회장만의 골프철학은 골프를 통해서 조선민족의 경제 핵심 인물들이 뭉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가 창립되고 첫 광동성조선민족민속축제를 대규모의 큰 행사로 치르는데 당시 모든 자금이 각 지역 골프협회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만큼 골프협회는 과거나 지금이나 조선민족기업인들의 핵심단체라 볼 수 있다. 골프협회의 회원들은 나름 사업이 안정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사업에 성공을 하였다면 응당 민족사회에 기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게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함)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철용 회장의 골프철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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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동성하나골프협회 동관지회 허영철 회장 - 진정한 성공은 다른 사람이 평가해 준다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 동관지회 광동성하나골프협회 동관지회 허영철 회장 ■ 고향: 길림성 반석시 ■ 기업: 广东永星建设工程有限公司 ■ 골프 구력: 15년 성공한 사람의 보편적인 기준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 돈이 많은 것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과연 부와 명예만이 진정한 성공일까? “성공한 사람은 잘 살고, 잘 웃고,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이다. 순결한 여성의 신뢰와 영리한 남자의 존경과 어린이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태어날 때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놓고 떠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찾으려 하고 그들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_앤더슨 스탠리(Anderson Stanley) 광동성 동관골프협회 제4대(2016~2018) 허영철 회장(吉林省磐石市, 1969년생)은 广东永星建设工程有限公司董事长으로 사업도 잘하고 가정에 충실한 모범 아버지상에 대화를 나눌 때 늘 미소가 함께 한다. 그와 인터뷰를 나누면서 앤더슨스탠리 작가의 ‘성공한 인생’이라는 시(诗)가 떠올랐다. 허영철 회장의 광동 드림(dream)은 30세 나이로, 남들 보다 늦은 감이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광동行 날짜 2001년 4월9일, 천진에 있는 형님집에 놀러 갔다가 가방 하나 메고 무작정 광동을 향한 기찻길에 오른 것이다. 가족이 모두 의사 직업인 엘리트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아버지가 병원 원장으로 있던 고향의 시(市)병원에서 약제사로 근무했다. 안정적인 일자리였으나 반복적인 일상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에 당시 동관 한국 기업에서 근무하던 고모와 연락이 되어 동관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취업을 한 곳이 전자회사였는데 그곳에서 기전관련 기능을 배웠다. 그때 월급이 잔업비까지 합쳐 600원 미만이었다. 회사에서 익힌 기전기술을 바탕으로 2008년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경제공황의 타격으로 회사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하루 사이에 머리가 희어진다는 걸 몸소 느꼈다. 그래도 모 아니면 도라는 마음으로 버텼더니, 2009년 부터 운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그 이튿날 큰 오더가 들어 왔다. 이때부터 회사는 안정을 찾고, 2012년부터 빠른 성장을 해 2019년도까지 연간 매출액 10억원을 거두는 회사로 성장했다. 첫 딸이 출생되면서 그의 사업 성장과 여러 일들이 순탄해지다 보니 딸(허주연)을 복덩이라 생각 안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딸(12살)과 아들(6살)이 있다. 복덩이 딸은 현재 동관시 8명 우수 청소년(东莞市8名优秀青少年) 일원으로 북경 참관까지 다녀온 인재 중에 인재이다. 6살에 가야금을 배웠는데. 8살에 가야금 9급을 통과하였고 전국 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관시 청소년 골프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비거리가 200야드를 칠 정도로 수준이 상당하다. 그는 본인은 한 게 없으며 모든 게 아내의 헌신으로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있다고 겸손해 한다. 허영철 회장이 골프를 시작한 때는 2006년 근무를 하면서 골프채를 잡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골프를 치기 시작한 때는 회사 창업을 한 이후였다. 어릴때 부터 육상선수로 운동을 좋아한 편이라 골프도 매우 익숙하게 좋아하게 되었다. 골프를 시작한지 3년이 안되어 이글을 했었다. 그의 베스트 스코어는 72로 실력자 답게 숏게임에 강하다. 허영철 회장이 생각하는 골프의 매력은 나이가 들어도 평생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술을 마시지 않는 그에게 골프는 비즈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과거에는 접대문화가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났지만 지금은 술보다 골프를 선호하는 접대문화로 바뀌었기에 그에게는 골프가 안성맞춤의 사교 수단이기도 하다. 골프를 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았다고 한다. 골프를 너무 미화하면 안되지만 한 사람의 신용평가는 골프를 한 번만 쳐보면 바로 눈에 들어 온다며, 반대로 골프를 하면서 나의 인품도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골프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많이 연습하고 필드를 많이 나가는 것 밖에 없다고 한다. 기술을 높이기 위해서 한국 코치한테 레슨을 받았는데 확실히 실력이 향상 되었다며, 가능하면 골프 초반에는 반드시 코치의 도움을 받아야 됨을 강조했다. 그의 인생 철학은 ‘밑지는 게 낫다, 큰 데서 말고 작은 데서 믿지는 건 복이다’라는 말을 새기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한테 1전 한 푼 공짜로 얻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허영철 회장 주변에는 많은 후배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고 후하게 베풀며, 이타주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영철 회장이 4대 회장을 역임할 때 동관골프협회의 회원은 꾸준히 늘어 났다. 초기의 십 여명에서 지금은 80명이 되었다. 전임 회장들이 하나하나 쌓아온 성과를 퇴보시킬 수 없었다며 그걸 지켜가고자 노력했다. 매 정기모임의 회원수는 다르지만 평균 30명은 정도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몇 번 안나왔더니 새로운 얼굴들이 많네’ 최근 들어서도 동관골프협회는 새로운 회원이 늘고 있어서 명예회장으로서 매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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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 동관지회 이영춘회장 - 시간과 돈, 골프에 투자할지? 사업에 투자할 지를 잘 판단하라!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 동관지회 광동성하나골프협회 동관지회 이영춘 회장 ■ 고향: 흑룡강성 계동시 ■ 기업: 东莞市雄威玩具有限公司 ■ 골프 구력: 20년 이상 이영춘 회장(1962년생, 흑룡강 계동)은 광동성 동관골프협회 2대회장(2009~2013년)과,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 3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조선민족 사회 발전에 헌신적인 공헌과 기여를 많이 한 공로자이다. 그는 내년이면 환갑을 앞두고 있지만 그냥 봐서는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동안(童顔) 얼굴에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업도 왕성하게 하고 있어 지난해 코로나가 닥쳤어도 그의 사업장은 오더 수주로 기계들이며 일손이 쉼 없이 바쁘게 돌아 갔다. 东莞市雄威玩具有限公司는 완구회사로 이영춘 회장이 1996년도에 설립한 회사다. 그는 92년도에 광동에 첫 발을 들여 오직 완구분야 외길로 근 30년을 오늘까지 일하고 있다. 雄威의 메이드인 차이나 라벨은 전세계 완구시장에 퍼져 나가 있을 정도로 완구 빅브랜드들이 모두 이영춘 회장의 거래선들이다. 완구가 사양산업이라며 전업하거나 포기한 회사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외길 산업으로 한 우물을 파고 있는 雄威는 오히려 세계 완구 오더를 집중해서 받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광동성에서 조선민족 중에 90년대에 골프채를 잡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그 중 한 명이 이영춘 회장이다. 그가 골프와 인연이 된 것은 정말 단순하다. 1998년 동관 펑징골프장(东莞峰景高尔夫球会)이 막 생겼을 때 주변에서 회원권이 싸니까 사라는 권유로 회원권을 사 놓고 골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후에 완구사업 외에 서비스 사업을 병행할 때 지인의 추천으로 골프를 치게 되어, 그의 구력은 펑징골프장과 함께 성장해 왔다. 동관골프협회는 1대 강문화 회장, 2대 이영춘 회장, 3대 김정식 회장, 4대 허영철 회장, 5대 김수국 회장까지 각 3년의 회장 임기로 지금까지 활발하게 조직되어 오고 있다. 동관에서 골프협회가 막 시작할 때는 12명 밖에 안되었으나 3년 정도 지나니 30명 정도로 회원이 늘었다. 회원이 늘면서 협회도 더욱 활성화 되었고 젊은층들도 요즘 많아져서 현재는 8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그는 한 달에 골프약속이 적지 않게 잡히지만, 특히 매주 펑징골프장의 토요일, 일요일 골프모임 만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반드시 참석한다고 한다. 동반자는 펑징골프장 회원권을 오랜 시간 함께 갖고 있는 지인들과 후배들이다. 동관이 제2의 고향인 만큼 골프도 마음 편한 사람끼리 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 그다. 골프를 잘 치면 뭐가 좋은가? 라는 질문에 그는 “내기에서 이기니까 재밌다.”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답을 해준다. 골프에서 내기가 빠지면 재미를 못 느낀다며 어느 정도 긴장감과 승부욕이 있어야 진정한 골프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골프는 사업이 안되면 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사업에 집중해야지 골프를 좋아한다고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과거에도 골프에 빠져 사업을 소홀해서 결국은 사업도 골프도 둘 다 놓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골프는 분명 사치스러운 운동이라고 과감히 말한다. 시간과 돈이 투자되어야 하는데 시간과 돈은 사업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기본이다. 시간과 돈을 골프에 투자할 형편이 되는지? 사업에 투자할 시점인지? 를 잘 파악하며 공을 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젊은이들을 보면 운동할 형편이 안되는데, 기회나 정보를 앞서 생각하며 무작정 필드에 나와서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로 동반자에게 지장을 주거나 운동에 집중하지 못한 모습으로 오히려 운동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을 종종 보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골프는 신사게임이다. 먼저 사업과 골프가 어느 정도는 평행하게 컨트롤을 할 수 있을 때 기본을 갖추고 나와서, 함께 어울리다 보면 좋은 매너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운동의 만족감과 사업적인 도움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에게 골프실력 노하우는 특별한 게 없다. 많은 필드 경험과 다양한 동반자 그리고 내기에서 받는 상처나 동기부여 등이 골프실력에 그대로 반영된다고 한다. 저마다 홀인원 경험담과 스토리는 재미나다. 이영춘 회장은 홀인원을 두 번 했는데 그 두 번의 홀인원이 한 달도 채 안되는 시간에 연이어 하게 되었다. 첫 홀인원은 2020년 12월26일 동관 펑징골프장 C코스 5번홀(160yd) 한 번 하고, 두번째 홀인원은 2021년 1월18일 역시 펑징골프장 D코스 2번홀(165yd) 에서 하였다. 남들은 인생에 한 번도 할까 말까하는 홀인원을 연말연초 두 번이나 하게 되어 2021년도는 대박운수를 기대할만 하다. 홀인원 기념 초청골프 모임은 역시 펑징골프장에서 3월6일 172명이 함께 운동을 하고 저녁파티에는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축하를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웨라벨(Work-life balance)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데 이영춘 회장이야말로 진정한 웨라벨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영춘 회장은 골프는 평생하는 운동으로, 칠 수 있을 때 까지는 늘 즐기고 싶다고 한다. 사업이 지금도 안정적으로 잘 되고 있지만 크게 욕심이 없으며, 아들 딸도 다 커서 각자 독립적인 사업들을 하고 있는 것이 기특하다고 한다. 그는 젊은 날의 고생이 지금의 여유로움을 보상해 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여유로운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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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동성하나골프협회 회장 겸 중국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김관걸 비서장 - 골프는 무조건 잘 쳐야 해!티아골프여행사 김관걸 대표 광동성하나골프협회 회장 겸 중국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비서장 ■ 고향: 길림성 매하구시 I 1970년생 ■ 기업: 티아골프여행사 ■ 골프 구력: 25년 이상 김관걸 회장은 1992년 청년 드림을 꿈 꾸며 심천에 첫 발을 딛었다. 당시에는 통행증이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한 경제특구만의 특별함이 있었던 때였다. 그는 여느 청년 시절과 비슷하게 열정적으로 일을 하면서 천지개벽으로 발전한 심천의 개혁개방의 일대기와 함께 자신만의 자리를 잡아 왔다. 골프 하면 김관걸! 김관걸 하면 골프! 중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비서장, 광동성하나골프협회 5대 회장, 김관걸 회장은 광동성 동포사회(조선민족, 한국인)에서는 일찍이 골프 매니아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운동도 좋아하지만 25년간 골프사업을 꾸준하게 하고 있기에 중국, 한국에서 골프를 좀 친다는 사람은 심천 김관걸 회장을 모를 수가 없다. 심천은 골프 치기에 최적의 날씨와 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는 도시이다. 김관걸 회장이 20대부터 골프채를 잡은 것은 심천에 있었기에 더욱 골프와 인연이 가깝기도 하였다. 90년대 역시 겨울이면 한국, 일본에서 공을 치러 심천이나 주변 남방 도시를 찾아 오는 골프 관광객이 많았다. 당시 김관걸 회장이 무역을 하고 있을 때 거래처 한국 사장이 골프 치기 좋은 곳에 살면서 왜 골프를 안치냐며 골프채 풀세트를 선물로 준 것이 그의 골프인생의 시작이었다. 25년 구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동반자를 꼽으라면 그는 1997년 첫 필드 라운딩 즉 머리를 올려 준 분이라고 말한다. 홍콩영사관에서 근무한 서준석 영사님이 동반을 해 주었는데 게임의 룰은 물론 남의 라인을 밟지 말고, 공을 친 후 빨리 움직여 다음 준비를 해야 하는 에티켓 등 내기를 해도 즐거운 내기로 해야 한다는 아주 세심한 골프 매너들을 하나 하나 알려 준 것이 평생 기억에 남으며, 늘 필드에 나가면 그걸 상기시키게 된다고 한다. 골프가 대중화되면서 정통 골프 매너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아쉬워 하며, 첫 필드 라운딩 동반자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광동성 조선민족 골프모임은 21개 도시만큼이나 매우 많다. 그 중 대표적으로 중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지회를 주축으로 각 지역별 모임이 있고, 하나골프협회가 있는데 이 모임은 400명의 회원들이 3개월에 한 번 광동지역을 순회하며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현재 하나골프협회 5대 회장을 맡고 있는 김관걸 회장은 선대(제1대 강문화 회장/심천, 제2대 이철호 회장/심천, 제3대 이영춘 회장/동관, 제4대 정용택 회장/중산) 회장들의 리더십을 이어 받아 2018년부터 3년 임기의 회장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하나골프협회 정기모임 외에도 5개 지역(광저우, 심천, 동관, 혜주, 중산) 월례회에도 그는 거의 참석을 하여 회원들을 독려하고 후원하며, 모임의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 주고 있다. 김관걸 회장의 성격은 우리 조선민족의 민족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열정 사나이’다. 비즈니스도 골프 업종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수 백번의 행사를 개최하고 참석하는 게 그의 일이면서 일상이다. 그렇기에 골프협회 일이라면 그에게는 하루 삼시세끼 먹는 것과 별반 다른 일도 아니다. 하지만 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차별화를 추구하고 민족사회에 사명을 다하려고 한다. 골프모임은 민족사회 발전에 사명 다해야 해 매 골프행사마다 그 지역 노인협회 어르신들에게 일부러 전통 음식과 공연을 요청드려서 골프 회원들과 어우러져 신명나는 시간을 보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 어르신들도 즐거워 하시며 타지에서 느끼는 우리민족 고향의 향수를 젊은이들과 나누기에 매우 좋아 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회원들의 마음을 담아 후원금으로 감사함을 전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조선어를 배우는 우리 후대들을 위해 주말학교에 후원금을 지원하고 있다. 하나골프협회는 정해진 회비가 없어도 단합이 잘 되어 각 지역 회장과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민족사회 발전을 위해 마땅한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다. 이게 바로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들의 선행문화를 확산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김관걸 회장은 2018년 부터 제6대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비서장을 맡고 있다. 지난 2019년 서울에서 20주년 행사를 치뤘는데 아쉬운 점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보람된 행사였다고 한다. 조선민족이 대한민국 서울에서 골프로 대형 행사를 개최한 것 자체에 큰 자부심을 느꼈고, 우리 민족의 성공한 기업가들이 한국에서 모인 것에도 매우 뿌듯함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6번을 한국에 다녀왔다. 작년은 코로나 때문에 전국대회를 못 치루었고 올해는 10월에 광동성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그동안 전국대회가 20년간 각 도시를 이미 두 번씩은 돌아가며 개최를 하였다. 이번 광동성 개최는 김관걸 회장이 비서장을 맡아 도시별 첫 스타트로 세번째 맞이하는 대회이니 만큼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싶다고 그 마음을 전했다. 코로나 전후의 중국 골프시장의 변화 김관걸 회장의 골프 비즈니스는 세계에서 제일 큰 216홀 미션힐 골프장(观澜湖高尔夫球会)의 중국, 한국, 일본 총판을 맡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한국, 일본 골프관광객이 줄을 섰기에 중국시장은 크게 신경을 안 썼는데, 코로나 후로는 중국 골프시장이 크게 확대되어 중국시장을 전면적으로 키워가고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 전에는 골프 손님들이 주로 그룹, 단체가 많았다면, 현재는 친구, 가족단위의 소규모 모임이 크게 활성화 되고 있다. 그리고 접대 골프로 고위급 인사들이 한 번 오면 보름씩(15일) 있으며 골프를 쳤는데, 이제는 그런 문화가 없어 졌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골프시장은 점점 젊은 세대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며, 움직임에 제약이 있다 보니 시간이 자유로운 사업가들은 모두 골프장으로 모이고 있다. 또, 여성골퍼가 많이 늘어남에 따라 골프패션도 더 세련되어져 가고 있다. 골프가 다양한 연령으로 확산되면서 청소년 골프교육과 골프대회도 꽤 많아졌다. 이런 틈새 시장으로 청소년 골프아카데미가 성행을 하고 있다. 10년전만 해도 학원, 유치원 차리는 게 최고였는데. 지금은 골프 아카데미가 교육사업으로는 최고라고 말한다. 요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골프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골프대회에서 우승. 준우승만 해도 까오카오(高考)에 가점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 대학교에서 골프 전공이 많아졌는데, 그 중 심천대학 골프과가 중국 최초로 가장 오래되었다. 골프장이 전국적으로 줄어들어 과거에는 500개에서 380개로 줄었으며, 심천 역시 18개에서 12개만 남아 있다. 골프회원권이 계속 귀해지는 것은 이처럼 골프장은 줄어들고 회원은 늘고 있기에 회원권 가격은 상승할 수 밖에 없다. 최근 들어 중국도 스크린 골프가 늘어나면서 도시 골프가 활성화 되고 있기에 한국과 같은 골프문화로 자리 잡아 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골프는 무조건 잘 치고 봐야 해 골프는 잘쳐야 하나? 라는 질문에 김관걸 회장은 잠시 주저함도 없이 무조건 잘 쳐야 한다고 대답한다. ‘운동이 끝나면 잘 친 사람이 떠들지, 못 친 사람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며 우스갯말을 한다. 골프를 잘 치면 보통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시간과 돈이 투자한 만큼 실력은 그대로 따라 온다고 말한다. 또한 골프를 잘 하는 사람이 사업도 잘한다고 생각한다. 사업이 안되면 골프는 자연스레 어려워 지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록 비즈니스의 기회를 더 많이 얻는 게 바로 골프의 매력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말을 듣고 나면, 유명 CEO들이 시간을 많이 소모하는 골프를 아무 의미 없이 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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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대형마트의 산좡(散装) 쌀 위에 쥐가 기어다녀?!최근, 중경 모 시민은 쇼셜미디어에 ‘용휘이마트(永辉超市)의 산좡(散装: 포장이 없는 제품) 쌀 위에 쥐가 기어다닌다’는 영상을 올려 온라인에서 주목을 받게 되면서 실검에 올랐다. 영상속에서 검은 쥐는 쌀이 담겨있는 진열대 위에서 기어다녔고 주변 고객들이 상품을 고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쌀 진열대 옆의 벽에는 소방통로에 ‘용후이마트’라는 글씨가 부착되었다. 시민은 ‘앞으로 용후이마트 산좡 쌀을 사지 않겠다. 완전 소름끼친다. 그렇게 큰 쥐를 처리하는 직원이 없었다’며 말하였다. 2월 12일, 용후이마트 전국 고객센터 직원은 ‘영상속 내용이 사실이며 중경 난핑(南坪)점에서 발생한 일이며 2월 10일에 보고를 받았다’며 ‘회사측은 이번 사건을 중시하여 제1시간에 오염된 쌀을 진열대에서 내리고 소독을 진행했다. 그리고 가게 내의 검사과 소독을 추가하였다’며 전했다. 2월 15일, 중경시시장감독관리국은 ‘용후이마트 완다광장 난핑점에 쥐가 쌀 위에서 기어다니는 사건에 대해 이미 입안조사하고 관련 제품을 마트에서 내리고 기타 함께 입고된 제품에 검사를 진행하였다’며 전했다. 용후이마트는 세개 등급(红标店, 绿标店, 精标店)으로 나뉘며 이번 사고발생 가게는 두번째(绿标店) 등급에 속한다. 보도에 따르면, 2022년 11월 30일, 북경, 안휘, 중경 등 시장감독관리국 공식홈페이지에 용휘마트에서 경영하는 제품에 불합격문제가 존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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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챗을 차단당한 70세 노인, ‘위챗 없으면 너무 외로워’최근, 70세 할머니 이씨는 ‘위챗 없으면 너무 외롭다’는 영상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관련 화제도 온라인 실검에 올랐다. 얼마전 이씨는 마트 앞에서 ‘공식계정을 팔로우하고 단체방에 홍보해주면 휴지를 받아갈 수 있다’는 마트직원 소개를 듣고 핸드폰을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개인톡과 단체방에 홍보내용을 보내고 나서 이씨의 위챗은 규정위반이라는 이유로 사용이 차단되었다. 이씨는 울면서 ‘이틀동안 위챗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친구, 동창생들과 모두 위챗으로 연락하는데 만나고 싶어도 연락할 방법이 없다. 평생 사용할 수 없으면 너무 외롭다’며 하소연하였다. 누리꾼들은 ‘많은 노인들은 외로워한다. 젊은 이들에게는 일하고 채팅하는 도구일지 몰라도 노인에게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을 수 있다’, ‘이런 홍보방식은 노인의 사교(社交)을 끊어버렸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49회 중국 인터넷발전상황통계보고》(第49次中国互联网络发展状况统计报告)에 따르면, 2021년 12월 까지 중국 60세 및 이상 노인 네티즌 규모는 1.19억에 달하며 네티즌 전체 비례의 11.5%를 차지한다. 60세 및 이상 노인의 인터넷 보급률은 43.2%가 되며, 즉시통신(即时通信), 인터넷 동영상, 인터넷 정무서비스, 인터넷 신문, 온라인 결제는 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능이며 사용률은 각 90.6%, 84.8%, 80.8%, 77.9%, 70.6%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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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채원개장군 (1) “누가 채원개에게 국방의 의무를 맡겼는가?백범 일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를 먼저 떠나 광주에 도착한 후 이전부터 중국군계통에 복직하던 이준식, 채원개 양인의 주선으로 동산(東山)의 백원(柏園)은 임시정부 청사, 아세아여관은 전부 대가족을 수용케 되었으니……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이준식, 채원개 장군은 누구일까요? 먼저 채원개 장군(蔡元凱, 1895-1974)장군을 소개하겠습니다. 채원개는 1919년 고향은 평안남도 영원입니다. 고향에서 친구들과 삼일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고 탈옥해서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가지 27년간을 독립군에 종사하고 1946년 귀국하여 해방된 조국에서 28년을 살다가 197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채원개 장군에게는 이승만을 탄핵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집정하다가 1960년 정권에서 물러났으니 14년간을 자신이 탄핵한 대통령 치하에서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의 독립운동의 공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죠. 한 때 사단장이었지만 국가보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한 달 5백원 월세집에 막내 손자가 육군피복창에 근무하여 벌어오는 적은 수입으로 가족 4명이 살았습니다. 1963년 제18회 광복절을 기해 새정권이 채원개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려고 했습니다만, 채원개는 유관부서의 통보를 받고 “광복운동에 참가한 것은 후일의 공명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맡겨진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극구 표창받기를 사양했습니다. 이미 68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채원개는 내각사무처장에게 편지를 보내 “광복군 출신유공자 명단에 포함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맡겨진 의무”의 일부를 다했을 뿐이니 이를 다른 유공자에게 돌려주기 바란다”고 대통령 표창수여를 거부하고 과분한 표창장을 반환하고 나니 몸이 가쁜하다고 말했습니다. 1968년에서야 건국국민 훈장을 받았습니다. 기자가 채원개가 살고 있는 부천군 신앙촌을 찾아 갔을 때, 그는 단칸방에 누워 앓고 있었는데, 24세의 막내 아들이 한전 검침원으로 벌어오는 월수입 5천원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채원개는 기자에게 “다 죽게 된 늙은이에게 훈장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자식들에게 직장을 주어 생계에 위협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무렵 건국훈장 수여자 본인은 매월 연금 5천원, 가족수당 1천원(1인당), 간호수당 2천원, 생계수당 2천원씩을 받을 때였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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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채원개장군(2) 대한독립단 군사 훈련 교관구한말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무렵, 채원개는 고향 평안남도 영월군에서 안식일 교회 선교사들이 설립한 의명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라”라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의명이라 이름을 짓고 청교도 정신으로 운영하던 학교입니다. 의명학교를 졸업한 채원개는 1910년 서울 오성학교에 입학했는데 오성학교는 1908년 서북5도의 서북협회 지도자들이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서북협성학교가 전신이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과 민족교육을 표방한 학교입니다. 오성학교가 패쇄되자 채원개는 1915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서 4년간 복무했습니다.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황실보호 명목으로 약 200명을 남긴 조선보병대입니다. 조선보병대에 근무하던 중, 1919년 3ˑ1운동이 발생하여 고향 영원에 가서 고향친구들과 모의하고 군민을 규합하여 3월 28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감옥에서 탈옥한 채원개는 장진과 강계 등지에 잠시 피신해 있던 중 상하이에서 오는 사람을 통해 상하이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정화을 듣고 북만주행을 결심했습니다. 북만주로 가는 길에 통화현 콰이다마오즈(快大茂子) 신흥학교 분교에 들렀는데 조선 보병대 동료 강노국 참교가 교관으로 있었습니다. 강노국이 채원개에게 신흥학교에 남아서 군사훈련을 시키자는 제의를 거절하고 산웬푸(三源浦) 대한독립단 본부를 찾아가서 대한독립단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1872~1922)를 만나 북만주행을 접고 대한독립단 교관으로 입단했습니다. 대한독립단이 조직되기 전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박장호(朴長浩, 1876~1921), 백삼규(白三圭, ?~1920), 조맹선(趙孟善,?~1922), 전덕원(全德元, 1877~1943), 홍범도(洪範圖, 1868~1943) 등이 만주에 정착했습니다. 초창기 만주에 온 의병들은 첩첩산중에 집을 지어 사냥이나 벌목으로 업을 삼고, 쌀이 없어 감자와 콩을 먹고 살면서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장기적으로 항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의병장들은 만주 일대에 분산하여 교민들을 다스리는 한편 정보원들을 국내로 보내 일본의 군사정보를 탐지하고, 주요시설을 파괴하거나 유격전을 펼치고 대한제국을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한일합병 이후 10여 년간 의병 활동은 별 진전이 없었지요. 1919년 삼일 만세 운동이 일제의 군화와 총칼에 무참히 짓밟히자 십여만 명의 1919년 3월 15일, 기회를 기다리며 흩어져 활동하던 의병 지도자들과 유림인사 560여 명이 류허현 산웬푸 시거우(西沟) 대화셰(大花斜)에 모였습니다. 지금까지 의병장들이 산발적으로 운영하던 기존의 향약계, 농무계, 포수단 등을 하나로 통합하고 밀려오는 망명객과 열혈 청년,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 사는 한민족 청소년까지 규합하여 ‘대한독립단’을 결성했습니다. 압록강 대안 남만주는 지리적으로 국내에 유입되는 청년들을 쉽게 흡수하고 또 이들이 국경지대를 교란하거나 국내에 침투해서 유격전을 전개하기에도 유리했습니다. 채원개는 출동 부대 책임자로 독립군 1개 중대를 급편성해서 국내로 진입해서 압록강 변에서 10여 차례 유격전을 전개하며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11월 9일 새벽 영변군 고성면 북쪽 산속에서 일본군과 맞닥뜨려 전투를 벌이다가 채원개는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관뎬현(寬甸縣) 샤오야허(小雅河) 임시기지로 철수했습니다. 기지라고 하지만 병사(兵舍)도, 훈련장도, 시설이 없습니다. 피복이란 바지·저고리 1벌, 배낭 1개, 짚신 1켤레, 두건 1개였으며, 주식은 옥수수와 좁쌀밥, 반찬은 된장과 소금이었고 막사는 산속 숲속에 나뭇가지와 풀로 만든 천막입니다. 채원개는 심산에서 청년들을 훈련해 영원, 창성, 의주, 삭주 등 평안도 일대로 보내고 대한독립단의 국내에서 맹활약을 했습니다. 독립군들은 낮에는 숨어 있다가 야간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대한독립단이 워낙 맹활약을 하니 압록강 일대에서 일제와 협력하던 헌병보조원 면서기 등 친일파들이 관복을 벗고 탈주하여 대한독립단에 가입하는 일도 속출했습니다. 참고자료 채원개, 「자필이력서」, 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년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년 12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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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 13.6km 내리막길에서 37명 사망했다’는 경고표어가 주목받아최근, 절강 타이순현(泰顺县)의 모 도로변에 ‘전방 13.6키로 내리막길에서 37명이 사망했다’는 경고표어 영상이 쇼셜미디어에서 퍼지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경고표어는 235국도 타이순룽징구간(泰顺龙井段)에 설치되어 있었다.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상기 구간에서 총 27건의 중대교통사고가 발생하여 37명이 사망하였다. 한 굽은 길은 ‘죽음의 길’(死人弯)이라는 끔찍한 이름도 있는데 300m도 되지 않는 굽은 길에서 6명이 사망하였다. 현지 공안국 교통경찰 중대장 임광세(林光岁)는 ‘룽징 터널을 나오면 바로 내리막길이며 총 37개 굽인돌이가 있으며 평균 경사도는 3.8%이다. 만약 운전기사가 산간지대 운전경험이 부족하고 현지 도로상황을 잘 모르면 쉽게 교통사고가 발생한다’며 소개하였다. 몇년 동안 발생한 교통사고에서 70%이상의 사고는 대형 화물차 브레이크 고장으로 발생했다. 2016년부터 타이순공안은 내리막길에서 2키로 떨어진 곳에 3곳의 전자알림장치(电子侦察哨)와 경고글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대형 화물차 급수통로를 만들고 24시간 당직인원을 배치해 화물차 브레이크시스템의 급수와 안전 행차주의보를 강화하였다. 2016년부터 내리막길의 교통사고는 같은 시기보다 80% 줄었으며 사망자도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누리꾼들은 ‘내용이 많이 충격적이다’, ‘충격력이 강해야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도로를 개선하는 쪽으로 고려하는 것은 어떤지?’하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