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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혜주골프협회 제9대 회장 김표 회장 - 골프의 배려심, 협회 운영에도 발휘한다!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혜주골프협회 제9대 회장 김표 회장 ■ 고향: 흑룡강성 성화향 I 1975년생 ■ 기업: 惠州市普乐斯吉克商贸有限公司 ■ 골프구력: 2년 이상 혜주골프협회 연 혁 설립년도 : 2010년 7월 제1대 최춘서(2010-2011) 제2대 허명국(2011-2012) 제3대 정장일(2012-2014) 제4대 이용남(2014-2015) 제5대 김문(2015-2016) 제6대 정예호(2016-2017) 제7대 최문철(2017-2018) 제8대 최광(2018-2020) 제9대 김표(2020-2022) 김표 회장은 혜주골프협회 제9대 회장으로 그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 사자성어를 떠오르게 하는 인생이었다. 고향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94년 광동 불산의 한 신발회사에 취직하여 십여년간 직장 생활을 하다 2006년 독립하여 동관에서 신발공장으로 창업을 시작했다. 회사가 꽤 잘 되었는데 2008년도 미국발 금융위기로 월 매출액 10만불이 절반으로 줄고, 800명의 직원은 200명으로 줄게 되었다. 4년 남짓 경영한 신발공장은 빚만 남긴채 결국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재취업을 했지만 직장인 월급으로 빚을 갚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늘 재기의 기회를 연구했던 중 2011년에 친구와 함께 지금의 회사(惠州市普乐斯吉克商贸有限公司)를 설립하였다. 회사는 주로 플라스틱 가공으로 각종 디스플레이 제품을 생산하는데, 산더미 같았던 빚은 회사 설립 7년만에 다 갚았다. 회사가 안정되자 결혼도 하였고 이쁜 두 딸을 낳아 지금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김표 회장에게 혜주는 매우 특별하다. 빚의 더미에서 헤어 나오게 하고, 평생 반려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한 곳으로 그에게 혜주는 출발의 도시, 행복의 도시, 성공의 도시로 늘 감사할 뿐이다. 골프는 2019년 부터 시작해서 이제 2년반 정도 쳤다. 골프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청도에서 골프채를 만드는 친구가 골프채 한 세트를 선물해 줬고, 같이 동업하는 친구가 사람도 사귀고 사업에도 도움이 되니 적극 하라고 추천해서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시작한 골프는 레슨도 안 받고 연습장 두 번 가고, 세 번째 바로 필드로 나갔는데 공이 너무 잘 맞아 첫 필드에 놀라기도 하고 골프에 관심을 더 갖기 시작했다. 평소 여러가지 운동을 했던 운동신경 때문인지 처음에는 120타 이상을 치다가 2년반이 지나고 나니 평균 90~95타에서 맴돌고 있다. 지금까지 베스트스코어는 78타다. 나름 짧은 시간에 골프 스코어를 올리려고, 퇴근하면 집에 가서 골프채널을 열심히 보고 주변의 조언을 늘 경청했다. 또 기술에 부족하다 싶으면 주저없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골프 성적을 올리려고 열을 올렸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골프회 회장을 맡고 나서도 스코어가 100타에서 맴돌자 친구들이 “회장이면 기본적으로 80타는 쳐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놀려서 한 동안 집중해서 골프를 연습했다고 한다. 김표 회장은 2019년에 혜주골프협회에 가입해서 1년을 활동하고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가 회장이 되고는 기존 30여 명의 회원이 점차 늘어 지금은 60명이 되었다. 아직까지 여성 회원은 없고 연령대는 30, 40, 50대로 광동성 분회중에서 평균 연령대가 가장 낮은 협회이다. 한 달에 한 번 정기모임에는 평균 30명 정도가 나오고 있다. 회장을 맡고 나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는데, 경기장에서 성격이 강하거나 승부욕이 강하다 하여 편견을 가지거나 동참을 못하게는 하지 않는다. 이기든 지든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려고 노력하며 분위기가 흐려지지 않도록 항상 중심에서 조율한다. 그리고, 골프가 서툰 친구들이 공이 잘 맞지 않아 한숨을 쉬거나 애간장을 태우면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가끔 그린피를 내주며 격려를 해 주기도 한다. 김표 회장은 남은 임기 2년간 현 회원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활동이나, 예전에 해보지 못했던 일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한다. 혜주에는 탕취안(汤泉), 허우냐오(候鸟), 토우징(涛景), 뤄푸산(罗浮山), 중뤼다오(棕榈岛) 5개 골프장이 있다. 그동안 주로 혜주에서도 가까운 탕취안이나 허우냐오, 토우징에서만 골프를 쳤는데, 앞으로는 회원들과 함께 원정 골프를 계획중이다. 광동성 뿐만 아니라 1년에 한 번 정도는 멀리 성 밖으로 나가 새로운 코스에 대한 도전, 회원들의 힐링과 친목을 더욱 강화하고 싶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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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모 부부, 300만 위안 적금갇고 퇴직생활 시작해 온라인에서 화제최근, 상해 모 부부는 퇴직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아내는 33세, 남편은 43세이다. 두 사람은 직장을 잃은 후 적합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였고 은행에 300만 위안 적금 있고 집, 차 있고 자식, 대출도 없고 양쪽 부모는 모두 퇴직금이 나오는데 매일 힘들게 출근해야 하는가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300만 위안으로 퇴직생활? 농담하는거 아닌가?'는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게획으로 보면 한달동안 재테크 수입 1만 위안 정도, 하지만 재테크는 안정적이지 않고 물가상승, 인플레이션율을 감안하면 300만 위안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회사에서 보험을 내주지 않으면 큰 병에 한번 걸리면 모든 계획이 틀어진다'는 의견을 내놓은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만약 300만 위안 적금이 있으면 일찍 퇴직생활을 하겠냐?'에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퇴직할 때까지도 300만 위안을 적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300만 위안을 몇년 쓸 수 있는가 보다도 중년에 이미 퇴직을 선택할 수 있었던 그들의 뱃심이다. 그들은 40세 나이에 상해에서 집 대출, 차 대출 없이 300만 위안 적금이 있었던 것은 양쪽 부모의 경제적 지원 외에도 그들의 업무능력과 재테크능력을 의미하며 앞으로 닥치게 될 각종 문제 앞에서 초조해 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이다. 2020년 《중국 행복 생활 조사》(中国美好生活大调查)에서는 중국사회에서 년간 수입이 12-20만 위안 미만일 때 수입과 행복감은 직접 연관이 있으며 이 수치를 넘으면 수입이 늘어나도 행복감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요즘에 들어서 그들 부부는 자신들의 생활방식, 생활태도와 매달의 소비를 영상으로 찍어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 사회와의 연결을 실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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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학년도 광저우 한국학교 새학기 첫날 이모저모중국에 있는 광저우한국학교(교장 김성희)는 올해 3월1일 2023학년도의 새 학기를 시작하였다. 우리 광저우교민사회의 중심이자 미래 인재의 요람인 광저우한국학교의 개학날 모습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1 삼일절 기념식 “그날을 기억합니다.” 이번 개학일은 마침 3·1운동 104주년인 뜻 깊은 날로 광저우한국학교에서는 개학식과 함께 2023년 삼일절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학교장을 이하 전교직원과 전교생이 모여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삼일절 노래 제창, 독립만세 삼창을 했는데, 특히 초, 중, 고 학생 대표가 함께 한 독립선언서 낭독은 우리 미래를 이끌어 갈 광저우한국학교 리더들의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기념사에서 김성희 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나간 광저우에서 삼일절을 맞이하는 오늘이 얼마나 뜻깊은 날인지 생각해주기 바라고, 광저우한국학교 우리 학생 여러분이 훌륭한 시민으로 자라나서 우리나라를 더욱 빛내주길 바란다.”며 학생들에게 어떠한 역사적 사명을 갖고 생활해야 하는지 되새겨 보기를 강조했다. #2 새로운 가족을 환영합니다! 올해 광저우한국학교는 초등, 중등에서 모두 11명의 새로운 선생님을 모셨다. 하나고등학교 소속으로 이번에 광저우한국학교에 초빙된 교사 전경원은 부임사를 통해 학교에서 직접 개최한 삼일절 행사에 참여한 소회를 밝히고, 재외국민을 위한 교육기관인 광저우한국학교에서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겠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올해 광저우한국학교에 초등 1학년20명, 7학년(중1 과정) 35명, 10학년(고1 과정) 44명, 총 99명의 신입생이 입학하였다. 10학년 박상윤 학생은 고등학생이 되어 학교생활을 시작하려니 떨리고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수업시간에 배울 다양한 과목들과 평소 관심있던 부분을 연관지어서 발표하고 찾아보고 할 생각에 두근거린다는 소감을 밝혔다. #3 “메타버스”공간에서의 수요시위 참여 104주년 3·1절을 맞아 서울 종로의 평화로와 메타버스(현실세계와 같은 3차원 가상 공간) 에서 동시에 진행된 1585차 수요시위에 정치와법 과목의 수강생들이 함께하였고, 12학년 신수빈 학생은 자유발언자로 참여하여 서울 현장의 참가자들의 함성과 박수를 받았다. <서울 현장에 중계되는 자유발언 모습> <메타버스 공간에서의 수요집회> 메타버스 수요시위 기획단에 참여하여 행사를 기획한 광저우한국학교 교사 한진희는 이번 수요시위 참여를 통해 우리 학생들이 온-오프라인의 연계 활동을 통한 정치참여 기회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밝히며, 앞으로도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삶과 연결된 유의미한 교육활동이 진행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다양한 국경일이나 기림일에 계기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먼 타국에서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부심을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속적인 교육활동을 이어나갈 광저우한국학교의 2023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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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동성하나골프협회 혜주지회 제4대 회장 이용남 회장 - ‘골프가 너무 재미있어 잠이 안왔다’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하나골프협회 혜주지회 제4대 회장 이용남 회장 ■ 고향: 흑룡강성 목단강시 ■ 기업: 大诚兴精密五金(惠州)有限公司 ■ 골프 구력: 14년 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하나골프협회 혜주분회 제4대 회장, 혜주조선민족협회 회장을 역임한 이용남 회장은 평소에도 골프 모임이 많지만 두 개의 중책으로 더 많은 행사와 골프 대회에 초청되어 바쁜 일상을 보냈었다. 이용남 회장이 골프를 처음 시작한 때는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다. 친동생 이성남이 ‘사업을 하려면 골프를 쳐야 한다’고 적극 권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골프를 시작하여 2개월만에 80타를 쳤고, 6개월만에 이글을 두 번할 정도로 골프에 타고난 재능을 갖고 있다. 심지어 머리를 올리러 첫 필드에 나갔을 때 97타를 쳐서 함께 한 동반자들이 ‘골프 신동이 태어났다’라고 격찬을 했을 정도다. 골프를 시작할 때부터 타수도 잘 나오고 주변의 칭찬을 들으니 자연히 골프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한창 골프를 칠 때는 4,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를 이길자가 없다고 자부했는데, 나이 앞에서는 교만할 수 없음을 실감했다. 50대가 넘어가니 확실히 몸이 달라져 골프도 체력이 받쳐줘야 잘 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골프 사랑은 대단하다. 운동량을 늘리기 위해 배드민턴을 했는데 배드민턴을 한 참 치다 보니 손목을 꺾는 운동인 것을 발견하고, 팔을 곧게 펴고 치는 골프와 맞지 않았다. 또한 탁구도 손목을 꺾는 운동이라 골프에 영향이 있어 두 가지 운동을 과감히 버렸다고 한다. 또 골프가 너무 재미 있어서 잠이 안 올 정도였다. 한 번은 한 밤중에 골프 생각으로 조용히 일어나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로 스윙동작을 연습하다가 옆에서 아내가 자다 깜짝 놀라 일어나 한바탕 소동이 있을 정도로 골프 때문에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골프를 잘 치는 비결을 묻자, 골프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정서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급해 하지 말고, 심적으로 자아 통제를 하며, 기분을 항상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공이 안 맞았을 때, 화내기 보다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 어떤 영향을 받았는 지를 조용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팁을 전해 준다. 이용남 회장은 골프가 본인한테 아주 잘 맞는 운동이라고 한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역도선수를 할 만큼 남들 보다 힘이 강했고, 학구열도 굉장히 높았는데, 골프 역시 힘이 필요하고 평소 남들이 치는 걸 보고 연구를 많이 한 것이 골프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골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일가견이 있기에 주변에 골프를 막 배우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어느새 다가가서 코치를 해주곤 했다. 본인이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어떤 동작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안되어 속으로 ‘누가 조금만 가르쳐 주면 바로 알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기에, 비기너들의 속마음을 헤아려 주저 없이 코치를 해주면 다들 고마워 한다고 한다. 이용남 회장은 지금까지 홀인원 2번, 이글 6번을 했다.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플레이는 골프 1년차 때 미션힐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한족 기업가 류사장(温州人)과 골프를 쳤는데, 버디 3번에 마지막 홀이 남았을 때 이글까지 했다. 버디를 한 번 할 때마다 캐디에게 100원씩 주었는데 마지막 이글을 했을 때 200원을 줬더니 캐디가 미안해서 더 받지 않았던, 매우 유쾌했던 플레이로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골프를 시작하기 전에는 인맥이 별로 없었다. 골프를 하고 나서, 훌륭한 조선민족 선배, 후배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한족 기업가들도 만나는 기회가 많아 졌다며 골프를 시작해서 가장 유익함은 역시 만남이라고 강조했다. 혜주에는 5~6천 명 정도의 조선민족이 살고 있다. 과거에는 8천 명 정도였는데, 한국 대기업들이 대거 빠지면서 하청 업체들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원수가 많이 줄었다. 또 혜주가 작은 도시는 아닌데 많이 흩어져 살다보니 단합이 잘 안되어 아쉬웠다. 그래서 이용남 회장은 혜주조선민족협회 회장을 맡을 때, 당시 혜주한국상공회 손종수 회장과 손을 잡고 여러차례 한민족 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그때부터 혜주 조선민족과 한인사회가 자주 교류를 가지며 지금은 한글주말학교에 우리민족 아이들도 함께 공부를 해서 이전보다 더 가까운 소통과 화합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이용남 회장은 대성정밀유한공사 대표로 각종 스프링, 스콜을 전문으로 제조하고 있으며 4년전에는 위 내시경 의료기기를 개발하여 한국에 수출하고 있다. 이 의료기기는 현재 한국 시장의 20%를 장악하고 있다. 골프는 사업이 안정되어야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경제가 받침이 되지 못하면 이어가기 힘든 운동이다. 그도 사업이 안정되기 전에는 무척 좋아하는 골프였지만 자제하며 쳤다고 한다. 또 골프는 신사운동이기 때문에 후배들한테 늘 남들이 운동할 때 말을 삼가하고, 돈 내기를 해서 지더라도 얼굴에 표정을 흐리지 말라고 강조한다. 이용남 회장은 앞으로도 골프는 계속 칠 계획이라며, 사업도 몸이 건강해야 유지할 수 있듯이 스스로 몸이 좋아지는 골프를 영원히 칠 생각이라고 건강한 웃음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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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형제골프회 초대 회장 박용남 회장 - 진정한 골프매니아 가족 중심, 사업 중심형제골프회 초대 회장 박용남 회장 ■ 고향:길림성 룡정시 I 1969년생 ■ 기업:深圳市佳马钟表有限公司 ■ 골프 구력: 21년 천지개벽의 심천 발전이나 광동의 빠른 경제발전 속에는 일찍이 80, 90년대 꿈을 찾아 광동으로 모여든 전국 청년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심천, 광주, 동관, 혜주, 중산 등에는 조선민족 뿐만 아니라 전국의 60, 70后가 오피니언 리더의 중심이 되어 있다. 광동 조선민족 골프 모임의 창시자 박용남 회장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지금은 중국 패션시계 업계에서 선두를 달리며 매출 5억원 이상을 자랑하는 줄리어스(聚利时, Julius) 시계의 중견기업 회장이지만, 그 역시 1988년 청년 드림을 꿈꾸며 심천 기차에 올라 탄 것이 어언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의 고향은 연변 룡정으로 해란강, 일송정, 윤동주 생가와 가까운 곳으로 유명하다. 18살 대학 진학 준비자금 700원을 어머니께 받아 학원으로 가야할 길을 돈 벌 궁리의 준비자금으로 챙겨 심천으로 줄행랑을 쳤다. 박용남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이미 연변일보나 여러 매스컴에 많이 알려 진 것처럼 ‘도전, 인생 역전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골프 시작은 1999년도, 그가 심천에 온지 10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30살에 커피숍을 운영할 때, 우연히 한국인 사장과 인연이 된 것이 골프도 시작하게 되고 시계사업 외길도 걷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시계줄 조립공장, 완구공장 일을 거쳐 연변 무역부 임원, 한국 옷 도매사업, 커피숍 사업 등 그야말로 파라만장한 삶을 살아 왔다. 첫 골프채는 선물받은 것이 있었어도 한 쪽에 진열품으로 세워 놨다가 갑작스럽게 연습장도 한 번 가보지 않고 바로 필드에서 처음 잡았다. 당시 심천 롱강 绿色골프장이었는데 같이 동반한 한국분이 파3에서 170야드의 공을 쳤는데 정말 환상적으로 날아 가는 것을 보고, 첫 라운딩에서 바로 골프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연습장에서 3개월간 매일 집중적으로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필드를 갔는데, “지인들이 필드 몇 번째냐 해서, 두 번째라고 솔직히 말했더니, 나머지 세 사람이 핸디를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 때는 ‘핸디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정도로 골프의 지식이 전혀 없었다”라며 박용남 회장은 골프 초기의 추억을 재미나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들은 개당 50원에 10개씩 핸디를 주더라. 그래서 1500원을 가지고 골프를 시작했는데, 3개월간 연습을 열심히 한 결과인지 90타 이상을 쳤다. 반면 동반자 3명은 다 100타대를 쳐서, 그 날 골프 첫 내기로 몇 천원을 따자 동반자들이 사기골프라며 짧은 시간에 배운 골프 실력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박용남 회장은 골프에 자신감이 붙었고 한동안 골프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골프를 권하며 같이 어울렸었는데, 그 중 이조화라는 친구가 가장 먼저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대회에 참석을 하고 와서, 광동에도 이런 골프회가 세워지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조선 화교인 이조화는 신분상 본인이 설립하기는 적합하지 않으니 박용남 회장이 할 것을 건의해서 2001년 박용남 회장이 초대 회장을 맡아 이조화, 김성걸, 김수, 주호산, 옥경진, 최청림, 임호철, 김철용, 장철호 10명이 정식으로 ‘형제골프회’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이게 바로 광동성 최초 조선민족 골프모임이 된 것이다. 2002년 청도에서 개최된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대회에 광동성을 대표하여 회원중 일부가 참석하였으며, 그후로 전국대회에 매년 참가하였다. 해를 거듭할 수록 형제골프회는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 외에도 조선민족 기업인들이 모이기 시작해 광동에도 우리 민족 단체를 만들자는 마음들이 모여졌다. 결국 2004년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가 결성되고, 제1회 민속축제가 개최되며 광동의 조선민족 역사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하나골프회 모태는 형제골프회로 제3대를 맞이할 때, 이름을 ‘하나골프회’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광동조선민족골프회로 이어오고 있다. 정리하자면 하나골프회는 제1대 박용남 회장, 제2대 전효동 회장(2006년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대회 혜주 개최), 제3대 강문화 회장, 제4대 이철호 회장, 제5대 이영춘 회장, 제6대 정용택 회장, 현재 제7대 김관걸 회장이 맡고 있다. 이처럼 박용남 회장은 골프라는 운동 하나로 골프회 초대 회장에서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 결성까지 조선민족 사회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박용남 회장은 본인의 기여도는 크게 생각하지 않으며 당시에는 “우리민족이 소수민족이라는 서러움을 받지 않도록 뭉쳐야 산다”라는 생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박용남 회장은 2012년부터 싱글을 자랑하는 골프실력을 뒤로 하고 골프채를 잠시 내려 놓았다. 이유는 시계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일과 골프를 병행하기에는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과감하게 골프를 멈추고 사업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운동을 안하니 자연스럽게 조선민족 사회와는 한동안 떨어졌다. 바이어가 30여개 나라에 있어 출장도 많고, 한국에 디자인실이 있다보니 한 달에 한 번은 한국에 있어야 했다. 이처럼 골프할 환경도 안되었지만 골프보다 사업 성장에 재미를 더 붙였다. 그 덕분에 회사는 고속 성장하여 중국 시계업계에서는 제법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골프를 한 동안 쉬었지만 후회는 없으며 잘한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작년에 골프를 다시 시작하였다. 사업도 자리를 잡고, 코로나 여파로 출장이며 바이어 왕래가 없다 보니 골프 생각이 났던 것이다. 골프채를 막 잡았을 때는 100대를 치다가 지금은 80대를 치고 있다. 그리고 한 동안 외부활동을 안하다 오랜만에 조선민족 지인들과 골프를 치면서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나니옛정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다. 그가 작년에 다시 골프채를 잡으면서 12살 아들도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들이 골프에 꽤 흥미를 가지고 향후 프로골퍼를 꿈꾸기에, 실력있는 한국인 골프 전문 교수한테서 레슨을 받고 있다. 박용남 회장은 요즘 하루 건너 골프를 친다. 특히 주말 토요일, 일요일은 무조건 아내와 아들과 함께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2021년 1월2일은 골프를 시작해서 21년만에 사허골프장(沙河高尔夫球场) A6코스, 165야드로 첫 홀인원을 했다. 그날도 아내와 아들이 함께 골프를 치는데 아들이 “爸爸, 进了!进了!” 소리를 지르길래 직접 가서 보니 믿기지 않게 홀인원이 된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아들을 가르치는 교수님 말씀이 “박회장은 특별한 홀인원을 했네요. 타이거우즈도 가족과 함께 홀인원을 못했습니다.”라며 가족 동반 홀인원은 더욱 축복 받는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사업에도 성공한 그이지만 가족을 중시하는 박용남 회장은 진정한 성공사업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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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동성 조선족연합회 명예회장 남기학회장 - 골프는 삶을 행복하게 해 주는 행복도구다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하나골프협회 고문 광동성 오성 골프협회 고문 심천시조선족골프협회 고문 광동성 조선족연합회 명예회장 세계한인무역협회 수석부회장 남기학 회장 ■ 고향: 흑룡강성계서시 ■ 기업: 예지아기술그룹 ■ 골프구력: 13년 남기학 회장의 이름에는 항상 월드옥타(세계한인무역협회)가 따라 다닌다. 전국에서 월드옥타 하면 ‘남기학’이 빠질 수 없고, 남기학 하면 ‘월드옥타’를 뺄 수 없을 정도로 그와 월드옥타의 인연은 매우 끈끈하다. 2009년 월드옥타 심천지회 초대회장을 맡아 강일식 광주지회 초대 회장과 함께 광동성 조선민족 기업인과 한인기업인들을 가깝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실제로 남기학 회장은 본인의 사업도 잘 챙기면서 조선민족 사회는 당연하고 중국 한인사회 및 한국의 많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민족의 자부심과 열정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그는 사업적, 사회적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공헌하였고 한국에서 “대한민국 국가생산성 대상-대통령상”, “한중경제발전 추진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월드옥타 본부 수석부회장으로 세계 한민족의 네트워크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아 사업 뿐만 아니라 한민족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남기학 회장이 골프를 시작한 것은 2003년 중국 골프 붐이 일어날 때 한족친구가 골프채를 사주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2001년 예지아 기술그룹(烨嘉科技集团)을 창업하여 한창 일에 집중할 때라 한가하게 골프를 즐기기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한 때는 2008년 비즈니스로 손님들이 회사를 방문하면서 골프로 접대를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진 시기이다. 골프를 막 치기 시작할 때 미션힐(观澜)에서 코치한테 레슨을 받았는데, 총 10회 짜리 레슨도 바빠서 2개월에 한 번씩 밖에 못해, 1년 반이 넘도록 다 사용하지를 못했다. 그 때는 사업이 급선무라 골프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골프를 잘 치도록 동기부여를 아주 강하게 준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대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전국대회는 대회에 앞서 전국 각 지역 회장들이 모여 회장대회를 먼저 치른다. 그래서 성적별로 팀이 나뉘는데 다들 90대라며 실력이 높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줄만 알고 운동을 시작했는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회장단이 거의 70대를 치는 게 아닌가! 내기로 돈을 잃는 건 고사하고 다들 싱글 실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심한 충격을 받고 코치를 찾아 레슨을 받았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한 동안 골프를 우선순위로 하고 부지런히 실력을 배양하여 드디어 76타의 베스트스코어를 기록하였다. 76타를 친날, 일본에서 새로 사온 골프채로 운동을 했는데 감이 좋았고 운도 따랐다. 그는 속으로 ‘이제 부터 나도 싱글이다’ 라고 좋아했는데 그 실력이 지속적이지는 않았다. 더 잘 치려고 동작을 바꾸고 욕심을 부린 탓으로 본다며 역시 골프는 어떤 스트레스도 없이 마음을 비우고 쳐야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남기학 회장은 2001년부터 회사도, 골프도 꾸준하게 성장시켜 왔다. 그 이면에는 성공기업가의 정신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다’를 실천해 왔다. 그동안 대여섯개 대학교를 거쳤는데, 东北重型机械学院(现燕山大学)电气自动化专业, 哈尔滨科技大学(现哈尔滨理工大学)计算机工程专业,阜新矿业大学(现辽宁工程技术大学)研究生院, 中山大学 EMBA, 延世大学AMP, 长江商学院 EMBA를 연수했다. 거의 3, 4년에 한 번씩 공부를 하며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 왔다. 공부한 곳 중 중국최고경영자과정의 최고봉인 장강상학원(2017년~2019년)에서의 공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장강상학원은 ‘성공할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라,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는 컨셉을 많이 강조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GDP의 20%가 장강상학원의 학생들이 창출해 낸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이 학원의 위상이 대단함을 실제로 느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장강상학원의 네트워크는 중국에서 내로라 하는 인맥을 자랑하기에, 남기학 회장은 이처럼 한민족 사회 뿐만 아니라 중국 주류사회에서의 활동도 부단히 노력했음을 볼 수 있다. 남기학 회장 역시 2008년 하나골프회 창립 멤버로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골프실력 향상을 위해 바쁜 일상에 연습장은 자주 못가지만, 집에서 한국TV 골프 채널을 꾸준하게 보았다고 한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14일간 격리를 할 때 골프를 위한 보람된 시간을 보냈는데, 제한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오직 골프TV를 열심히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골프선수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바로 최경주 선수라고 답한다. 최경주 선수와 직접 만나 운동을 하게 되어 인연이 되었는데, TV에서 본 강한 인상과 달리 실제로 만나보니 말도 재미있게 하고, 상대를 편하게 해 주어 정말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같이 골프를 치면서 손동작을 잡아 주고, 필요한 부분의 포인트를 잡아주었다. 골프를 치면서 이 친구, 저 친구 말을 듣다 보면 내용이 다 다른데, 세계 골프 선수의 코치라 그런지 큰 신뢰감으로 믿음이 갔다고 한다. 내기 골프를 좋아하지만 즐거움이 지나치게 까지는 안한다. 골프에 내기가 빠지면 재미가 없기에 백원 짜리 정도로 하고, 따면 돌려 주던가 식사를 대접한다. 그는 과거 월드옥타 모임일 때도 ‘1000원 이상을 따면 돌려주기’로 룰을 정해 놓았다. 운동으로 돈 잃고, 기분 상할 필요가 없고, 힘들게 번 돈을 굳히 운동에서 낭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골프 매력은 나이와 상관 없이 운동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게 골프가 아닌가 싶다. 건강하기만 하면 80세가 넘어도 칠 수 있다며, 밍샹골프장(名商高尔夫)에서 만난 심천시 제1기 시위서기 부인(당시 84세)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할머니는 보좌관을 동행하여 늘 혼자 와서 골프를 치는데 100야드를 치는 걸 보고 참 대단했다. 동양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령인 여성이 혼자 골프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골프는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아들이랑 주말골프를 즐긴다. 한 번은 셋이 골프를 치다 아내가 홀인원을 한 것이다. 본인은 아직까지 홀인원 운이 따르지 못했는데 아내가 대신 홀인원을 해서 매우 기뻤다고 한다. 골프를 처음 시작해서 지금까지를 돌아 보면, 초창기에는 비즈니스를 위해서 골프를 치려 했고, 중반에는 동반자들이 싱글이 많다 보니 자극을 받아서 열심히 하게 되었다. 지금은 골프에 대한 생각이 좀 더 여유로워 졌는데, 간혹 동반자가 매너가 안 좋으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지만, 푸른 산천에 가서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을 하다 보면 건강에도 좋고 행복감을 느낀다 한다. 또 주변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지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면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게 해주는 것 또한 골프라고 한다. 골프가 없었으면 일상이 어땠을까 할 정도로 그는 지금도 시간만 되면 골프가 치고 싶다며 골프사랑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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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동관골프협회 초대 회장 강문화 회장 - 광동 골프 역사 조선민족 성장과 함께 하다광동성하나골프협회 초대 회장 동관골프협회 초대 회장 강문화 회장 ■ 고향:흑룡강성 할빈시 ■ 골프 구력: 23년 광동의 조선민족 골프모임은 형제골프회로 시작되어 2008년 하나골프회가 창립되면서 정식으로 광동성조선민족골프협회의 모습을 갖춰 대외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초대 하나골프회 회장은 오랜 골프 구력과 동관동호골프회 회장을 역임한 경험이 있는 강문화 회장으로 추대 되었다. 강문화 회장은 광동성에 흩어져 있는 조선민족 골퍼들을 집합하는 데 매우 집중하였다. 어느 조직이든 시작이 일도 많고 체계를 잡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첫 모임을 개최하기 위해 여기 저기서 소개 받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는데, 그때는 위챗도 없는 시절이었다. 일일이 전화를 해 대회 참가를 권유해서 첫 모임에 100명이 모이는 성공적인 제1회 하나골프회 창단대회를 개최하였다. 강문화 회장의 2년의 수고로 광동 골프 모임은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2대 회장으로 당시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 회장인 이철호 회장과 각 지역을 방문하여 조선민족 화합과 골프모임을 조직하여 지역간의 골프 교류회를 확산해 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골프회 회원들은 대부분 기업인들로 사업도 어느정도 기반을 잡아 경제력도 있고, 민족 자부심도 아주 강하다. 따라서 광동성에 크고 작은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 산하 행사에 적극적인 후원을 하며 민족 사업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지금 하나골프회는 후배들이 잘 이끌어 나가고 있다. 강문화 회장은 1982년 하얼빈기술감독국에서 10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다. 그 당시 해외 출국이 쉽지 않았는데 공무원 신분으로 한국을 왕래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안정된 공무원 보다 좀 더 역동적인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1992년 지인의 소개로 심천의 완구 회사로 명성이 있는 한국 기업(정윤완구/正润玩具) 제2공장 총경리로 부임을 받아 왔다. 그 때 월급이 홍콩달러 7000원으로 꽤 높은 대우를 받았다. 이 회사에서 3년을 근무하고 완구 경력이 있는 한국인 지인과 창업을 했다. 1997년도에 동관에 완구공장을 설립하였다. 당시에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대만사람 또는 한족들이었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될 때 1998년 동종 업계 한국 사장님이 골프를 쳐보라는 권유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대만골프협회에 가입하여 2개 모임과 한국골프모임에 주로 참가했다. 그때만 해도 조선민족 골프 모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골프 친지 5년 만에 동관 펑징골프장(峰景高尔夫球场)에서 알바트로스를 했다. 첫 싱글 때도 기억이 생생한데 전날에 배탈이 나서 누워있다가 골프치러 나갔는데, 첫홀에 버디, 두번째 홀에 버디, 세번째 파, 네번째 버디, 다섯번째 내리 버디를 하는 바람에 당시 함께 치던 한국인들이 엄청 놀랐다고 한다. 강문화 회장은 골프를 잘 치려면 ‘한 번 미쳐야 잘 친다’고 말한다. 그동안 세 번의 홀인원을 했다. 2006년, 2007년, 2008년 한 해에 한 번씩 홀인원을 했는데 그 중 가족 모임에서 한 홀인원이 특별했다고 한다. 골프를 일찍이 시작해서 수 많은 대회에 참가를 했다. 그에게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대회는 2005년 연변에서 개최된 전국조선민족기업가골프협회 대회이다. 그는 하얼빈에서 살았기에 조선민족과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골프 하나로 전국에 있는 조선민족 기업가들이 연변에 모여 우리 민족 음식을 맛보고, 그네띄기, 씨름 등 민속 놀이를 하면서 어렸을 때 추억을 되살려 보았다. 참 의미있고 특별한 대회였다. 이 외에도 전국 오성회며 기업가 골프대회에 대부분 참석을 하며 각 지역 조선민족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교류를 하였다. 광동에도 골프를 치는 우리 민족 친구, 아우들이 한 두명씩 늘어 나면서 2006년도에 동관에서 동호골프회를 직접 설립했다. 이때 이영춘 회장도 함께 있었는데 당시 12명이 아주 재미있게 골프를 즐겼었다. 동호골프회가 지금의 동관골프협회이다. 골프를 치면서 한국인, 대만인, 조선민족 등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동안 골프로 만난 사람들 중 대만,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 갔으나 전국골프모임에서 만난 인연들은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그 중 이춘일 고문은 골프도 잘 치지만 지식이 넓고, 판단력도 좋으며, 사회활동도 많이 하여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 명이다. 심천에서는 전우회장이 참 멋지다. 정직하고 솔직해 배울점이 많다. 그리고 이철호 회장은 강문화 회장을 조선민족 사회에 나오게 한 고마운 사람이다. 이처럼 골프는 단순한 운동이기 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어 이만한 플랫폼은 없다고 생각한다. 강문화 회장이 골프를 치면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있다면 거짓 없이 솔직하게, 첫 홀부터 마지막까지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스코어카드에 노예가 되지 말라’는 유명 골프선수 소렌스탐의 말처럼 골프 스코어 보다는 자신과 동반자를 위한 정직한 플레이를 하며 매 홀을 즐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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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동성하나골프협회 동관지회 김수국 회장 - 골프는 동기부여 중요, 구력 7년에 홀인원 3번전국조선족기업가골프협회 광동성 동관지회 광동성하나골프협회 동관지회 김수국 회장 ■ 고향: 흑룡강성 목단강시 ■ 기업: 深圳市禾善贸易有限公司 ■ 골프 구력: 7년 동관골프협회 5대 김수국 회장(흑룡강 목단강, 1974년생)은 올해가 구력 7년차 일 뿐인데, 남들은 한 번도 어렵다 하는 홀인원을 이미 3번이나 한 행운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반자 홀인원은 8번이나 목격한 행운남이다. 첫 번째 홀인원은 2018년2월10일 广州南沙高尔夫球场 山场코스에서 140야드, 9번 아아언, 그 다음달 이어서 두 번째 홀인원은 2018년3월10일 东莞峰景高尔夫球场 C场2号洞에서 145야드, 8번 아이언으로 하고, 세 번째 홀인원은 2020년12월9일 东莞观澜湖高尔夫球场 安妮卡 5号洞에서 150야드, 8번 아이언으로 했다. 세 번의 홀인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홀인원은 세 번째 미션힐(观澜) 애니카 코스를 꼽는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공이 들어 가는 느낌이 바로 왔는데, 세 번째는 공이 떨어졌는데 오르막길이라 바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 가봐서야 공이 세 개만 있고 자신의 공은 홀컵에 있는 걸 보고 매우 짜릿함을 느꼈다고 한다. 홀인원은 운인가? 실력인가? 라는 질문에 그는 “운과 실력 두 가지 모두 필요합니다”라고 답을 했다. 김수국 회장을 골프에 빠지게 한 에피소드가 참 재미있다. 그는 골프를 좋아하기 전 축구를 꽤나 좋아하고 열심히 하였다. 광동에서 특히 심천에서 70, 80, 90년대 동생이나 친구들 중 축구 좀 하는 사람은 그를 모르지 않을 정도로 실력도 대단했다. 매주 축구장이 그의 놀이터였는데, 그렇게 사랑하는 축구를 안하고 골프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축구를 하다 보면 부상은 늘 있는 일인데, 하루는 축구하다 다리를 다쳤는데 늘 같이 운동을 하는 강윤걸 친구가 “축구하다 더 다치지 말고 이제 우리 골프를 치자”라고 제안을 하였단다. 그 때 당시 김수국 회장은 일본 손님들이 있어 종종 골프를 쳤는데, 친구는 한 번도 골프채를 잡아 보지 않았을 때이다. 그래서 “야 나랑 골프 치려면, 연습장 가서 1년은 휘두르고 와라”라며 농담조로 말을 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정말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3개월간 무섭게 연습을 하더니만 머리를 올려 달라는 요청을 하더란다. 그래서 미션힐에서 머리를 올려 주는데 오히려 친구 골프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 김수국 회장도 크게 자극을 받아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골프에 매진하게 되었다. 지금 그 때를 회상하면 강윤걸 친구와 골프 의기투합이 된 날부터 두 사람은 남들 1년 정도 칠 골프를 3-4개월만에 칠 정도로 많이 쳤다고 한다. 그 덕분에 싱글도 2년차에 달성했다. 그의 베스트스코어는 1오버파, 73타이며, 장끼는 벙커 샷, 퍼터이다. 짧은 시간에 필드 경험이 많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은 ‘룰과 매너’를 더 철저히 지키고 싶은 욕심이다. 그리고 그가 느낀 골프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배려심’이라고 한다. 아무리 골프실력이 좋고 운동 경험이 많더라도, 골프는 신사운동이기에 배려심이 갖춰 있지 않다면 진정한 골퍼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배려심’을 말하면서 그동안 골프를 치면서 좋은 영향력을 받은 한 분을 소개했다. 바로 동관골프협회 4대 허영철 회장이다. “허영철 회장님은 매너도 좋고 배려심도 깊고 성격도 좋습니다. 거기에 사업도 잘하시기에 우리 후배들이 존경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며 선배 허영철 회장에 대해 존경심을 전했다. 그가 동관골프협회 5대 회장을 맡은 것도 허영철 회장이 “민족에 대해 애착심을 갖고 하는 일이지 회장 자리가 위대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권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5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김수국 회장은 1996년 심천에 와서 화장품, 시계 케이스를 만드는 일본회사에서 근무를 했다. 당시 제조업이 활발했기에 안정적이긴 하였으나 3년 정도 근무하다 무역에 관심이 많아서 과감히 그 일을 그만 두고 무역을 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광주외무외어대학(广州外贸外语大学)에서 1년 반을 공부했는데 당시 8000원 홍콩달러를 주는 멀쩡한 회사를 포기하고 영어를 뜬금없이 공부하는 것에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 보면 그 때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수국 회장도 없었기에 공부에 매진한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한다. 그 후 2005년 창업을 해서 창업초기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액정필름 분야로 꾸준하게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이 분야에서는 전문기업이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회사나 골프나 꾸준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도전도 좋지만 한 가지를 지속적으로 못해서 결과를 보기 전에 쉽게 포기를 하는데, 한 가지를 꾸준하게 한 사람을 절대 따라 올 수 없다고 말한다. 동관골프협회는 5대(2019~2021) 김수국 회장이 맡고 부터는 회원들도 많이 늘었음은 물론 회원들 평균 연령대도 많이 내려 갔다. 그의 역할은 신입 회원이 들어오면 최단시간 협회에 적응하게 하는 것과 회원간의 단합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회원들이 많기에 동관골프협회는 앞으로 더욱 활기있게 단결이 잘되는 협회로 거듭나리라 믿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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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3월 1일부터 마스크 착용하도록 요구하지 않아2월 28일, 홍콩특구 행정장관 존 리는 '3월 1일부터 모든 장소의 마스크령(口罩令)을 해지하고 실내, 실외 및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공지하였다. 그는 '현재 홍콩의 코로나사태가 컨트롤가능하고, 반등 기미가 없고, 광범위 및 전면 방역 장벽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병원, 숙소, 학교 등 곳의 중점인원이 대량으로 감염되지 않았고 독감과 호흡기감염도 막바지에 들어선 점을 고려해 마스크령 해지를 결정하였다'며 말했다. 하지만 병원 등 고위험장소에서 책임자는 '행정지령'(行政指令)으로 직원 혹은 방문객에게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26일, 마카오특구정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응변센터는 '최근 2개월 동안 마카오의 코로나사태가 안정적이고 세계 각 지역의 방역경험을 바탕으로 27일부터 일반 상황에서 모든 실외 장소에서 마스크착용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전했다. 하지만 의료기관, 병원, 요양원 그리고 대중교통 운전기사와 승객은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며 기타 실내 장소와 교통도구는 주관업체에서 당시 코로나사태 상황, 장소 혹은 교통도구 내의 환기상황, 인원수와 밀도, 활동성질과 지속시간 등 요소에 따라 마스크착용여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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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통 중국선양협의회, 무오독립선언 104주년 기념식 가져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선양협의회는 2023년 2월 24일 오후 3시, 선양해운금강국제호텔에서 제104주년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가졌다. 올해는 특별히 무오독립선언 기념식 10주년을 맞아 식전행사로 특별사진전도 개최했다. 주최 측은 본래 매년 2월 1일에 해왔던 행사이지만, 올해는 중국 춘절연휴 이동과 3년만의 한국방문이후 민주평통 선양협의회 자문위원들이 중국복귀에 어려움을 겪어, 행사 일정이 다소 늦어진 상황에 사전 양해를 구했다. 이날 행사는 식전행사로 무오독립선언기념식 10년사 특별사진전이 있었고, 오프닝공연으로는 사물놀이 공연이 있었다. 민주평통 선양협의회 양남철 회장은 환영인사를 통해, 지난 10년 동안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통해 항일독립정신을 본받고, 하나 되어 통일의 길을 모색해 왔다면서, 이제 다시 새로운 10년을 열며, 완전한 독립인 통일의 그날까지 한민족이 대동단결하며, 오늘의 다짐과 외침을 견지하고 싶은 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가 그 마중물이 되고 초석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최근에 새로 부임한 주선양대한민국총영사관의 최희덕 총영사는 축사를 통해, 교민들에게 신임 안부 인사부터 전하며, 동북 3성지역의 소중한 역사유산인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통해, 민주평통 선양협의회를 중심으로 항일정신을 기리고 나아가 통일운동에도 체계적으로 매진해 줄 것을 기대하며, 선양총영사관도 그 길에 기꺼이 함께 동행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민주평통 중국지역회의 설규종 부의장은 축사를 통해, 선양협의회가 지난 10년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해도 빠짐없이 진행해온 그 열정과 저력에, 진심으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고 치하하며, 무엇보다도 104년 전 무오독립선언문을 통해 외쳤던 우리민족의 <한마음 대동단결>의 기치가 실현되기를 기원했다. 그것이 104년 전, 전 세계 민족대표 39인이 한마음으로 외친 무오독립선언의 기본정신이요, 출발점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 3창, 독립군가로 이어졌다. 올해에는 특별히 낭독자로 하얼빈 자무스, 연길, 대련 등지에서 어린 청소년들이 달려와 선언문을 낭독하여 감동과 의미를 더했다. 이어지는 순서로는 의장표창 전수식, 제10회 한중우호 글짓기대회 시상식, 독립유공자 후손 선물증정식 등이 이어졌고, 마지막 순서로는 특별강연회 무오독립선언기념식을 10년 전에 최초로 기획하여 진행하기 시작한 동북항 일유적연구소 김영식 소장이 강사로 나서, <3대 독립선언 비교특강 및 통일로 가는 길>을 강연했다. 이날의 강연을 통해 김영식 소장은, 3대 독립선언 각각의 특징을 설명한 후, 100년 전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특징으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중꺽마 정신(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는 마음)과 어려울 때 한마음 대동단결, 그리고 체계적 준비를 꼽았다. 그러면서 통일로 가는 길에서도 3대 독립선언의 정신과 철학을 본받아 같은 장점을 만들고 키워가야 한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