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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동안 277개의 상품을 반품하고 고소당해최근, 광동성 주하이 샹저우 법원(广东珠海香洲法院)은 빈번한 반품으로 인한 침해책임 분쟁을 종결했으며 법원은 소비자의 빈번한 반품이 주관적으로 악의적이고 상인의 권익을 침해했다고 인정하였다. 탠탠(甜甜)은 한 플랫폼에 개인 이름으로 뷰티매장을 등록하고 다양한 뷰티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2022년 10월 말, 웨웨(悦悦)는 탠탠의 가게에서 틴트를 주문한 후 반품 및 환불을 요구했다. 탠탠은 반품 소포를 받은 후 틴트가 이미 사용되어 2차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환불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4개월 동안 웨웨는 탠탠의 가게에서 100건 이상의 주문을 했고 277개의 상품을 구매했다. 거의 모든 주문이 물건을 받지 못했을 때 "제품 품질 문제", “배송 오류" 등 이유로 반품 및 환불을 진행하고 “악취가 많이 난다", "보기 흉하다",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렸다", "색상이 이쁘지 않다", "이것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겼다" 등의 댓글을 달았다. 웨웨의 조작으로 인해 탠탠의 가게는 플랫폼으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탠탠은 여러 차례 소통했지만 결과가 없어 샹저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웨웨에게 즉시 악의적인 주문을 중단하고 사과하고 9,000위안의 운영손실을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웨웨는 "손해 배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건을 받지 못해 반품 사유를 임의적으로 선택한 것은 결코 악의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탠탠은 이에 "권리 보호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상품이 배송되지도 않았는데 허위사유로 반품을 신청하여 가게의 평점이 떨어지고 검색량이 떨어지며 신용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주문-환불'을 수백 번 반복하는 이런 악의적인 주문 방식은 엄중하게 나의 합법적 권익을 침해하였다!"고 반박하였다. 샹저우 법원은 "첫 쇼핑 후 반품 및 환불이 거절당하여 피고 웨웨는 원고 탠탠과 '모순'이 발생하였고, 그 후 원고 탠탠의 가게에서 자주 주문을 했고 또 빈번하게 환불했으며 주문횟수와 수량이 많았다. 또한 여러 차례 상품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후에도 여전히 같은 립스틱을 계속 구매하는 것은 더 이상 정상적인 소비자의 행위 특징에 부합하지 않는다. 피고 웨웨가 양측의 소통에서 언급한 '그래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단지 그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그 대처했을 뿐이다" 등의 발언과 결합하면 피고 웨웨가 실제로 쇼핑을 할 의사가 없고, 주관적으로 악의적인 것이 이미 상인의 합법적 권익에 대한 침해를 구성했다. 법원은 "피고 웨웨의 과실정도, 초래한 영향, 권리 침해 기간 및 실제 점포 운영상황을 종합하여 피고 웨웨는 악의적인 주문행위를 즉시 중단하고 서면으로 사과하고 사과내용을 원고 탠탠이 운영하는 개인 점포 홈페이지에 반년 동안 공개하고 탠탠의 경제적 손실 2,000위안을 배상할 것"을 판결했다. 우리는 온라인 구매에 익숙해졌고 또한 소비자권익보호법에서 “일주일 이내 무조건 반품"(七天无理由退货)에 능숙하여 자신의 권리를 보장하고 쇼핑 체험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민법전>> 제132조에도 민사주체는 민사권리를 남용하여 타인의 합법적 권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소비자로서 이성적으로 소비하고 성실하게 신용을 지켜야 하며 온라인 구매 시 실제 쇼핑 체험에 따라 적절한 반품 및 환불 방식을 선택해야 하고 불합리한 주문, 반품 조작 또는 악성 댓글을 통해 상인의 운영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상인에 대해 권리침해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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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 모 회사 “4일 근무제” 시행으로 온라인에서 화제최근인터넷에 심천의 모 과학기술회사의 "작업 및 휴식시간 조정 통지" 캡처 사진이 떠돌았다. 내용에서 회사는 4일 근무제를 실시할 것이며 매주 수요일은 유급 휴가를 실시하고 급여 및 기타 복리후생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누리꾼들의 부러움을 샀다. 11월 23일, 회사 책임자는 '회사에는 자신을 포함한 6명의 직원이 근무시간에 일을 모두 처리할 수 있다'며 '어제(수요일) 첫날 쉬는 날 모두 데리고 낚시를 갔다'고 말했다. 직원들이 아이를 돌보는데 편리하도록 10시에 출근하도록 규정하하였다. 심천시천일시신과학기술유한회사(이하 천일시신이라 약칭함)이 서명한 공지는 '직원의 업무 효율성과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 회사경영진의 연구 및 결정을 거쳐 당사는 11월 20일(월요일)부터 4일 근무제를 시행할 것이며 급여 및 기타 복리후생은 변하지 않는다. 법정주말 2일 휴무를 제외하고 모든 직원은 매주 수요일 유급 휴무이며 추가 근무는 권장하지 않는다. 업무가 있는 경우 딩딩(钉钉) 신청 및 승인을 거쳐 조정할 수 있다. 근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30분으로 16:30으로 조정한다'고 밝혔다. 톈옌차(天眼查)에 따르면 천일시신은 2016년에 설립된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중소기업이다. 회사 대표 서씨는 '회사의 주요 업무는 일부 외국 회사의 자재 구매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예전 근무시간은 오전 8시반부터 오후 6시까지였는데, 사실 정해진 시간 안에 직원들이 일을 끝낼 수 있고, 기본적으로 휴대폰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나중에 보니 회사에 저 빼고 모두 아이가 있어서 직원들이 아이를 돌보는데 편의를 주기 위해 출근 시간을 10시로 조정했고, 오후 4시가 넘으면 일찍 퇴근할 수 있다고 말해줬고 후에는 아이들 유치원 하원시간을 시간에 맞추게 됐다'며 전했다. 그러면서 "회사는 6명밖에 안 되는 작은 회사여서 이렇게 안배할 수 있어요. 굳이 사무실에서 일 할 필요가 없어요. 다들 회사를 집처럼 여기고 회사밖에서도 업무를 잘 처리해요. 모두가 사업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데 출근시간을 어떻게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22일, 수요일이자 새 규정 시행 첫날 서씨는 직원들과 함께 낚시를 갔다고 밝혔다. '낚시할 때 구매관리자의 전화는 끊기질 않았고 해외업무를 담당하는 동료도 컴퓨터를 가지고 다닌다. 통지가 누구에 의해 인터넷에 올라왔는지 모르며 언론사에서 올린 내용을 확인하는 거래업체도 있었다. 사실 4일 근무제를 실시하는 회사도 꽤 많다'며 말하였다. 최근 나이키 중화권(耐克大中华区), 러스(乐视), 씨트립(携程) 등 여러 회사가 비슷한 탄력근무제도를 적용해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키 중화권담당자는 '새로운 혼합근무방식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금요일에는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명했다. 러스(乐视)측은 '주 4.5일 근무제를 시행한다. 특히 매주 수요일마다 탄력적인 0.5일 근무제를 시행한다. 출근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5시간 연속근무로 조정되어 규정에 부합된다'며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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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합포 바이러스”(合胞病毒)는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예방해야 할까?베이징시 질병통제예방센터 부주임 왕취안이(王全意)는 '아동병원과 소아연구소의 외래 진료 상황을 보면 현재 폐렴 마이코플라즈마의 유행 강도는 이미 아동 호흡기감염병 4위로 떨어졌고 순위 1~3위는 인플루엔자(流感), 아데노바이러스(腺病毒), 호흡기 합포 바이러스(合胞病毒)이다'며 소개했다. 또 호흡기 병원성 모니터링결과 현재 베이징시 전체 인구의 호흡기감염병신고 건수의 1~3위는 인플루엔자, 라이노바이러스(鼻病毒), 호흡기 합포 바이러스이다. 호흡기합포바이러스란 무엇인가? 감염 후 어떤 증상이 있는지? 어떻게 예방해야 할까? 베이징 아동병원 순이부아병원(北京儿童医院顺义妇儿医院) 질병통제과 부주임 의사인 탕즈차오(唐智超)는 '호흡기합포 바이러스는 전 세계적으로 5세 미만 어린이의 급성 하기도감염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바이러스 병원체'라고 소개했다. 호흡기 합포 바이러스 감염은 영유아의 바이러스성 호흡기 감염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으로 어린이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며 특히 미숙아, 선천성 심장병 또는 원발성 면역결핍이 있는 영유아에게 더 심각한 질병을 유발한다. 감염 후 어떤 증상이 있을까? 베이징 아동병원 순이부아병원 소아과 부주임인 쑨쉐메이(孙雪梅)에 따르면 ‘호흡기합포 바이러스 감염은 영구적인 면역을 생성할 수 없으며 감염 후 임상 양상은 매우 다르며 증상이 경미한 상기도 감염이나 중이염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심각한 하기도 감염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어린이의 나이, 기저 질환, 환경 노출 요인 및 과거 호흡기 감염 이력과 관련이 있다. 발견 후 반드시 제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소개했다. 아동의 초기 호흡기합포 바이러스 감염은 대부분 상기도에 국한되며 임상적으로 코막힘, 콧물, 기침 및쉰 목소리와 같은 상기도 자극 증상으로 나타난다. 검사하면 코 점막, 인두, 구형 결막, 고막 등에서 충혈, 부종 등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종종 발열이 동반된다. 하기도 감염은 주로 모세기관지염이나 폐렴으로 나타나며 영아 및 2세 미만 어린이에게 많이 나타나며, 일반적으로 발열, 코막힘, 콧물 등의 상기도 감염 증상이 2~4일 정도 있으며 그 후 하기도 증상이 빠르게 나타나 기침, 천식, 호흡곤란, 섭식곤란 등이더욱 악화된다. 호흡기 질환 외에도 호흡기합포 바이러스 감염은 심근 손상, 우심기능 부전, 치사성 간질성 심근염, 중증 부정맥 심지어는 심부전, 중추무호흡증, 간질 등과 같은 다른 전신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호흡기합포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하고 비말과 바이러스에 감염된 물체와의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다. 때문에 환아의 보호자들이 동시에 감염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성인 감염의 초기 증상은 일반 감기와 비슷하며 발열, 기침, 재채기, 콧물 등의 증상이 나타나며 갑작스러운 발병이 자주 발생한다. 바이러스가 빠르게 증식하고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이어지면 3~5일 이내에 호흡곤란 등 호흡기 감염이 나타날수 있다. 베이징 아동병원 순이부아병원 질병통제과 부주임의사 탕즈차오는 '호흡기합포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려면 기침예절 등 위생 습관을 길러야 하며, 손위생에 주의하며 비누로 손을 씻거나 알코올을 함유한 용액을 사용하여 손을 씻어야 한다'고 소개했다. 고위험 영아의 경우 노출을 최소화하고 고위험 보육시설에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가아동의학센터 주임, 베이징아동병원 원장 니신(倪鑫)은 '아동의 체육 단련을 강화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동시에 건강한 식습관을 길러 면역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부서는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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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5) 한·중지식인 연대 구축1925년8월 유기석은 친구 심여추와 파진(巴金, 1904~2005)을 찾아갔습니다. 바진은 심여추가 소개한 北海沿 東興公寓에서 묶으면서 베이징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숙박객이 많지 않고 정원에는 회화나무 거목이 있는 아파트인데 바진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심여추)는 조선인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동향의 친구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더웠지만 청명한 달밤이었다. 우리들은 정원에서 바람을 쐬었다. 심(沈)은 아주 점잖은 사람이었고 같이 온 그의 친구(유기석)는 참으로 정열적이어서 나에게 수많은 조선인 애국지사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는 모습을 도도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조선 인민의 고난에 찬, 그러나 용감한 투쟁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조선인 혁명가에 대해 나는 시종일관 경의를 품게 되었다." 1926년3월 27일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國民日報』의 부간 「覺悟」에 바진이 쓴 한 통의 공개편지가 실렸습니다. 『高麗靑年』은 유기석과 심여추가 세계 각 민족의 공존공영을 기대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1926년3월 고려청년사를 조직하고 발간한 주간지입니다. 바진은 ‘L’군의 부탁으로 베이징의 고려청년사(高麗靑年社)가 창간한 주간지『高麗靑年』발간을 지지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밝히고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작년 베이징에서 고려 친구 ‘S’와‘L’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고려 민중운동의 상세한 상황을 자세하게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특히‘L’군에게 감사한다. 고요한 밤, 밝은 달이 하늘에 높이 걸려 있던 날, 그는 고려 민중 악전고투의 전경(全景)을 자세하고도 격분에 차서 제 눈앞에 펼쳐 보여주었다." 또 "유 군은 '우리들의 고투 진상을 중국 민중에게 알려 주십시오' 당신들이 스스로 간행물을 출판하여 우리 고투의 진상을 중국 민중이 알게 하면 그들이 이러한 정신에 감동할 것이며 잠에서 깨어나 각성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편지 말미에 강조했습니다. 1925년 말을 전후하여 유기석은 조양대학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고향에서 보내오던 학비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南, 1900~1930)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중국으로 왔습니다. 안정근(安正根, 1885~1949)이 안창남을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의 군벌 옌시산(阎锡山, 1883~1960)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유기석은 안창남의 통역을 하면서 옌시산 부대에 입대하여 일 년 정도 비행기 조종 기술을 배웠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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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4) 반일학생으로 낙인이 찍히다유기석은 반제국주의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반일 학생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1925년5월30일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하던 학생과 노동자들이 사살되고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베이징에서도 몇 차례 민중대회가 열렸습니다. 베이징 조선 유학생회도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하여 유기석이 기안한 전단 5천 부를 인쇄했습니다. 6월30일, 천안문광장에서 거행된 군중대회에서 베이징 조선 유학생회 대표 유기석이 첫 번째로 단상에 올라가 연설했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가장 친밀한 형제 국가입니다. 조선 민중은 중국 민중이 처한 운명을 자신의 운명같이 생각합니다. 조선 민중은 중국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결연하게 지지하며, 우리 자신의 선혈을 흘려 조중(朝中) 양국 민중의 행복과 자유를 쟁취하기를 바랍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동방 피압박민족 공동의 적입니다. 우리 피압박민족이 단결하여 끝까지 투쟁하면 우리는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유기석의 연설은 우뢰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북경의 여러 신문에 관련 내용이 실리고 천요우린(陳友仁,1875~1944)이 발간하는『民報畵刊』에는 사진도 실렸습니다. 한국의『조선일보』도 다음과 같은 유기석의 북경 활동을 보도했습니다. 지난달 삼십일 북경 천안문에서 열린 국민대회 때에 오백여 단체 십여만 명의 어마마한 군중이 모여든 가운데에는 조선, 인도, 대만, 터어키, 일본 등의 동양 각국 사람들과 독일 사람까지도 참가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중에서 외국 사람으로 제일 먼저 등단한 사람은 유기석(劉基石)이라는 동포였다. 류 군은 현재 조양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이날 제일 먼저 등단하여서 침통한 사기로 장시간의 연설을 시험하였으며 연설이 끝나매 단하에 모여 섰던 십만 군중은 비상히 흥분하여 중화민족 만세와 『○○○○타도』,『○○○○제국주의 타도』, (○○○○타도, ○○제국주의)를 높이 불러 많은 중국인에게 흥분을 주었고 그다음으로는 독일인, 일본인, 인도인, 대만인, 터어키인 등의 대표가 차제로 일장 연설을 시험하였더라. 이때부터 유기석은 공개적인 반일 학생이 되었습니다. 유기석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 사령관의 주의를 끌었고 반역적인 생각을 가진 조선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조선이 해방되지 않으면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때 20세였다. 베이징에 체류하는 동안 집필활동도 시작했다. 『기독신보』 주간 신문에 조양대학 유기석의 명의로 「黑子와 基督」이라는 논설을 연재해서 겸애설을 주장한 묵자와 예수를 비교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점점 희박했기 때문에 유기석의 반일 결심은 더욱 강해졌고 행동도 점점 더 극단적으로 되어 마침내는 일본과 직접 투쟁하는 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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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3) 흥사단 170번, 15세 소년창춘(长春), 션양(沈阳), 톈진(天津)을 거쳐 동방에서 제일 큰 도시 상하이에 도착한 유기석은 부친의 친구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1873~1935) 선생을 찾아뵈었습니다. 향후 어떻게 해야 할지 지도를 요청하며 이동휘 아저씨 댁에 머무는 동안 여운형(呂運亨, 1886~1947)선생과 이광수(李光洙, 1982~1950) 아저씨도 만났습니다. 여운홍 선생 집에서 이광수와 함께 산 적이 있는데 이광수는 종종 유기석에게 조선 문학을 가르쳐 주고 또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도소개해주었습니다. 도산은 특별히 유기석을 좋아했습니다.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도산은 귀찮아하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는데 도산의 말에는 한마디 한마디마다 무한한 열정을 띄고 있어 유기석은 안창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산 또한 유기석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1920년겨울, 난징 화공중학(華公中學)에 입학해서 공부하는 동안 유기석은 흥사단 원동 위원부에 입단했습니다. 입단번호 170번, 15세였습니다.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화공중학의 축구대장도 맡았습니다. 상하이에 온 후 유기석은 양복을 입기 시작했는데 양복을 입지 않으면 조계지공원에 놀러 갈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또 루쉰(魯迅, 1881~1936)을 존경하고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 후반기부터 루쉰과 관계를 맺고 가깝게 지냈는데, 유기석이 얼마나 루쉰을 좋아했는지 루쉰의 이름이 周樹人인데 자신의 필명도 柳樹人이라고 지었습니다. 1924년6월 화공중학을 졸업한 유기석은 그해 9월, 베이징 조양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옌지도립제2중학교의 동창이자 막역한 친구 심여추(沈茹秋,沈龍海, 1904~1930)를 재회해서 두사람은 의기투합했습니다. 심여추는 도립제2중학교를 다니다가 지린(吉林)으로 와서 지린 중학을 졸업하고 창춘에서『大同日報』기자로 일하면서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24년베이징으로 옮겨와 무정부주의 계열신문『國風日報』에 입사하여 부간「學涯」를 편집하여 발행하고, 1925년, 바진(巴金, 1904~2005)등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인 상하이민중사의『民衆』이라는 간행물을 반월간지로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베이징에서 유기석은 흥사단을 비롯하여 한인교회와 유학생회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1925년 1월을 전후해서 한인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베이징 고려유학생회 체육부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ˑ중 학생들과 흑기 연맹을 조직하여 일본의 조선 및 중국 침략을 반대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결하는 활동도 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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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2) 룽징(龍井)에서 맞은 삼일 만세운동유기석은 1919년 삼일 만세운동 때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옌지(延吉) 도립 제2중학교 2학년 때 삼일 만세운동을 맞았는데, 1919년3월12일 밤, 학우들은 밤을 새우며 전단을 찍고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태극기를 빨리 만들기 위해 직사각형의 아연판에 구멍을 뚫고 태극기 모양으로 잘라 붉은색, 남색, 흑색 잉크를 솔에 묻혀 한번 칠하면 바로 국기 한 장이 되어 밤새 수 천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단과 태극기는 “충렬단”이란 명의로 배부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학우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의 원칙을 제기했기 때문에 조선도 곧 독립할 것이라는 희망에 넘치는 말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2천만 민중이 모두 일어나 독립 만세를 크게 부르면 파리평화회의에서 세계열강이 조선의 억울함을 듣고 독립을 승인한다고 했습니다. 유기석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것처럼 흥분하고 기뻤습니다. 3월 13일, 룽징 만세 시위대 선두가 막 가두로 진입하려고 할 때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유기석은 폭죽을 터트리는 줄 알았는데 “모두 땅바닥에 엎드리라”는 고함이 들려 왔습니다. 중국 경찰들이 군중을 향해 실탄을 던졌습니다. 유기석도 도망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총알에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밭에 있는 수수 뿌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룽징 만세 시위 후에도 조선 학우들은 애국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어린 학우들은 큰 학우들이 시키는 대로 편지를 보내거나 전단을 뿌리고 큰 명절이 되면 집마다 국기를 꽂았습니다. 만세를 부르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면 연합국이 우리 정의를 수호하고 ‘민족자결’을 허용할 줄 알았는데 민족자결은 조선과 같은 약소민족에는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윌슨의 기만적인 구호에 현혹되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또 하나의 서광이 비쳐 왔습니다. 스탈린이 소련은 동방의 억압받는 민족 노동자 대중을 도와 오랜 기간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할 것이며 아울러 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에도 참여해서 조선 민족 독립운동도 승리로 이끌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920년 가을, 유기석의 어머니는 가산을 정리해서 독립군 군정서가 관할하는 왕청현으로 이사했습니다. 부친이 유기석에게 빨리 상하이로 도망가서 공부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추석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마을에서 소나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쇠고기를 먹고 떠나라는 마을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음력 8월14일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11살 동생 유기문이 형을 따라가겠다고 집에서 2~3리 떨어진 강변까지 쫓아왔습니다. 동생이 발을 동동구르며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기석은 나룻배를 탔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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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옌볜(延边) 독립운동 지도자 유찬희독립운동 지사 중에 유기석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어린 나이에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솔직하고 진솔하게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유기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중의 한 갈래를 형성하는 무정부주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지사입니다. 해방 직전에는 주로 일본군에서 복역하는 한국인 학도병 탈출시키는 일을 했는데 장시(江西) 옌산(沿山)에서 학도병이 훔친 일본군의 전략과 방어계획 등이 기록된 문서를 임시정부에 전달하려고 충칭을 향해 가다가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유기석 지사의 집에는 부친 유찬희와 동생 유기문도 유명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부친 유찬희는 1919년 3월 룽지에서 독립선언 시위를 주도하고 연해주로 넘어가 국민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유기석과 유기문은 부친의 독립 정신을 본받아 아나키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에 가입하여 일제 요인 암살, 기관 파괴, 친일파 처단 등의 의열투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1940년대 광복군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광저우 총영사관의 관할 지역이 화남지역이며 광둥, 광시, 푸젠, 하이난입니다. 유기석 지사는 상하이, 톈진, 허난, 푸젠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푸젠에서 활동한 일이 있어서 이 자리를 빌러 소개합니다. (1)옌볜(延边) 독립운동 지도자 유찬희(柳讚熙, 1883~1930) 유찬희지사는 황해도 출신이며 배재학당에서 근대적인 학문을 수학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되는 것을 보면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신념으로 평안도, 황해도와 함경도 등에서 계몽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2년 일본 침략자의 군화발 아래 노예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안투현(安图县) 부아허통(布兒哈通)강변에 정착했습니다. 나라없는망국노(亡國奴)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렵게 장만한 부뚜막의 솥을 누군가가 훔쳐갑니다. 빨아 넣어 옷도 기다란 갈고리로 낚아갔습니다. 한인노점상에는강도들이 들어와 종종 집단구타하고 물건도 뺏어갔습니다. 유찬희는 교민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옌볜에 태광중학(太光中學)을 설립했습니다. 또 한편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경제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의 영향으로 옌볜에서도 대규모 독립선언회가 열렸습니다. 유찬희는 간도 지역 항 민족운동 단체인 대한독립 기성총회를 조직해서 3월 13일 룽징(龙井) 독립선언시위를 지휘했습니다. 3월13일아침, 집회가 예정된 룽징 동청총(東盛涌) 서쪽 끝 들판은 인산인해였습니다. 약 3만명이 운집했는데, 사람들은 명절 때나 입는 깨끗한 흰옷을 입고 흥겨워 춤을 추며 모여들었습니다. 밤 새워 수십리를 걸어온 사람들도 피곤함을 모르고 감격하며 흥겨운 모습입니다. 칠팔십세 노인이 있는가 하면 열서너살의 아이들도 나왔습니다. 국자가 부근 조선족 학교인 창동학교, 광성학교 등 학생과 교사, 한족 학교에 다니는 조선족 학생, 두만강 개산툰 정동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80여명이 밤새 70여리를 걸어 왔습니다. 매일 정오에 울리는 성당종소리를 시작으로 반일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이 사실은 알게 된 룽징일본영사관에서 교회종을 울리지 못하게했습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허룽(和龙)에서 온 소년 임민호가 교회 종각에 올라가 대회장을 구경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임민호에게 종을 치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의 고무에 흥이 난 소년은 종에 달린 밧줄을 힘껏 당겼습니다. 교회종소리가 울리자 룽징 시가지상점들은 국기를 내걸고 사람들은 손에 국기를 들고 집회장으로 모였습니다. 사회자가 “우리조선민족은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민족의 자유를 선언하고 민족의 人道를 선언하노라”고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민족 대표들이 한 사람씩 연설을 했습니다. 선언서를 낭독 후 조선 민족 대표 인사 14명이 서명을 했습니다. 유찬희도 김약연(金躍淵,1868~1942)등과 시위발기인중의 한명으로 단상에 섰습니다. 오전1 1시쯤 집회가 끝나고 시위대가 질서정연하게 시내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시위대 선두가 막 가두로 진입할 때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감정이 격앙된 군중과 경비를 맡은 연길 주둔 군대가 충돌했습니다. 군인들은 실탄으로 군중을 향해 사격하고 맨주먹의 군중들은 “전진하자. 후퇴는없다”라고 큰소리를 외치며 군인들을 향해 달려 들었습니다. 시위현장에서 14명이 죽고 50~60명이 다쳤습니다. 옌볜의 조선민족운동지도자들은 농촌으로 숨어 들거나 러시아 연해주로 도망을 갔습니다. 유찬희도 가정을 버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고려(崔高麗, 1893~?), 이강(李剛, 1878~1964) 등과 블라디보스토크 국민의회를 조직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트에서 약 6개월간 거주하다가 유찬희는 왕칭현(汪淸縣)으로 돌아와 홍범도(洪範圖, 1868~1943), 구춘선(具春先, 1857~1944), 강구우(姜九禹) 등과 국민회를 조직했습니다. 유찬희는 재무부장을 맡아 국민회 재정을 관리했습니다. 유찬희가 러시아에 가서 무기와 군량미 구입하면 농민들이 대오를 지어 연해주로 가서 유찬희가 구입한 무기를 짊어지고 돌아왔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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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5일 밤샘 생방송 후 돌연사, 관계사: 고용이나 인턴 관계 아니다11월 10일, 허난성 핑딩산(河南平顶山) 대학 3학년 이호(가명)는 회사에서 밤샘 게임 방송을 9시간 가까이 한 후 학교 밖 셋방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중돌연사했다. 학교에서 6개월 인턴을 요구해 인터넷으로 일자리를 찾다가 게임방송회사를 찾았습니다. 이호의 아버지 이융청(가명)은 "회사가 아이와 체결한 계약서에 따르면 한달에 240시간 이상 생방송을 하도록 돼 있다"며 "아이는 원래 낮에 생방송을 했지만 11월 5일 이후 야간 생방송을 시작했으며, 급사하기 전에는 연속 5일 밤을 새워 생방송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해당 회사인 허난친이문화미디어유한공사(河南琴意文化传媒有限公司)는 "회사와 이호는 <쇼호스트 및 공회합작협의>(主播及公会合作协议)를 체결했다"며 "쌍방은 고용관계나 인턴관계가 없으며 이호는 일을 마친 후 자신이 세들어 살던 셋집에서 사망했을 뿐 회사와 관계없다"고 밝혔다. 또한 회사는 이호의 야간 생방송에 대해 알지 못하며, 쇼호스트에게 야간 생방송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호는 허난성핑딩산직업기술학원 컴퓨터과학과 응용학과에 재학 중이며 내년 6월에 졸업할 예정이다. 이융청은 장기간 광저우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올해 여름방학에 이호는 그의 직장에서 두달동안 인턴십을 하였으나 인턴십수속을 밟을 수 없었기 때문에 9월에 개학한 후 이호는 다시 인턴십 회사를 찾으려고 허난으로 돌아갔다. 10월 14일, 이호는 부모님께 자신이 정저우에서 생방송 회사를 찾아 게임 쇼호스트(游戏主播)로 일하게 되었고 기본급은 3,000위안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11월 10일 저녁 7시가 넘어 아이가 다니는 학교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융청은 아이가 셋집에서 숨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날 이융청은 정저우로 급히 돌아와 이호와 함께 사는 동창을 만나 아이의 사망 전 상황을 알게 됐다. 그는 "그의 호흡이 매우 가빠지는 것을 들었고 깨워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급히 120에 응급 전화를 걸어 의사의 지도하에 심폐소생술을 진행했다. 나중에 구급차가 도착해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했지만 구조되지 못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이후 경찰서에서 발급한 "사망증명서"에 따르면 이호는“급사”로 비정상적인 사망에 속했다. 이융청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이호의 몸은 항상 건강했고 심장병 병력도 없으며 지난해 신체검사에서 모든 신체지수가 정상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호의 생전의 구체적인 일정을 요해하던 중 이호가 방금 9시간 동안 "밤샘"을 하며 생방송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아이가 처음 입사했을 때는 낮근무를 했으나 11월 5일부터 야간근무를 시켜 밤에 생방송을 하게 했다. 아이가 원하지 않자 회사 상사는 야간방송 인센티브를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권유했고 아이는 줄곧 꺼려했다'고 말했다. 이호의 더우인(抖音) 계정을 누르면 10월 15일부터 11월 10일까지 25일간 89회의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11월 5일까지 이호의 방송 시간은 대부분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였다. 11월 5일 이후, 생방송은 대부분 오후 9시쯤에 시작되어 오전 6시쯤에 끝난다. 왜 아이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방송을 하는 걸까? 이융청은 이호와 회사가 맺은 <쇼호스트 및 공회합작협의>(이하 '계약서')에서 단서를 잡았다. 계약서는 쇼호스트의 월 기본수입이 3,000위안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방송 개시 유효 시간은 월 240시간, 방송 개시 유효 일수는 월 26일, 쇼호스트는 월 15개의 짧은 동영상을 업로드해야 했다. 이융청을 화나게 한 것은 사고 후 이호가 근무한 회사가 아무런 소통이나 위로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회사에 갔더니 법무사를 보내 위로금 5,000위안을 줄 수밖에 없다고 했고 다른 요구가 있으면 법원에 고소하라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며 말했다. <쇼호스트 및 공회합작협의>를 통해 이호와 협의에 서명한 것은 허난친이문화미디어유한공사(河南琴意文化传媒有限公司)이며, 회사는 쇼호스트의 운영관리 서비스를 책임지고 쇼호스트의 생방송 수입의 20%를 얻을 수 있다. 상기 회사는 2019년 10월 9일에 설립되었다. 회사의 법무대표 장씨는 "이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회사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호의 상황에 대해 회사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가족에게 위로금 5,000위안만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융청은 “사고 후 학교가 적극적으로 대처해 법률적 지원을 해왔고 학교가 이전에 가입한 단체 보험을 통해 가족들을 위해 보상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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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남성 비행기 난동부려 12일 행정구속 받아수도공항(首都机场) 공안국은 최근 "비행기 난동 사건”에 신속하게 조사하여 처리했다. 모 외국인 승객이 비행기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승무원의 관리를 따르지 않아 법에 따라 12일 동안 구금되는 행정 처벌을 받았다. 사건 당일, 수도공항운수통제센터는 베이징행 비행기 안에서 모 외국인 승객이 폭발물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신고했으며 승객 상태는 만취로 의심됐다. 수도공항 서구 파출소 경찰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관련 남자를 파출소로 연행했다. 조사 결과 남성은 비행기 탑승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회식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고공비행 상태가 되자 남자는 가방에서 술 한 병을 꺼내 단번에 마셨다. 그리고 기내 통로에 쪼그리고 앉아 앞좌석 여성 승객 두 명에게 말을 걸며 얼굴을 들이댔다. 두 여성이 그를 모른다며 대화를 거부하자 남성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소리를 듣고 현장에 도착하여 말리자 남자는 자리로 돌아갔지만 20분 뒤 갑자기 일어나 짐칸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통로로 걸어갔다. 이 남성을 감시하는 승무원이 다가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남자는 광저우, 선전으로 가겠다며 고함을 지르고 팔을 휘두르며 감정기복이 심해졌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욕설을 내뱉고 승무원이 다가가 말리자 남성은 승무원을 잡아당기고 밀치며 내리누르는 등 행동을 했다. 승무원들은 상황을 보고 절차에 따라 힘을 합쳐 남성에 대한 구속 조치를 취했다. 구속을 받고도 남성은 안절부절못하며 여러 차례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며 고함을 지르며 횡설수설했다. 2시간 뒤 남자는 갑자기 "붐! 붐! 붐!" 하고 외쳤으며 폭탄이 바로 옆 캐리어에 있다고 말했다. 캐리어는 다른 승객의 것이였다. 승무원들은 절차에 따라 캐리어를 검사했지만 상자 안에 의심스러운 물품은 없었다. 승무원이 도중에 경찰에 신고하고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경찰이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성은 음주검사 결과 만취 상태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는 술이 깬 후 자신의 불법 행위를 자백하고 매우 후회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중화인민공화국 치안관리 처벌법" 관련 규정에 따라 남성에게 12일동안 구속 행정처분을 내렸다. 수도공항 공안국은 비행기 내 좌석을 강제로 차지하고 싸우고 전자설비를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담배를 피우는 등 기내 관리 질서와 민간항공 운송질서를 어지럽히고 인민의 신변과 재산을 위협하고 비행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는 모두 '비행기 난동 행위'에 속하며 수도공항 공안은 법에 따라 '비행기 난동' 불법 행위를 엄중히 단속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