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모 여성 2,500위안 주고 고급 호텔에 묵다 잠든 사이 뱀에게 물려?!12월 2일, 오여사는 SNS에 11월 29일 상하이 와이탄의 한 호화호텔 30층 객실에서 잠을 자다가 뱀에게 물린 것으로 의심된다는 글을 올렸다. 12월 2일 오여사는 '11월 29일 10시경 호텔에서 숙면을 취하던 중 갑자기 왼손 팔에 뭔가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때 첫 반응은 오른손으로 잡았는데 뱀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오여사는 그것을 한쪽으로 내던진 뒤 다시 불을 켜보니 꼬리 서너센치만 남아 침대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즉시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직원에게 의료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요청했다. 10여 분 뒤 오여사의 방에 도착한 두 남성은 의료상자를 가져오지 않고 들어와 침대 밑을 뒤지며 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뱀에게 물린 후 상하이 병원으로 가서 응급 진료를 받은 오여사는 '병원은 독이 없는 뱀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지만 파상풍 주사를 맞히고 뱀독을 제거하는 약을 처방했다. 다음 날 호텔 측은 뱀을 찾지 못했다며 배상문제는 보험회사에 맡겼고 보험회사는 의료비 300위안만 배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호텔 측은 오여사에게 하룻밤 더 묵고 2만 포인트를 주거나 무료 만찬과 스파를 이용하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하자 4만 포인트를 주겠다며 다른 호텔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12월 2일 당사자는 '당시 예약한 호텔이 1박에 2,500위안이고 1일 정오부터 지금까지 호텔측은 더이상 연락주지 않았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고 뱀의 출처를 조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호텔 관계자는 '현재 해당 방을 폐쇄했으나 이물질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은 아직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일부 누리꾼들은 '이전 고객이 가져온 애완 뱀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 독이 없는 뱀이지 혹시라도 독사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뱀을 아직 못 찾았다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3) 카이펑에서 신문기자 하다가1932년 중국인 잉치롼(應起鸞)과 결혼하고 허난(河南) 카이펑(開封)에 정착했습니다. 유기석이 톈진 일본 영사관 폭사사건을 주도할 때, 잉치롼이 베이징에 있는 폭탄을 톈진으로 옮겨 유기석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스물 다섯의 잉치롼은 최신 유행하는 가죽외투를 입은 신식 여성으로 분장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식 가죽상자에 폭탄 두 개를 담아 들고 태연자약하게 플렛폼을 빠져 나왔습니다. 1928년 가을 어느 날, 잉치란은 난창(南昌)에서 유기석을 처음 만났고, 그 첫인상을 “그의 눈빛은 번쩍번쩍 빛나고 용맹한 기개가 넘쳤으며, 보자마자 깊은 인상을 남겼다”다고 합니다. 장시성(江西省) 여자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학생시위를 주도하다가 공청단(共靑團)에 참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체포 위협을 받고 난창을 떠났는데, 이후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4년간 연애했습니다. 잉치롼의 부친이 나라잃은 이국 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마침내 부친의 승낙을 얻어 류수인과 결혼하고, 결혼 후 남편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인해 아이 넷을 홀로 키우며 가정을 지켰습니다. 1933년 가을, 유수인은 생계유지를 위해 직장을 찾다가 『河南日報』기자로 취업했습니다. 신문사 기자 생활은 1929년 봄, 난징 『東南日報』에서 시작해서 『天津商報』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河南日報』는 매일 보통 신문 크기의 6면을 발행했는데 발행 부수가 14,000부 정도로 황허 유역에서는 첫 손가락을 꼽는 지방관청 신문이었으며 직원만도 100여명이었습니다. 유기석은 『河南日報』의 사설을 썼습니다. 주로 국제적인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는데 사장은 한번 훑어 보고 논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고 문맥상 틀린 부분이 발견되면 몇 글자 고쳐줄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신문사 월급만으로는 가족부양비가 부족해 교원 생활도 겸하여 1937년7월 중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약 5년간 허난에 머물렀습니다.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김과 안 두 성씨가 연명하여 보낸 전보를 받았습니다. 유기석에게 전보를 보낸 김 씨와 안 씨는 누구일까요? 김씨는 김구이고 안씨는 안중근의 친동생 안공근으로 추정됩니다. 유기석은 무정부주의 사상에 편향해서 민족주의 지도자 김구나 안공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전보에는 공산주의도 좋고 아나키즘도 좋지만 오로지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뒤엎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얻은 후에 가능한 것이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항일 혁명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속전속결로 중국을 점령하겠다며 병사력을 증강해 석 달 만에 베이징과 상하이를 점령했습니다. 상하이에 살던 한인들은 대부분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래도 상하이에 일본인과 사업을 하거나 친일파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방치할 수 만는 없었습니다. 안공근은 그의 조카 안후생(安厚生, 1918~) 등 애국 청년을 모아 암살을 목적으로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했습니다.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의 참모이며 연락처는 新天祥里 20호 곧 안공근의 집입니다. 유기석은 이들과 협력을 결심하고 전보를 받은 후 곧바로 9월 초 카이펑을 떠나 상하이로 왔습니다. 난징에 도착한 다음 날, 일본비행기96대가 편대를 이루어 고도의 상공을 날면서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하며 상하이를 점령하기 위해 기세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 민족 독립운동 계열은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으로 분열되어 혁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기석은 중재를 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선택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2) 유기문이 일본 선박에 폭탄 투척일본총영사 암살을 시도하거나 일본병영을 폭파하고 백주에 은행을 터는 등, 이런 일들은 일제 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거사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테러, 살인, 강도 방화를 자행하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만 유기석은 이와 같은 테러활동이나 사유재산 철폐 같은 직접 행동 방법으로 일제 통치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무정부주의 활동에 참여한 분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입니다. 취안저우 여명중학교에서 형을 만난 유기문도 형과 함께 직접 행동에 참여했습니다. 유기문은 1930년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다음 해, 1931년 1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백정기 숙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 조직인 흑색공포단 결성하는데 형 유기석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천리방이 톈진 일본 총영사 쿠와시마에게 폭탄을 던질 때,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허둥지둥하게 만들기 위해, 유기석은 같은 날 동생 유기문을 만국교 아래 일본 상선 부두로 보내 그곳에 군수 물품 선박 남양환(南洋丸)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천리방이 중가공원에서 일본 총영사에게 폭탄을 던지고 폭파 소리가 들리면 유기문이 군수 물품을 실은 남양환에 폭탄을 던져 그 배를 폭파하기로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기석은 여관으로 돌아와 중가에서 울리는 푹발소리는 들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늦어도 1~2분 이내 만국교 아래에서 울릴 폭발음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0분, 20분이 지나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저녁, 유기석은 베이징의 약속한 장소에서 천리방과 유기문을 만났습니다. 천리방은 폭탄 소리가 나자, 보초가 도망을 쳤는데 폭탄을 하나 더 준비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기문은 천리방이 던진 폭팔음을 듣고 폭탄을 남양환 선박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런데 폭탄이 갑판 위에 떨어지고 배의 선원이 떨어진 폭탄을 곧바로 물속으로 차 던져 사상자 없이 폭탄이 물속에서 폭발했습니다. 유기문은 이 행동을 감행하면서 “자신의 안전도 생각해야 하고 또한 적을 소멸해야 하는 일은 몹시 어렵다. 내가 만일 더 담대하게 선박에 접근하여 수류탄을 던졌다면 성공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염려하는 바가 있어 먼 곳에 서서 폭탄을 갑판 위에 던졌고 결과적으로 폭탄을 낭비하고 말았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이 일은 일제에 큰 손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이 투쟁으로 한인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중국인에게는 한인들의 반일 노선을 각인시키고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남화연맹과 흑색공포단에서 활동하던 유기문은1935년 5월, 엄순봉과 이규호 등과 상하이 거류민 회장 이용노(李容魯)와 친일파 옥빈관 처단 사건에 참가했으나 이후 유기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기석의 전기에도 동생 유기문 말년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독립운동 활동에서 퇴출했는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1) 유기석의 동지 천리방(千里放)취안저우 여명학교 재직시절, 어린 시절 헤어진 동생 유기문과 상봉했습니다. 유기문은 형을 따라 아나키스트의 길로 들어섭니다. 1931년, 유기석은 중국인 동지들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과 동시에 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를 시도합니다. 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은 천리방이라는 동지가 시도하고 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는 동생 유기문이 시도합니다. 천리방이 쿠와시마 암살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천리방은 의열단원 이용준(1907~1946)지사의 가명입니다. 이용준은 1907년 충북 제천군 봉양면 원박리에서 출생했습니다. 1925년 3월, 제천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제천군청에 근무하면서부터 신간회에 가담해서 민족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쿠와시마의 집이 중가(中街)에 있는데 대로변 영국 순찰 초소와 약 100m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쿠시마와가 탄 자동차는 대로를 따라 공원으로 들어와 사철나무 울타리를 지나 보초가 서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 자동차는 속도를 줄여 회전하면서 대문으로 들어갑니다. 총영사 주택 입구에 늘 영국 순찰 한 명이 보초를 섰습니다. 쿠와시마는 매일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자동차를 타고 귀가합니다. 쿠와시마 암살은 용감하게 자신을 노출하지 않고 매복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천리방이 공원 관람객으로 가장해 과일 바구니를 안고 벤취에 앉아 총영사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자동차가 회전할 때 수류탄을 자동차 안으로 던지고 과일바구니를 들고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공원 앞문으로 걸가 나가기로 했습니다.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허둥지둥하게 만들기 위해, 같은 날 사람을 만국교 아래의 일본 상선 부두로 보내 그곳에 군수물품 선박 남양환(南洋丸)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중가 공원에서 폭탄 소리가 들릴 때, 동시에 그 배를 폭파하는 작전입니다. 다음 날, 유기석은 천진에서 발행되는 일본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제 오후 6시, 쿠와시마 총영사가 업무를 마치고 승용차를 타고 관저로 돌아가는데 승용차가 관저 대문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흉한이 자동차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담장을 맞혀 다행스럽게도 사상자가 없었다. 쿠와시마 총영사는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폭탄의 위력이 아주 강하여 전체 공원을 진동시켰고 실내에 걸려 있던 천황의 초상화가 떨어졌다. 쿠와시마 총영사는 이 일로 침식을 잊고 불안에 떨면서 자신의 방심을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기 위해 당국은 관저에서 일하는 중국인을 잠시 모두 구금하고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당일 저녁 7시 20분, 어떤 사람이 백하(白河) 부두에 정박해 있는 남양환에도 폭탄 한 개를 투척했는데 폭탄이 갑판위에 떨어졌지만 바로 이 배의 선원이 물속으로 찬훙에 폭발하여 다행스럽게도 사상자가 없었다. 유기석이 처음 천리방(千里放)을 만났을 때, 천리방은 23~4가량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웅장하고 힘이 있었으나 천리방은 토론을 좋아하지 않고 늘 엄숙한 표정입니다. 길고 큰 얼굴에 눈초리는 약간 치켜져 있고 눈빛이 이글이글하며 영웅호걸의 기개도 보였습니다. 유기석이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흑여(黑游)라고 말했습니다. 이름이 으시시합니다. 떠돌아 다니는 검은 물체라는 뜻입니다. 유기석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아나키스트의 풍모를 암시하는 이름이였으니까요. 본명을 물어 볼 수도 없고 남들이 부르는 것처럼 그냥 천리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천리방도 본명은 아닙니다. 성격이 솔직하고 호방하며 천진하고 낭만적이어서 친구들이 그에게 지어준 별명입니다. 그 자신도 이 이름을 좋아하여 그의 가명이 되었습니다. 천리방은 어려운 일이나 모험적인 행동에는 늘 앞장서서 참가했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은 절대로 애매하게 하지 않고 항상 깔끔하게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유기석은 천리방에 대해 “적 앞에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스텐레스”라고 했습니다. 1938년, 천리방은 탕산(唐山)부근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일본이 무기징역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굽히지 않고 수인을 조직하여 투쟁을 벌이고, 늘 큰소리로 간수들을 질책해서 간수들도 그 앞에서는 무서워 벌벌 떨며 얼이 빠졌다고 합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제 투항 후 석방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춘은 10여년 철창생활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출옥 후 얼마 안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35세정도였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0) 동생 유기문의 수난1920년 가을, 유기석이 집을 떠날 때, 동생 유기문은 11살이었습니다. 동생은 형의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꼭 형을 따라가겠다고 쫒아와서 유기석이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대성통곡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동생은 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유기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며칠이 안 되어 해고 되었습니다. 형이 반역적인 조선인, 반일 인사라는 이유였습니다. 유기문의 일거수 일투족도 감시를 당하는지라 조선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파출소에 가서 출국 증명서를 신청했습니다. 형 때문에 취업도 할 수 없으니, 형을 찾아 중국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하니, 경찰은 형 본받아 반일 학생이 되지 말라고 하면서 아주 빨리 출국허가서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며칠이 지나 상하이 황푸강으로 들어왔습니다. 배가 부두에 닿기 전, 발동선 한 대가 강 가운데서 기선과 접촉해서 사다리를 놓고 경찰이 기선으로 올라와, “누가 유기문인가”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유기문은 주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잡혀갔습니다. 경찰은 유기문에게 본인은 죄가 없지만 형을 체포해야 하니 형에게 샤먼(廈門) 부두로 마중 나오라고 전보를 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형을 팔 수 없다고 거절하자 고문실로 데리고 가서 가죽 채찍으로 때려 10분도 안 되어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물을 퍼부어 정신을 차리면 또 고문했습니다. 유기문이 죽어도 형을 팔 수 없다고 강경하게 버티자 3일 밤낮을 형구로 고문했습니다. 1주일이 지나고 구치소에서 유기문을 샤면으로 압송하면서 “천주 여명 고등중학 유기석, 저는 편안히 상하이에 도착하여 0월 0일 하문에 도착할 예정이니 샤먼 부도로 마중 나오시오, 동생 기문”이라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샤먼으로 압송될 때, 유기문은 배에서 먹겠다며 바나나를 많이 사고, 피곤해서 일찍 잔다면서 침구를 뱃머리에 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도망칠 궁리를 했습니다. 살짝 이불을 밀고 주위를 살펴보니 사람들은 모두 배에 타고 사다리와 발판도 거두어 들었습니다. 배가 출항하기 직전이라 경찰들도 특등실로 간 듯 보이지 않는데 1~2분이 지나니 뱃고동이 울리고 배가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유기문은 순식간에 용기를 내어 갑판 난간에서 부두로 뛰어내려 부두 옆에 있는 석탄 창고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한참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기선이 부두를 떠나 강 한복판으로 멀어졌을 때, 석탄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형의 주소가 적힌 일기장은 일본 경찰에게 뺏겼지만 “프랑스 조계지 貝北路 新天祥 50호”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목선 한 대를 발견하고 4원을 주고 프랑스 조계지로 와서 형의 주소지를 찾아갔습니다. 형의 친구를 만나고 곧바로 형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어제 보낸 전보는 일본 측의 음모이니 샤먼으로 가지 마세요, 동생 기문”.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9일이 지나고 기문이 여명 중학교로 형을 찾아와 꿈에도 그리던 동생과 상봉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9)리밍(黎明)고등중학교 교사푸젠 신 농촌건설 운동이 실패하고 유기석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돌아왔지만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일제 밀정들이 시시각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정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론가 떠나야 했습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유기석은 비밀히 조직된 무정부주의 불멸 구락부에 가맹했습니다. 활동비는 중국 측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고 구락부 동지 중 최동길은 다니던 복단대학을 중퇴하고 고향 집에서 송금해 오는 학자금을 이들의 의식비로 제공했습니다. 취안저우의 리밍(黎明) 고등중학교가 떠올랐습니다. 이전에 신 농촌운동에 종사했던 친구들이 방침을 바꾸어 취안저우 시내에 설립한 학교입니다. 공산당이 푸젠성 서쪽 농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홍군을 훈련하는데 힌트를 얻은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만의 민중 무장 활동 근거지를 취안저우에 마련하려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기지가 설립되자 스촨ˑ 후난ˑ광둥 등지에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이 취안저우를 무릉도원쯤으로 보고 잇달아 몰려왔습니다. 리밍 학교는 국민당 고위급 인사를 명예 이사장으로 추대해서 토비들도 감히 학교 운영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방위군’이 주둔하여 취안저우 정세가 다소 조용해졌습니다. 리밍 고등중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아나키스트이며 수준이 비교적 높았습니다. 한국에서 농업을 전공한 원예전문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이 생물 교사로 재직하고 허열추(許烈秋)도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취안저우까지 가려면 여비가 적어도20원은 있어야 하는데 유기석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가난하여 빌릴 데도 없고, 군중(群衆)서점 사장을 찾아가 책을 한 권 써주기로 하고 원고료40위안을 선불로 받아 여비를 해결했습니다. 유기석이 리명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리 교사가 결원이어서 지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많은 지방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중국 큰 도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고, 영어 지리책과 일본 책 『세계 지리 대계』를 참고해서 외국 지리를 가르쳤는데 수업이 재미있다고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체육 교사도 결원이라 지리와 체육 교사를 겸임했습니다. 매일 아침 체조 시간이 있는데 학생들이 늦잠을 자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설령 나온다고 하더라도 맨발이나 나막신을 신고 나왔기 때문에 달리기나 비교적 어려운 체조는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체육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과목이라고 여기며 교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임 체육 교사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더니 학생들이 쫓아내려고 해서 전임 체육 교사가 사직해서 결원되었다고 합니다. 유기석은 체육을 좋아하고 학생 시절 축구선수였습니다. 학교 측과 상의하여 아침 체조를 필수 과목으로 정하고 체조 시간에 출석을 불렀습니다. 아침 체조15분 전, 학생 숙소 앞에서 피리를 불어 운동장에 나올 준비도 시켰는데 학생들과 친근감이 형성되어 인기가 좋았습니다. 교장이 병이 나서 유기석이 교장 직무 대리도 맡았습니다. 1930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1931년 두어 달 교장직을 수행했는데 학교 측 이사와 교사 사이에 분규가 생겨 유기석은 교장 대리직무를 내어놓고 리밍 고등중학교를 떠났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8)“민남(閔南)으로 가서 신 농촌을 건설하자”유기석이푸젠의 신 농촌건설에 참여하게 된 것은 단순히 사상적 출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상과 현실은 엇갈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번뇌와 환상이 뒤섞여 밤낮으로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좌로 향하면 거기도 불평등하고, 우로 향하면 거기는 금전만능이어서 돈 없는 가난뱅이는 어디를 가도 여전히 학대받는 사회였습니다. 상하이에서 몇몇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구동성으로 “민남(閔南)으로 가서 신 농촌을 건설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소련의 무산계급 독재정치를 반대하며 무정부 공산사회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중국 아나키스트들이었습니다. 상하이 노동대학 설립 준비를 하던 이정규(李丁奎, 1897~1984)가 푸젠의 농촌 자위운동에 참여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유기석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반대하는 반공산주의 이론을 확실하게 파악했습니다. 베이징 조양대학에 재학할 때, 중국 아나키스트 신세기파를 형성한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엔페이(蔡元培, 1868~1940) 등 교수의 지원을 받아 흑기 연맹을 조직했습니다. 흑기 연맹은 중문으로 된 『東方雜誌』를 발행하여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아나키즘을 보급했습니다. 어떻게 신 농촌을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도 듣지 못했지만, 유기석은 개인영웅주의, 자유주의, 소자산계급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아나키스트로 돌아섰습니다. 도산이 거듭 만류했으나 의연하고 결연하게 흥사단을 탈퇴하고, 미국 유학도 포기하고, 중국 국민당군 제2군 신분으로 푸젠 샤먼 선전원 양성소로 가서 사회학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푸젠의 남쪽, 민남 일대는 원래 지방색이 강한 데다 청말 이래 수십 년 동안 군대와 행정관리가 부패해서 치안이 극도로 혼란스럽고 각종 총기도 농촌에 나돌았습니다. 토비들은 산악지대뿐 아니라 평야 지대에서도 군대 이상 병력을 보유하고 오늘은 관군, 내일은 토비군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두목 편에 붙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공산당도 장시성(江西省)과 인접한 푸젠 농촌에서 토호나 지방 관료들과 결탁하여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습니다. 취안저우와 해발 5~600m의 산봉우리 사이에 북송 시기에 건축한 낙양교라는 유명한 다리가 있습니다. 교량에 사용된 돌 하나 길이가 약 3m로 전부 이렇게 큰 돌을 이용하여 만든 2km 교량입니다. 토비들은 산 위에 주둔하면서 시내에 나와 강탈하거나 인질을 잡고 갖은 못된 짓을 하며 민간인들의 낙양교 출입을 방해했습니다. 토비들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받으면서 단련된 농민들은 용기와 지모로 마을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취안저우 투링(涂岭)이라는 지역에 500여 명의 토비가 양식과 돈을 강탈하러 마을에 침입하자 농민들은 두 말없이 그들의 요구를 승낙하고 타작마당에 주연을 베풀어 접대했습니다. 농민을 깔보던 토비들은 보병총을 걸어놓고 진탕 먹고 즐겼습니다. 이 때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농민 한 3~4백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토비의 총을 뺏고 마을을 지켰습니다. 샤먼선전원 양성소는 무정부주의자 지방 행정가가 민남지역 젊은이들을 훈련해 농촌에서 날뛰는 토비와 공산당의 침투를 막으려고 시작한 훈련소였습니다. 중고등학교 졸업한 농촌 젊은이 100여명이 샤먼 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선전양성소 교육을 마치면 자기가 거주하는 농촌으로 돌아가서 민간 자위단을 조직하고 하급 간부를 맡을 인재들입니다. 이 운동은 중국 아나키스트 항일운동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한인 아나키스트 유기석, 이정규, 이을규, 이기환, 정화암 등이 구심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우리의 항일투쟁을 도와준 중국 측에 신세를 갚는다는 뜻에서 참여를 했지만, 이 민단 운동이 건실해지면 우리 항일운동에 대해서도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습니다. 이런 운동은 비록 직접적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혁명근거지를 마련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고 한 점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연결됩니다. 유기석 등 한인들이 참여한 푸젠 신 농촌 건설 운동은 정국의 불안과 자금 부족으로 실패했습니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 동지들이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는데 유기석은 손님 접대를 맡았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7)장래에 대한 갈등석방된 유기석은 일제의 눈에 띄지 않게 도산과 따로 움직이며 러시아 우수리강(烏蘇里)강 동쪽 니콜리스크로 이사한 본가를 찾아갔습니다.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가 건립된 러시아에는 민족 차별이 없이 각 민족의 민중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모스크바 동방 노동대학에 입학할 준비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습니다. 조선인 혹은 중국인이 협동조합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계산대에 먼저 갔어도 판매원은 러시아인에게 먼저 물건을 팔고 조선인은 맨 마지막으로 계산했습니다. 정부 기관에서 줄을 서 배급표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인은 늘 뒤로 밀렸습니다. 조선 농민이 우수리스크 소비에트 토지국으로부터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허가받은 토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계약은 처음 3년은 수확량의 절반을 관청에 내고, 3년 후 일반 규정대로 조세를 납부한다는 것이었지만 토지국은 단지 2년 경작 후 500여 농가를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위약에 대해 분개하고 불만을 표시한 조선 농민 대표들은 당국에 구류시키고 당국은 수백 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조선 농민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개간지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임대했습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민족 파별 정책이 여전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은 차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유기석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없어지고 모스크바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1927년 5월, 유기석은 베이징에서 미국 유학도 준비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자초지종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선 베이징 정부 교육부에서 신청해서 미국 유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여비도 마련해 출국 여권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국가라는 생각이 들자,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제도도 희망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북경에서 한 달가량 체류하는 동안 루쉰(魯迅, 1881~1936)의 『狂人日記』 한국어 번역을 시작했습니다.『狂人日記』는 루쉰이 광인의 입장에서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소설인데 중국의 광인뿐 아니라 조선의 광인도 묘사한 것 같았습니다. 1927년6월11일, 유기석은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가는 경진선(京津線)기차 안에서 『狂人日記』 번역을 마무리해서 원고를 서울로 보냈습니다. 한글판 『狂人日記』는 8월5일『동광』 제16호에 청원(靑園)이란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 노신의 작품은 유기석이 제일 먼저 한국에 소개했습니다.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옌시산(阎锡山, 1883~1960) 부대에서 비행기 조종 기술을 배운 적이 있는지라 옌시산 항공부대에 입대하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오래 머물면 왠지 자신도 부패한 도련님들처럼 아편을 하거나 도박하는 등 나쁜 물이 들어 일생을 망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6)지린(吉林) 도산 안창호 강연회에서 체포항공학교 입학을 준비하면서 타이위안(太原)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유기석은 도산 안창호로부터 3개월 휴가를 낼 수 있다면 함께 동북으로 여행 가기를 희망한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동북 지린에 조선 교민이 약 4~5,000명 살고 있었는데 당시 산만한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을 단결하려고 도산이 고안한 여행이었습니다. 아직 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지 않아서, 1927년 설을 전후해서 유기석은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동북 지역 지린에 갔습니다. 도산의 수행비서는 유기석이었습니다. 도산은 긴 두루마기의 마괘자, 중국 모자, 검은색 솜 신발, 손에는 신사 지팡이를 들어 마치 중국의 지주나 지방 호족처럼 변장했습니다. 유기석은 도산의 큰아들처럼 변장하여 지린으로 왔습니다. 지린의 지방 유지 최명식(崔明植, 1880~미상)의 정미소에서 설 모임 겸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도산의 강연 후 조선 학생 극단이 「강산의 눈물(山河淚)」이라는 연극을 공연했습니다. 이 극본은 난징(南京) 동남(東南)대학의 허우야오(侯耀)가 '3.1운동 민중 봉기'를 주제로 창작한 작품인데, 1924년 난징에서 첫 공연을 할 때 유기석도 극 중 배역을 연기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 설 모임에서는 자진해서 연극 감독을 맡았습니다. 연극 중 무장한 일본 군경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한 여학생의 오른손을 군도로 찍자 손에 있던 태극기가 땅에 떨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여학생이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줍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일본 군경은 다시 칼을 휘둘러 그녀의 목을 베었습니다. 「강산의 눈물(山河淚)」은 지린 교포 수백 명을 엄청 감격하게 했습니다. 관중 가운데는 생전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연극 줄거리와 배우의 연기도 대단했지만 태극기가 무대에서 휘날리는 장면이 나오자 관중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대성통곡하면서 이 피맺힌 원한을 갚자고 다짐하며 환호하고 만세를 부르며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첫 강연회가 워낙 큰 효과를 거두어서 1월27일 저녁 7시에도 같은 장소에서 2차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200여명이었습니다. 안창호가 관중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강단에 올라가 강연할 때 중국 경찰과 일본 헌병들이 강연장을 포위하고 한 무리 경찰이 집회장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밤새 심문받았는데 혐의가 없다고 여겨지면 그 자리에서 석방하고 안창호와 유기석 등 지식인 40명이 지린성 경찰청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중국에 적화를 선전한다는 것이 죄명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중국 측 경찰에게 이들을 인도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했지만, 중국 측은 끝까지 조선총독부에 인도할 의무가 없다고 변명하며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유기석은 친구 심여추에게 도움을 구하고, 일본 경찰은 군벌정부와 중국 여론에 떠밀려 20여 일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유기석은 지린 사건 이후, 안창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1928년 흥사단을 출단했습니다. 비록 안창호를 비판적으로 이해했지만 매우 존경하는 마음은 늘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디즈니에서 티켓 환불하려면 남자친구가 내 남자친구라는걸 증명해야?!최근 한 네티즌은 "상하이 디즈니티켓을 환불할 때 플랫폼으로부터 종이로 된 '커플 관계 증명서'를 요구받았다"고 폭로해 화제가 되고 있다. '환불하려면 남자친구가 내 남자친구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고?' 허난성 정저우의 장여사는 '27일 남자친구와 함께 페이주(飞猪) 휴가공식플래그십스토어와 페이주(飞猪) 디즈니공식스토어에서 성인 티켓 한 장과 학생 티켓 한 장을 구매했다'고 밝혔다. 다음날 여행 중에 그녀는 갑자기 아팠고 상황이 비교적 심각했기 때문에 티켓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플랫폼 요구에 따라 진료증명서와 지불증명서를 제출하여 자신의 티켓을 성공적으로 환불했지만 남자친구는 티켓환불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장여사는 '상하이 디즈니는 티켓를 쉽게 환불할 수 없으며 이유를 기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이주(飞猪) 공식플래그십스토어의 '티켓 문제' 페이지 하단에 '동행자가 방문하지 못할 시 관계 증명서를 보충해야 한다'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그가 제공한 캡처 사진에 따르면 플랫폼은 '직계가족(친구, 친척)이 아닌 일행이 방문하지 못할 경우 신분증과 함께 찍은 사진, 관계자와 함께 찍은 사진 또는 동영상을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녀는 상기 자료를 모두 제공했고 증명서로 다양한 커플사진을 증거로 제공했다고 반영했지만 페이주(飞猪) 고객센터에서는 그녀가 제공한 자료는 커플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고 알렸주었다. 그녀가 제공한 한 토막의 녹취에서 페이주(飞猪) 고객센터는 커플관계 증명서에 학교 또는 지역사회의 '공인'이 있어야 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장여사가 이것이 페이주(飞猪) 플랫폼인지 디즈니 관광지의 규정인지 물었을 때 고객센터는 '관광지 규정'이라며 '관광지는 환불도 없고 정정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들과 여러번 협상을 했는데 반드시 종이로 된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며 답했다. 커플관계증명서를 발급할 수 있는지에 대해 페이주(飞猪)회사 소재지의 파출소 직원은 '이건 우리가 발급할 수 없는데 어떻게 발급하는가?'며 이 문제를 소비자협회 및 시장감독부서에 신고하거나 사법경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페이주(飞猪) 고객센터는 '구체적인 증빙서류는 관광지 회신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상하이 디즈니 고객센터는 '공식 채널을 통해 구매한 티켓은 환불할 수 없으며 제3자 플랫폼의 규칙은 공식 규칙과 다르다'며 '원래 채널에 연락해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30일 저녁, 장여사는 '페이주(飞猪)가 남자친구의 티켓을 전액 환불 해줬다'고 밝혔고 페이주(飞猪) 직원은 '상하이 디즈니 측에 티켓 환불 규칙 문제를 피드백했으며, 이후 파트너와 협의해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