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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성, 10℃까지 ‘절벽식 기온 하락’ 들이닥칠 예정올해 가을에 들어선 후 광동성의 기온은 기복변화가 크며 단시간 기온하락후 다시 20℃까지 기온이 상승하며 요즘 이틀간은 ‘초여름’느낌이 날 정도로 더웠다. 하지만 ‘절벽식 기온하락’이 곧 들이닥친다. 12월 9일부터 11일 기간에 광동성은 구름이 많아지며 일부 시현은 가랑비가 내린다. 11일부터 15일까지 기온이 부단히 오르면서 16일-17일의 기온은 갑자기 10℃까지 확 떨어진다. 그리고 12월에는 3차례의 찬공기가 들이닥칠 예정이며 11일-12일(弱), 17일-19일(中等偏弱), 26일-28일(弱)이 될 것이며 전체 광동성에 한조(寒潮)가 나타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12월 9일부터 해양의 온난습기류의 영향으로 광동성 상공의 구름량이 점차 많아지면서 일부 시현에 가랑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광동성 공기습도도 높아져 일부 지역에 후이난텐(回南天)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창문을 닫아야 한다. 12일부터 북풍남하로 습기가 조금 완화된다. 11일-12일: 흐린 날씨에 구름진 날씨, 아침과 저녁에 안개가 끼며 일부 지역에 가랑비가 내린다. 13일: 동풍이 불며 분산적으로 가랑비가 내리며 기온 파동이 있다. 14일-15일: 구름진 날씨, 아침과 저녁에 안개가 낀다. 16일-17일 낮에는 강한 찬공기의 영향으로 북풍이 크게 불면서 가랑비가 내리며 기온이 급속하게 떨어진다. -
12월 12일부터 강주아오대교를 통해 홍콩공항 가는 여행객들, 홍콩측에서 출입경 검사 받지 않아도 돼12월 12일부터 ‘경주강비’(经珠港飞)정책이 실시되며 앞으로 강주아오대교(港珠澳大桥)를 통해 홍콩공항으로 가는 여행객들은 내륙지역 해관검사를 받은 후 홍콩 출입경 검사를 받지 않고 직접 공항으로 갈 수 있다. ‘경주강비’(经珠港飞)는 강주아오대교를 통해 육로로 ‘공-육-공’(空-陆-空)국제 환승을 실현하며 중국 내 여행객은 ‘국내 출발지-주해공항-강주아오대교-홍콩공항-해외 목적지’ 노선으로 해외로 갈 수 있고, 해외 여행객은 ‘해외출발지-홍콩공항-강주아오대교-주해공항-국내목적지’ 노선으로 중국 내륙에 들어올 수 있다. 주해공로해관(珠海公路口岸)은 중국 내륙에서 홍콩국제공항과 유일하게 직행가능한 해관이다. 주해공항은 홍콩공항이 200여개 국제 목적지 직항 장점과 자체 90여개 국내 노선 장점을 결합하여 국내 여행객으로 하여금 주해공항을 이용하게 하여 강주오대교를 이용해 홍콩공항, 그리고 해외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게 한다. 출경인원은 출경수속을 마친후 주해공로해관의 항공사 카운터에서 탑승권을 받고 짐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전용버스를 이용해 강주오대교를 지나 홍콩공항에 도착하며 버스에서 내린 후 직접 탑승구로 가면 되며 짐은 해외목적지에서 찾는다. 이로써 홍콩측의 출입경 검사절차를 면제하고 통관효율을 제고하고 시간비용을 줄였다. 그리고 강주오대교검사소는 주해, 홍콩 출입경 방향에 전문 검사통로를 개설해 일반 여행객과 구분하여 충분히 일교연삼지(一桥连三地)를 발휘하여 광동성 서부 및 대서남지역에 영향주어 웨강아오대만구(粤港澳大湾区)의 세계급 공항군 형성에 조력한다. 관련 계획에 따르면 출입경인원이 주해공로해관에서 탑승수속을 진행하는 것은 ‘경주강비’프로젝트의 첫단계 운영방식이며 다음 단계는 여행객이 주해금만공항(珠海金湾机场)에서 탑승수속을 진행하고 주해공로해관에서 검사를 받은 후 직접 홍콩공항으로 직행하여 진정 의미상의 ‘공-육-공’ 국제환승을 실현하는 것이다. -
심천 최대 규모의 어린이 공원 오픈 예정!심천 최대 규모의 어린이 공원인 룽강(龙岗)어린이 공원은 2023년 말 이전에 시범 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심천에서 가장 높은 관람차와 아시아에서 최대의 해적선이 그중에 있다. 롱강(龙岗)어린이공원 롱강어린이공원은 심천시롱강구 롱성가도 염롱대로와 아이신로 교차점 북쪽(盐龙大道与爱心路交叉口北侧)에 위치하며 총 면적은 323,600㎡에 달하고 현재 최종 건설 단계에 있다. 공원은 동력 놀이 공간, 무동력 놀이 공간, 상업 레저 공간의 세가지 주요 구역으로 나뉘며 동력 게임 장비 19세트와 무동력 테마 게임 장비 10개가 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어린이들의 놀이 수요를 충족시킨다. 그 중 동력 시설에는 두 개의 하이라이트가 있는데 첫 번째는 직경 88m, 밑면 105m의 베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인터랙티브 관람차이고, 다른 하나는 108개의 좌석이 있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해적선이다. 공원 내 놀이 시설은 현재 테스트 및 운영 중이며 2023년 말 이전에 시범 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심천 각 지역의 어린이 공원들을 소개한다. 복전구(福田区) - 笔架山공원 笔架山은 많은 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지만, 남문에 큰 모래 연못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아이들이 오후 내내 즐겁게 놀 수 있고 옆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어 텐트를 치고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주소: 广东省深圳市笔架山公园 복전구(福田区) - 上步绿廊星公园 우주를 테마로 설계된 어린이 놀이터로 모양이 신기할 뿐만 아니라 매우 흥미롭기까지 하다. 전체 면적은 12,800㎡이며 공원 전체를 순환하는 시계 순환 트랙이 있다. 로켓 모양의 등반 프레임은어린이들에게매우흡인력이 있다. 주소: 深圳市福田区上步路与笋岗西路交叉口 난산구(南山区) - 深圳湾海风运动公园 심천만 공원에 있는 深圳湾海风运动公园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다. 해변과 가까워 산책도 할 수 있고 바다 경치도 볼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큰 풍차근처에는 모래를 파고 물놀이를 하는 큰 모래 연못도 있다. 주소: 深圳市深圳湾公园 O·Power 문화예술센터 & 오일랜드 O·Power 문화예술센터는 무대예술과 문화오락체험, 커뮤니티 놀이가 어우러진 복합공원으로 예술놀이의 풍성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여기에 숨겨진 오일랜드는 아이들의 천국으로 오일탱크 모양의 놀이기구는 인기가 가장 많다. 주소: 深圳市华侨城OPower文化艺术中心 롱화구 - 羊台山森林公园 羊台山森林公园의 어린이 놀이터는 공원 대랑주입구의 인공호수 백과원 안에 위치하며 미끄럼틀 구역, 등반 구역, 퍼즐 구역, 그물 구역 및 확장 구역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래놀이 구역도 있어 3-8세 어린이들의 야외 활동 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킨다. 정원에는 오성화(五星花), 해바라기 등 다양한 식물뿐만 아니라 햇빛, 모래 연못, 풀밭, 호수, 열대 과일나무도 심어져있다. "비밀 정글"의 재미가 있어 많은 젊은 부모들이 이곳이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소: 龙华区羊台山森林公园- 胜利大营救 10호 星球乐园 심천 최초의 "행성"을 테마로 한 어린이놀이터는 롱화베이역 중앙공원에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예약이 필요없으며 면적은 1,181㎡이다. 공원 내에는 기능이 완비되어 있고 놀이기구가 많아 아이들이 하루종일 놀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소: 龙华区中心公园 롱강구 - 南湾乐清公园 롱강에 새로 개장한 어린이 공원은 부지면적이 약 12,000㎡로 주말에 산책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이며 무료이다. 공원 안에 농구장, 미끄럼틀, 회전 의자 등 놀이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아이들이 와서 마음껏 놀 수 있다! 주소: 深圳市埔地吓水质净化厂三期 다펑구(大鹏区) - 大鹏半岛国家地质公园 심천다펑반도 국가지질자연공원은 부지면적이 45.07평방킬로미터로 심천에서 비교적 큰 공원이며 보기 드문 지질공원이다. 공원에는 자연자원이 풍부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대자연을 가까이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주소: 深圳市大鹏半岛地质公园路 광밍구(光明区) - 新城公园 새로 리모델링한 신성공원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재미있다. 긴 그네와 긴 미끄럼틀이 있어 매번 많은 어린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주 큰 모래 연못도 있으니 모래놀이 도구도 꼭 챙겨가세요. 주소: 光明区新城公园 핑산구(坪山区) - 핑산어린이공원 "자연"을 테마로 한 어린이놀이터는 완벽한 지원시설과 많은 놀이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체 면적은 약 5.7만㎡이고 자연교실 구역, 정글 탐험 구역, 고고학탐험 구역, 산림계곡 구역 등 4대 테마존을 설치하여 부모와 자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어린이놀이터이다. -
29세 여성, 무증상으로 폐암 확진돼 온라인 실점에 올라, 건강검진 중시해야인상 중에 폐암은 통증, 해혈, 호흡곤난, 극도한 신체 불편 등 증상이 뒤따르지만 사실 많은 암의 조기증상은 선명하지 않을 수 있다. 최근, 29세 여성이 무증상으로 페암에 확진되었다는 소식이 온라인 실검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29세의 샤오천은 항저우 린핑(临平)의 모 회사 사무직이며 일상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휴식날에는 친구들과 캠핑, 도보, 사이클링 등 야외활동을 즐겨했다. 하지만 이렇게 밝고 낙관적인 여성이 2주전에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았다. 얼마전, 샤오천은 일주일동안 마른 기침을 했으며 현지 병원 흉외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흉부 CT를 받았는데 검사 결과 오른쪽 폐에 5cm 크기의 사르코이드증(肺结节)이 있었다. 의사는 단순한 사르코이드증이 아니라 폐부 악성 종양으로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사르코이드증을 발견하였을 때 이미 많이 컸고 아무 증상이 없었고 병상이 위급한 것을 고려해 즉시 폐 상엽의 절제수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수술 후 병리(病理) 실증 결과, 샤오천은 폐부 악성 종양에 걸린 것이 맞으며 다행히 제때에 치료를 받아 기타 장기로의 전이가 없었고 수술 후 화학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최근 20세의 환자 샤오쉬는 호북 무한시 폐과병원에서 폐암으로 진단되었다. 의사는 ‘그는 흡연, 유전, 폐부 만성 질환, 공업 먼지 직업 환경 등 폐암 관련 위험 요소와 하나도 연관이 없었다. 단지 최근에 자주 밤샘을 했지만 폐암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증거가 없다’며 말하였다. 2005-2020년 중국 암질병 보고에 따르면 폐암, 간암, 위암은 암으로 유발한 사망원인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폐암 조기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며 질병의 발전에 따라 만성 기침, 호흡이 가빠지고 피곤하고 흉부가 아프거나 해혈 증상, 반복적인 폐부 감염과 원인불명의 체중감소 등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때문에 매년 진행하는 건강검진(특히 폐암에 걸릴 확율이 높은 자)에서 흉부CT(胸部低计量螺旋CT)와 폐종양표지물감사(肺肿瘤标志物检测)를 진행할 수 있다. -
모 여성 2,500위안 주고 고급 호텔에 묵다 잠든 사이 뱀에게 물려?!12월 2일, 오여사는 SNS에 11월 29일 상하이 와이탄의 한 호화호텔 30층 객실에서 잠을 자다가 뱀에게 물린 것으로 의심된다는 글을 올렸다. 12월 2일 오여사는 '11월 29일 10시경 호텔에서 숙면을 취하던 중 갑자기 왼손 팔에 뭔가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때 첫 반응은 오른손으로 잡았는데 뱀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오여사는 그것을 한쪽으로 내던진 뒤 다시 불을 켜보니 꼬리 서너센치만 남아 침대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즉시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직원에게 의료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요청했다. 10여 분 뒤 오여사의 방에 도착한 두 남성은 의료상자를 가져오지 않고 들어와 침대 밑을 뒤지며 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뱀에게 물린 후 상하이 병원으로 가서 응급 진료를 받은 오여사는 '병원은 독이 없는 뱀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지만 파상풍 주사를 맞히고 뱀독을 제거하는 약을 처방했다. 다음 날 호텔 측은 뱀을 찾지 못했다며 배상문제는 보험회사에 맡겼고 보험회사는 의료비 300위안만 배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호텔 측은 오여사에게 하룻밤 더 묵고 2만 포인트를 주거나 무료 만찬과 스파를 이용하는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하자 4만 포인트를 주겠다며 다른 호텔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12월 2일 당사자는 '당시 예약한 호텔이 1박에 2,500위안이고 1일 정오부터 지금까지 호텔측은 더이상 연락주지 않았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고 뱀의 출처를 조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호텔 관계자는 '현재 해당 방을 폐쇄했으나 이물질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은 아직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일부 누리꾼들은 '이전 고객이 가져온 애완 뱀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 독이 없는 뱀이지 혹시라도 독사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뱀을 아직 못 찾았다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3) 카이펑에서 신문기자 하다가1932년 중국인 잉치롼(應起鸞)과 결혼하고 허난(河南) 카이펑(開封)에 정착했습니다. 유기석이 톈진 일본 영사관 폭사사건을 주도할 때, 잉치롼이 베이징에 있는 폭탄을 톈진으로 옮겨 유기석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시 스물 다섯의 잉치롼은 최신 유행하는 가죽외투를 입은 신식 여성으로 분장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식 가죽상자에 폭탄 두 개를 담아 들고 태연자약하게 플렛폼을 빠져 나왔습니다. 1928년 가을 어느 날, 잉치란은 난창(南昌)에서 유기석을 처음 만났고, 그 첫인상을 “그의 눈빛은 번쩍번쩍 빛나고 용맹한 기개가 넘쳤으며, 보자마자 깊은 인상을 남겼다”다고 합니다. 장시성(江西省) 여자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학생시위를 주도하다가 공청단(共靑團)에 참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체포 위협을 받고 난창을 떠났는데, 이후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4년간 연애했습니다. 잉치롼의 부친이 나라잃은 이국 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마침내 부친의 승낙을 얻어 류수인과 결혼하고, 결혼 후 남편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인해 아이 넷을 홀로 키우며 가정을 지켰습니다. 1933년 가을, 유수인은 생계유지를 위해 직장을 찾다가 『河南日報』기자로 취업했습니다. 신문사 기자 생활은 1929년 봄, 난징 『東南日報』에서 시작해서 『天津商報』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河南日報』는 매일 보통 신문 크기의 6면을 발행했는데 발행 부수가 14,000부 정도로 황허 유역에서는 첫 손가락을 꼽는 지방관청 신문이었으며 직원만도 100여명이었습니다. 유기석은 『河南日報』의 사설을 썼습니다. 주로 국제적인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는데 사장은 한번 훑어 보고 논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고 문맥상 틀린 부분이 발견되면 몇 글자 고쳐줄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신문사 월급만으로는 가족부양비가 부족해 교원 생활도 겸하여 1937년7월 중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약 5년간 허난에 머물렀습니다.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김과 안 두 성씨가 연명하여 보낸 전보를 받았습니다. 유기석에게 전보를 보낸 김 씨와 안 씨는 누구일까요? 김씨는 김구이고 안씨는 안중근의 친동생 안공근으로 추정됩니다. 유기석은 무정부주의 사상에 편향해서 민족주의 지도자 김구나 안공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전보에는 공산주의도 좋고 아나키즘도 좋지만 오로지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뒤엎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얻은 후에 가능한 것이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항일 혁명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속전속결로 중국을 점령하겠다며 병사력을 증강해 석 달 만에 베이징과 상하이를 점령했습니다. 상하이에 살던 한인들은 대부분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래도 상하이에 일본인과 사업을 하거나 친일파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방치할 수 만는 없었습니다. 안공근은 그의 조카 안후생(安厚生, 1918~) 등 애국 청년을 모아 암살을 목적으로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했습니다.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의 참모이며 연락처는 新天祥里 20호 곧 안공근의 집입니다. 유기석은 이들과 협력을 결심하고 전보를 받은 후 곧바로 9월 초 카이펑을 떠나 상하이로 왔습니다. 난징에 도착한 다음 날, 일본비행기96대가 편대를 이루어 고도의 상공을 날면서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하며 상하이를 점령하기 위해 기세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 민족 독립운동 계열은 한국국민당과 민족혁명당으로 분열되어 혁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기석은 중재를 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선택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2) 유기문이 일본 선박에 폭탄 투척일본총영사 암살을 시도하거나 일본병영을 폭파하고 백주에 은행을 터는 등, 이런 일들은 일제 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거사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테러, 살인, 강도 방화를 자행하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만 유기석은 이와 같은 테러활동이나 사유재산 철폐 같은 직접 행동 방법으로 일제 통치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무정부주의 활동에 참여한 분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입니다. 취안저우 여명중학교에서 형을 만난 유기문도 형과 함께 직접 행동에 참여했습니다. 유기문은 1930년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다음 해, 1931년 1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백정기 숙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 조직인 흑색공포단 결성하는데 형 유기석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천리방이 톈진 일본 총영사 쿠와시마에게 폭탄을 던질 때,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허둥지둥하게 만들기 위해, 유기석은 같은 날 동생 유기문을 만국교 아래 일본 상선 부두로 보내 그곳에 군수 물품 선박 남양환(南洋丸)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천리방이 중가공원에서 일본 총영사에게 폭탄을 던지고 폭파 소리가 들리면 유기문이 군수 물품을 실은 남양환에 폭탄을 던져 그 배를 폭파하기로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기석은 여관으로 돌아와 중가에서 울리는 푹발소리는 들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늦어도 1~2분 이내 만국교 아래에서 울릴 폭발음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0분, 20분이 지나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저녁, 유기석은 베이징의 약속한 장소에서 천리방과 유기문을 만났습니다. 천리방은 폭탄 소리가 나자, 보초가 도망을 쳤는데 폭탄을 하나 더 준비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기문은 천리방이 던진 폭팔음을 듣고 폭탄을 남양환 선박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런데 폭탄이 갑판 위에 떨어지고 배의 선원이 떨어진 폭탄을 곧바로 물속으로 차 던져 사상자 없이 폭탄이 물속에서 폭발했습니다. 유기문은 이 행동을 감행하면서 “자신의 안전도 생각해야 하고 또한 적을 소멸해야 하는 일은 몹시 어렵다. 내가 만일 더 담대하게 선박에 접근하여 수류탄을 던졌다면 성공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염려하는 바가 있어 먼 곳에 서서 폭탄을 갑판 위에 던졌고 결과적으로 폭탄을 낭비하고 말았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이 일은 일제에 큰 손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이 투쟁으로 한인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중국인에게는 한인들의 반일 노선을 각인시키고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남화연맹과 흑색공포단에서 활동하던 유기문은1935년 5월, 엄순봉과 이규호 등과 상하이 거류민 회장 이용노(李容魯)와 친일파 옥빈관 처단 사건에 참가했으나 이후 유기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기석의 전기에도 동생 유기문 말년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 독립운동 활동에서 퇴출했는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일제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1) 유기석의 동지 천리방(千里放)취안저우 여명학교 재직시절, 어린 시절 헤어진 동생 유기문과 상봉했습니다. 유기문은 형을 따라 아나키스트의 길로 들어섭니다. 1931년, 유기석은 중국인 동지들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과 동시에 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를 시도합니다. 톈진 일본총영사 쿠와시마 암살은 천리방이라는 동지가 시도하고 11,000톤급 군수물자 화물선박 폭파는 동생 유기문이 시도합니다. 천리방이 쿠와시마 암살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천리방은 의열단원 이용준(1907~1946)지사의 가명입니다. 이용준은 1907년 충북 제천군 봉양면 원박리에서 출생했습니다. 1925년 3월, 제천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제천군청에 근무하면서부터 신간회에 가담해서 민족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쿠와시마의 집이 중가(中街)에 있는데 대로변 영국 순찰 초소와 약 100m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쿠시마와가 탄 자동차는 대로를 따라 공원으로 들어와 사철나무 울타리를 지나 보초가 서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 자동차는 속도를 줄여 회전하면서 대문으로 들어갑니다. 총영사 주택 입구에 늘 영국 순찰 한 명이 보초를 섰습니다. 쿠와시마는 매일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자동차를 타고 귀가합니다. 쿠와시마 암살은 용감하게 자신을 노출하지 않고 매복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천리방이 공원 관람객으로 가장해 과일 바구니를 안고 벤취에 앉아 총영사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자동차가 회전할 때 수류탄을 자동차 안으로 던지고 과일바구니를 들고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공원 앞문으로 걸가 나가기로 했습니다. 적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허둥지둥하게 만들기 위해, 같은 날 사람을 만국교 아래의 일본 상선 부두로 보내 그곳에 군수물품 선박 남양환(南洋丸)을 폭파하기로 했습니다. 중가 공원에서 폭탄 소리가 들릴 때, 동시에 그 배를 폭파하는 작전입니다. 다음 날, 유기석은 천진에서 발행되는 일본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제 오후 6시, 쿠와시마 총영사가 업무를 마치고 승용차를 타고 관저로 돌아가는데 승용차가 관저 대문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흉한이 자동차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담장을 맞혀 다행스럽게도 사상자가 없었다. 쿠와시마 총영사는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폭탄의 위력이 아주 강하여 전체 공원을 진동시켰고 실내에 걸려 있던 천황의 초상화가 떨어졌다. 쿠와시마 총영사는 이 일로 침식을 잊고 불안에 떨면서 자신의 방심을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기 위해 당국은 관저에서 일하는 중국인을 잠시 모두 구금하고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당일 저녁 7시 20분, 어떤 사람이 백하(白河) 부두에 정박해 있는 남양환에도 폭탄 한 개를 투척했는데 폭탄이 갑판위에 떨어졌지만 바로 이 배의 선원이 물속으로 찬훙에 폭발하여 다행스럽게도 사상자가 없었다. 유기석이 처음 천리방(千里放)을 만났을 때, 천리방은 23~4가량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웅장하고 힘이 있었으나 천리방은 토론을 좋아하지 않고 늘 엄숙한 표정입니다. 길고 큰 얼굴에 눈초리는 약간 치켜져 있고 눈빛이 이글이글하며 영웅호걸의 기개도 보였습니다. 유기석이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흑여(黑游)라고 말했습니다. 이름이 으시시합니다. 떠돌아 다니는 검은 물체라는 뜻입니다. 유기석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아나키스트의 풍모를 암시하는 이름이였으니까요. 본명을 물어 볼 수도 없고 남들이 부르는 것처럼 그냥 천리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천리방도 본명은 아닙니다. 성격이 솔직하고 호방하며 천진하고 낭만적이어서 친구들이 그에게 지어준 별명입니다. 그 자신도 이 이름을 좋아하여 그의 가명이 되었습니다. 천리방은 어려운 일이나 모험적인 행동에는 늘 앞장서서 참가했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은 절대로 애매하게 하지 않고 항상 깔끔하게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유기석은 천리방에 대해 “적 앞에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스텐레스”라고 했습니다. 1938년, 천리방은 탕산(唐山)부근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일본이 무기징역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굽히지 않고 수인을 조직하여 투쟁을 벌이고, 늘 큰소리로 간수들을 질책해서 간수들도 그 앞에서는 무서워 벌벌 떨며 얼이 빠졌다고 합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제 투항 후 석방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춘은 10여년 철창생활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출옥 후 얼마 안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35세정도였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10) 동생 유기문의 수난1920년 가을, 유기석이 집을 떠날 때, 동생 유기문은 11살이었습니다. 동생은 형의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꼭 형을 따라가겠다고 쫒아와서 유기석이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대성통곡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동생은 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유기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며칠이 안 되어 해고 되었습니다. 형이 반역적인 조선인, 반일 인사라는 이유였습니다. 유기문의 일거수 일투족도 감시를 당하는지라 조선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파출소에 가서 출국 증명서를 신청했습니다. 형 때문에 취업도 할 수 없으니, 형을 찾아 중국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하니, 경찰은 형 본받아 반일 학생이 되지 말라고 하면서 아주 빨리 출국허가서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며칠이 지나 상하이 황푸강으로 들어왔습니다. 배가 부두에 닿기 전, 발동선 한 대가 강 가운데서 기선과 접촉해서 사다리를 놓고 경찰이 기선으로 올라와, “누가 유기문인가”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유기문은 주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잡혀갔습니다. 경찰은 유기문에게 본인은 죄가 없지만 형을 체포해야 하니 형에게 샤먼(廈門) 부두로 마중 나오라고 전보를 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형을 팔 수 없다고 거절하자 고문실로 데리고 가서 가죽 채찍으로 때려 10분도 안 되어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물을 퍼부어 정신을 차리면 또 고문했습니다. 유기문이 죽어도 형을 팔 수 없다고 강경하게 버티자 3일 밤낮을 형구로 고문했습니다. 1주일이 지나고 구치소에서 유기문을 샤면으로 압송하면서 “천주 여명 고등중학 유기석, 저는 편안히 상하이에 도착하여 0월 0일 하문에 도착할 예정이니 샤먼 부도로 마중 나오시오, 동생 기문”이라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샤먼으로 압송될 때, 유기문은 배에서 먹겠다며 바나나를 많이 사고, 피곤해서 일찍 잔다면서 침구를 뱃머리에 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도망칠 궁리를 했습니다. 살짝 이불을 밀고 주위를 살펴보니 사람들은 모두 배에 타고 사다리와 발판도 거두어 들었습니다. 배가 출항하기 직전이라 경찰들도 특등실로 간 듯 보이지 않는데 1~2분이 지나니 뱃고동이 울리고 배가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유기문은 순식간에 용기를 내어 갑판 난간에서 부두로 뛰어내려 부두 옆에 있는 석탄 창고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한참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기선이 부두를 떠나 강 한복판으로 멀어졌을 때, 석탄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형의 주소가 적힌 일기장은 일본 경찰에게 뺏겼지만 “프랑스 조계지 貝北路 新天祥 50호”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목선 한 대를 발견하고 4원을 주고 프랑스 조계지로 와서 형의 주소지를 찾아갔습니다. 형의 친구를 만나고 곧바로 형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어제 보낸 전보는 일본 측의 음모이니 샤먼으로 가지 마세요, 동생 기문”.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9일이 지나고 기문이 여명 중학교로 형을 찾아와 꿈에도 그리던 동생과 상봉했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유기석 가족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 (9)리밍(黎明)고등중학교 교사푸젠 신 농촌건설 운동이 실패하고 유기석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돌아왔지만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일제 밀정들이 시시각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정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론가 떠나야 했습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유기석은 비밀히 조직된 무정부주의 불멸 구락부에 가맹했습니다. 활동비는 중국 측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고 구락부 동지 중 최동길은 다니던 복단대학을 중퇴하고 고향 집에서 송금해 오는 학자금을 이들의 의식비로 제공했습니다. 취안저우의 리밍(黎明) 고등중학교가 떠올랐습니다. 이전에 신 농촌운동에 종사했던 친구들이 방침을 바꾸어 취안저우 시내에 설립한 학교입니다. 공산당이 푸젠성 서쪽 농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홍군을 훈련하는데 힌트를 얻은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만의 민중 무장 활동 근거지를 취안저우에 마련하려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기지가 설립되자 스촨ˑ 후난ˑ광둥 등지에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이 취안저우를 무릉도원쯤으로 보고 잇달아 몰려왔습니다. 리밍 학교는 국민당 고위급 인사를 명예 이사장으로 추대해서 토비들도 감히 학교 운영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방위군’이 주둔하여 취안저우 정세가 다소 조용해졌습니다. 리밍 고등중학교 교사들은 대부분 아나키스트이며 수준이 비교적 높았습니다. 한국에서 농업을 전공한 원예전문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이 생물 교사로 재직하고 허열추(許烈秋)도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취안저우까지 가려면 여비가 적어도20원은 있어야 하는데 유기석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가난하여 빌릴 데도 없고, 군중(群衆)서점 사장을 찾아가 책을 한 권 써주기로 하고 원고료40위안을 선불로 받아 여비를 해결했습니다. 유기석이 리명 학교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리 교사가 결원이어서 지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많은 지방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중국 큰 도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고, 영어 지리책과 일본 책 『세계 지리 대계』를 참고해서 외국 지리를 가르쳤는데 수업이 재미있다고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체육 교사도 결원이라 지리와 체육 교사를 겸임했습니다. 매일 아침 체조 시간이 있는데 학생들이 늦잠을 자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설령 나온다고 하더라도 맨발이나 나막신을 신고 나왔기 때문에 달리기나 비교적 어려운 체조는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체육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과목이라고 여기며 교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임 체육 교사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더니 학생들이 쫓아내려고 해서 전임 체육 교사가 사직해서 결원되었다고 합니다. 유기석은 체육을 좋아하고 학생 시절 축구선수였습니다. 학교 측과 상의하여 아침 체조를 필수 과목으로 정하고 체조 시간에 출석을 불렀습니다. 아침 체조15분 전, 학생 숙소 앞에서 피리를 불어 운동장에 나올 준비도 시켰는데 학생들과 친근감이 형성되어 인기가 좋았습니다. 교장이 병이 나서 유기석이 교장 직무 대리도 맡았습니다. 1930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1931년 두어 달 교장직을 수행했는데 학교 측 이사와 교사 사이에 분규가 생겨 유기석은 교장 대리직무를 내어놓고 리밍 고등중학교를 떠났습니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