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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챗 모멘트에 금지품 판매광고 함부로 올려서는 안돼"위챗 안전센터"는 위챗 개인계정의 금지품 판매정보 발표에 관한관리공고를 발표했다. 위챗은 안전하고 건강한 친환경적인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위챗팀은 위챗 개인계정을 이용하여 특정상품판매정보(예를 들어 담배, 전자담배 등)를 발표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금지품판매정보(예를 들면 최음약, 불법 보건품 등)를 발표하는 행위를 포함한 금지품 판매정보 발표행위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위법 행위는 사용자의 정상적인 사용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사기 등 악의적인 행위를 쉽게 파생시킬 수 있다. 위챗 개인계정의 정보발표행위를 규범화하고 위챗 사용자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위챗 개인계정은 어떠한 형식으로도 각종 "금지품" 판매 정보를 발표, 전시, 전파하는 경우 위챗팀은 국가 관련 법률과 규정에 따라 단속할 것이며 그외에 "텐센트 위챗 소프트웨어 허가 및 서비스 계약", “위챗개인계정사용규범"에서 규정한 정도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초기 또는 일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경고 메시지 또는 기능 제재가 적용된다. 여러 차례 또는 심각하게 법규를 위반했을 경우 관련 계정에 대해 제한 처벌이 뒷따른다. 2023 년 1 월부터 현재까지 사용자의 신고 증거를 확인한 결과 “금지품”판매 정보를 게시한 위챗계정 7,236개, 위챗 그룹채팅 1,871개에 대해기능 사용 제한이나 로그인 제한 등 처벌을 내렸다. 공민이 인터넷에서 불법 금지품을 판매하는 행위는 “형법”, “치안관리처벌법” 등 관련 법규를 위반한 행위에 속한다. 사용자가 개인계정, 그룹, 모멘트 등 기능을 통해 불법 금지품 판매정보를 올리는 것 역시 위법 행위에 속한다. 친구를 도와 모멘트, 위챗그룹에 불법 금지품을 전달하여 홍보하고 판매하는 행위는 양자가 모두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위챗을 사용할 때 주동적으로 금지품 및 특정 상품의 판매범위에 대한 국가의 법률규정을 따르고 관련 법률법규 및 플랫폼규범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담배판매허가증관리방법"규정에 근거하여 정보네트워크를 통하여 불법으로 담배를 판매해서는 안되며 감독관리부문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규정을 위반하고 약품 또는 의료기기의 홍보 내용을 발표해서는 안된다. 위챗팀은 위법 및 규정 위반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플랫폼 관리를 전개하는 동시에 법에 따라 관련 부서에 협조하여 공동 단속할 것이다. 만약 위챗을 사용하면서 위법 행위를 발견하면 즉시 클라이언트(客户端) 또는 텐센트 가디언즈애플릿(腾讯卫士小程序)을 통해 신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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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서응호 3 - 의열단 가입페이잉학교에 재학하던 중 중산대학에 재학하는 조선인 학생으로부터 의열단 재무부장 권준(權晙, 1895~1959)을 소개받았습니다. 권준은 산책하자고 중앙공원으로 서응호를 데리고 갔습니다. 권준은 서응호에게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이 있는데 조선인으로서는 누구라도 조선 독립을 바라지 않는 자가 없을 테니. 당신도 그것에 가입하여 서로 독립을 위해 노력하자”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서응호는 학업을 목적으로 도항한 자이고 나 같은 학생이 그것에 가입해도 별로 의열단에 이바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권준은 “학생들도 많이 가입해 있다. 또 가입한다 해도 반드시 건물을 파괴하거나 대관을 암살하는 게 아니라 각 사람 나름대로 합당한 활동을 하면 되니 꼭 가입하라”고 간곡하게 권면을 해서 서응호는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1925년 가을, 광저우에 체류하는 의열단원이 약 60여 명이었습니다. 김원봉이 의열단 본부를 광저우로 옮기고 의열단원을 인솔해서 광저우로 왔습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 12명이 황푸군관학교 제4기에 입학하고 또 일부 단원 10여 명은 중산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리하여 1926년 말 광저우에 체류하는 의열단은 약 100명이 넘었습니다. 1927년 봄에는 광저우에 집결한 한인은 8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23세였습니다. 일부 중학생은 열너덧 살밖에 안 되었고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도 마흔이 채 안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중국의 관내 및 동북 지역, 그리고 소련, 일본 등지에서 중국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광저우를 찾아온 유능한 청년 지사들이었습니다. 한국의 활동적인 젊은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거의 광저우에 집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 약 250명이 중산 국립대학과 황푸 군관학교에 학적을 두었습니다. 서응호는 의열단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페이정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산대학교에 입학한 서응호는 실력이 있다고 교민들로부터 꽤 신임을 얻은 편이었습니다. 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의열단은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김원봉은 “종래 의열단은 대관 암살과 건축물 파괴에만 몰두해 있었는데,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라고 일반의 비판을 듣는 바, 장래에는 단원을 중국 군대에 입대시켜 군사교육을 받게 하고 이들을 남북 만주에 산재해 있는 각 독립단체에 보내어 단원의 군사훈련을 지도 교양하고 조선 내에 밀파하여 직접 행동에 나서게 한다는 취지를 발표했습니다. 또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물질적 원조를 얻기 위해 의열단 창립 이래 조선 독립을 위해 단원들이 활동한 실적, 중국혁명군에 입대하여 활동한 공적과 상황을 연혁으로 만들고, 중국혁명의 완성이 조선 혁명운동에 이익이 되는 이유를 서류로 작성하여 중국국민당 광둥성 당부에 제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926년 12월, 제2차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서응호는 재정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새롭게 구성된 의열단 집행위원들은 의열단의 취지 강령을 선전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연락을 유지할 방법으로 매월 1회 「우리들의 道」란 제목으로 의열단 단보를 발행했습니다. 의열단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지만 의열단 단보 1호를 반지판(半紙版) 8면짜리 150부를 인쇄하여 광둥, 상하이, 한커우 있는 단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2회「의열단보」는 경비가 없어서 3월 중순에 80부를 인쇄해서 배포하고 3회부터는 발행하지 못했습니다. 또 단원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광저우 상하이, 한커우, 베이징 및 한국과 러시아 내에 지방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중산대학, 황포군관학교 내에 소재하는 입오생부에 지방부를 설치했습니다. 서응호는 의열단 광저우 지방부 책임 간부로서 1927년 4월 중산대학 문과 강당에서 의열단 단원 약 20명을 집합시키고 광저우 지방부 대회를 열었습니다. 광저우 지방부가 조직된 경과를 보고하고, 신입 단원 소개 및 중앙집행위원회 결의 및 논의 사항 등을 참석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당원 훈련 방법으로서 각자가 항시 혁명 사상 함양에 힘쓰고 이에 관한 서적과 신문 잡지 등의 구독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가끔 토론회를 열어 지식 교환을 할 것을 권했습니다. 참고자료 서응호 공판조서 1939년 11월 29일님 웨일즈ˑ김산, 『아리랑』, 동녘, 2011년3월.「서응호 신문조서」(제2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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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서응호 2 - 서응호는 어떻게 광저우까지 오게 되었을까요?서응호는 고향인 함경남도 덕원군(德原郡) 적전면(赤田面) 신풍리(新豊里)에서 소학교와 중학을 졸업했습니다. 이어 원산(元山) 공립보통학교와 원산 보광(保光)학교 고등과도 졸업했습니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서응호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자형과 누나가 있는 간도(間島) 롱징(龍井) 쥐즈가(局子街, 현재의 옌볜)로 건너갔습니다. 누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장사를 하고 자형은 롱징의 푸차오 신한촌(浦潮 新韓村) 일본 헌병대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서응호는 롱징에서 여인숙을 경영하기도 하고, 일본 영사관의 통역도 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며 모종의 운동을 계획하다가 다시 원산으로 돌아와 덕성학교(德成學校)에 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그러나 취직 생활은 순탄하지 못해서 전분 회사, 협동운송부 등에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다가 1919년, 롱징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창제(昌濟)병원에 통역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창제병원에 근무하면서 서응호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나가 유학경비로 매월 40원씩 보조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사업이 실패해서 약속한 학비 지원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낙담해 있던 중 중국 상하이는 학비가 적어도 공부할 수 있고 또 미국으로 도항하기도 편리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상하이로 가기 위해 창제병원을 사직하고 그간 저축한 돈 80원을 여비로 삼아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1921년 3월, 서응호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도착했으나 아는 사람도 없고, 가져온 돈도 다 떨어져 여기저기 무위도식하던 중 식당을 운영하는 선우혁(鮮于赫, 1883~1985)의 부인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인성학교 교사 합숙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서응호는 8월까지 그 숙소에서 자취하며 전심으로 영어를 독학했습니다. 마침 미국인이 경영하는 상하이 삼육대학 토목과는 첫 한 학기 학비만 내면 그 후는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 부모님께 간청했더니 마차를 팔아서 학자금 100원을 보내주었습니다. 삼육대학에 입학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동포가 자기도 고향에서 200원이 곧 송금되는데 돈이 도착하면 갚을 테니 빌어달라고 애걸해서 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포는 고향으로부터 돈을 받고도 갚지 않아 결국 서응호의 삼육대학 입학은 무산되었습니다. 1921년 9월 상순, 학비가 무료인 광둥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여운형(呂運亨, 1885~1947)이 광둥 독군(督軍) 천죵밍(진형명, 陈炯明, 1878~1933)과 중국인 목사 장 모 씨 앞으로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소개장을 받아 본 장 목사는 현재 쑨원이 광둥성을 진격하는 중이고 천죵밍은 매우 다망하므로 본인의 소개로는 천죵밍을 면회할 가망이 없으니 영남대학 교장 종롱광(锺荣光, 1866~1942)을 통해서 천죵밍 면회를 신청해 보라고 소개장을 써 주었습니다. 서응호가 장 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종롱광 영남대학 교장을 방문했습니다. 그 무렵, 쑨원은 광시 군벌 루잉팅(陸榮廷, 1859~1928)을 베트남으로 쫒아내고 지속적인 북벌 전쟁을 구상하는 중이었습니다. 종교장은 현재 전쟁 중이라 비행학교는 폐쇄 중임으로 시국이 안정되면 입학하라고 권고해서 비행학교 입학도 무산되었습니다. 서응호가 미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한다고 하자 김상훈이 6개월분 학비와 월사금을 지원해 주어서 1922년 3월, 미화(美華)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한 학기를 수료하고 다음 학기 학비가 없어 중퇴하고 상하이로 갔습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돌아와 함경남도 북청(北靑) 출신 정유린(鄭有隣) 집에 기거하면서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경영하는 남화(南华)학원에 입학해서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남화학원에서도 학비를 낼 수 없어서 1923년 3월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광둥에 있는 김상훈이 자신이 재학 중인 페이잉(培英)학교 교장에게 서응호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더니 교장이 동정하여 그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광저우로 오라고 연락했습니다. 서응호는 다음 날 상하이를 출발하여 광저우로 왔고, 광저우에 온 지 약 4~5일 후에 페이잉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本町署(본정서)에 檢擧(검거)됐든 의열단사건진상(義烈團事件眞相)」,『동아일보』, 1929년 11월3일.「서응호 신문조서」(제2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0,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8월, 陳錫祺 主編,『孫中山年譜長篇』下冊, 中華書局, 2003년11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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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인역사] 서응호 1 - 서응호가 졸업한 페이잉중학교광저우시 팡춘 바이허동(白鶴洞) 페이잉(倍英)중학교는 광저우에서 손꼽는 중점학교입니다. 1920년대, 가난해서 학비가 없었던 고학생 서응호가 미국인 교장의 특별후원으로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하고 졸업한 학교입니다. 서응호의 학구열이 뜨겁기도 했지만 외국인 학생을 받아준 교장이 고맙기도 하고 페이잉학교 교정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2013년 12월 29일, 바로 10년 전 이맘때 페이잉(倍英)중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캠퍼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지라 멀리서라도 교정을 한번 보겠다고 갔는데 마침 교문은 살짝 열려 있고 수위가 자리를 비웠네요. 태연자약하게 마치 학교에 볼일이라도 있는 듯 교문을 들어섰습니다. 겨울이지만 사계절이 늘 푸른 광저우, 그날은 햇살이 따스해서 마치 봄날 같은 겨울 오후였습니다. 교문을 들어가 몇 발짝 걷지 않았는데 눈앞에 동화를 보는 듯한 아기자기한 5층 종탑이 나타났습니다. 주황색 유리 기와의 팔각 원형지붕 아래 옛날 시골에서 보던 교회 종이 달려 있네요, 아래층에는 붙박이 시계와 “信(신), 望(망), 愛(애)”라는 세 글자, 연세대학교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독수리 형상, 자그마한 미닫이 창문, 기독교적 함의가 물씬 풍기는 종탑입니다.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보고 오면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페이잉중학교는 1866년 미국장로회에서 중국으로 파송한 나하례(Willian Dean Noyes ~1914) 목사가 설립한 학교입니다. 목사 가정에서 성장한 나하례는 중국의 태평천국이 기독교로 시작되었으나 총칼로 통치하다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알고 중국에 제대로 성경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1866년 30세가 된 나하례는 부인과 두 살 된 아들을 데리고 109일간 소형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홍콩을 경유해서 광저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1년이 못되어 죽고 나하례마저 큰 병에 걸렸습니다. 나하례의 동생 나하리(Harriet Newell noyes ?~1924)가 인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올케가 죽고 오빠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오빠를 돕기 위해 광저우로 왔습니다. 나하례는 광저우에 온 지 10년이 지나서야 교회를 시작하고 1879년 광저우시 사지(사기, 沙基) 통더대가(동덕대가, 同德大街)에 안화당(安和堂)이라는 학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수년 후 1887년에 팡춘 청송원(聽松園) 부지 1만 평을 사고 안화당 학교를 이전하여 페이잉서원(培英書院)으로 개명하고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나하리는 1872년 부녀자와 여자아이 6명을 데리고 페이잉서원과 인접한 곳에 진광(眞光)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성경 구절 중에 “참 빛”.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근거로 학교 이름을 “진광(眞光)”이라고 지었습니다. 나하례의 여동생이자 나하리의 언니 마샤(Martha Noyes, 1840~1925)도 1873년에 광저우로 왔습니다. 그때 마샤는 33세 미혼이었습니다. 동생이 운영하는 진광학교를 돕고 미국 북미장로회가 설립한 박제의원(博濟醫員)에서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현재 손중산기념병원 “중산대학 제2병원”의 전신이 박제의원입니다. 박제의원을 설립한 켈(John G.Kerr) 목사의 두 번째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46세의 마샤는 켈과 결혼했습니다. 마샤는 결혼 후 진광학교 사역을 그만두고 남편과 중국 최초의 정신병원이 되는 혜애(惠愛) 병원을 팡촌에 설립했습니다. 나하례는 48년간 사역을 하고 1914년 1월, 78세의 나이로 소천했습니다. 페이잉중학교의 5층 종탑이 들려주는 나하례 목사 삼 남매가 광저우에서 실천한 “신ˑ망ˑ애” 이야기입니다. 참고자료 김현숙 지음, 『시님의 빛』, 황금종,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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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앞선 한국기술을 중국 규모 경제에 싣어 사업성공, 거인스마트크레인 윤용기 대표윤용기 대표는 현재 중국 크레인업계 선두, 거인그룹과 공동투자 합작사인 중한스마트크레인제조유한공사(巨人中韩智能制造有限公司) 대표로 한국 무인자동화 크레인 기술을 중국 크레인 시장에 확장시키고 있는 애국 인물이다. 그는 중국지도에 1,000여개 제철소 위치에 점을 찍으며 한국 십여 개 밖에 안되는 제철소 시장과 비교, 중국 규모의 경제에 바로 감을 잡았다. 2015년 당시 한국 제철소에서 사용되는 크레인들이 일찍이 무인자동화 크레인으로 도입된 것에 반해 중국 크레인 업계는 무인화 보급이 대중화되지 않았다. 이를 보고 한국의 기술력을 중국 크레인 업계에 장착하는 사업구상을 하게 되고 당시 <중국제조 2025>를 분석하며 사업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거인스마트크레인은 최근 중국경제 상황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한중기업 합작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합작사 리더로서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고 경영하는가? ‘성장동력’, ‘다음세대(Next Generation)’ 매일 시간을 내어 이 두 단어가 사업과 조직에 어떤 역할을 하고 적용을 할 것인지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함께 하고 있는 거인그룹의 경영과 미래의 성장동력을 찾는 것이 주요 업무이며, 직원들한테도 이 두 가지를 위한 가치와 사고를 끊임없이 이끌어 내어 나만의 경영철학을 담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내 자신을 위한 숙제이기도 하다. 거인스마트크레인은 중국시장에서 어떤 우의를 갖고 있는가? 거인 무인자동화크레인은Pilot 현장을 운영한다. 세계에서 유일하다. 각각의 고객들이 갖는 현장의 환경을 Pilot공장에서 먼저 재현하고 그 결과를 각 현장에 공급한다. 시간적인 안정과 함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시킨다. 합작사6년차를 보내며 중국사업을 잘하기 위해 특별히 힘쓴 것이 있다면? 특별히 없다. 단지 중국문화를 가장 기초로 두고 생각한다. ‘중국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것이 보여진다’라는 마음이 항상 함께 하고 있다. 짜증날 것도 없고, 화 날일도 없다. 모든 것을 즐거운 기대감으로 받아들인다. 과거 중국 기차여행으로 단련된 그들의 중국문화와 습관의 이해가 어느덧 나의 무기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중국 사업도 문화로 접근해 갔을 뿐이다. 중국 친구들과 인연이 사업을 만들어줬다. 중국인 친구들과 10년, 20년지기 친구들이 많다.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도 과거 나의 제자이다. 꽌시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꽌시가 ‘안되는 것을 되게 할 수 있는 불법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은 위험한 해석이다. 꽌시는 믿음의 출발이며 상생의 원천이다. 하루 최소 10분이라도 독서에 몰입한다. 하루라도 손에서 책을 놓으면 죽은 목숨과 같다는 마음으로 자기관리를 위한 노력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금도 중국시장에 관심있는 사업자가 있다면? 한국의 앞선 기술력 아이템이 있다면 도전하라고 하고 싶다. 아이템을 가져와 좌판(플랫폼)에 깔아 놓고 팔려고만 하는 생각과 방식은 끝났다. 반드시 사업 강점을 드러내어 고객이 찾아오게 해야 한다. 고객을 찾아오게 하는게 어렵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중국을 싫어하면서 중국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팔려고만 하는 사업 마인드와 같다. 아이템의 고객을 연구하고 부가가치를 올려야 한다. 결국은 중국을 좋아하고 그들과 깊은 교감을 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2% 부족함이 있어도 중국인들은 새로운 것의 시도가 아주 강하다. 그들이 부족한 2%를 난 한국 기술력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중국의 규모의 경제는 아직도 많은 곳에 있다. 아직도 연해지역으로 한국 사업자들이 집중되어 있는데, 중국 3, 4, 5선 도시를 뉴스나 자료에서만 보지 말고 직접 찾아 가서 부딪쳐라. 모방을 두려워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사업은 힘들다. 모방을 기뻐해라, 끊임없이 혁신을 하게하는 원동력으로 사용하면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 거인스마트크레인 홍보영상 관람 인터뷰를 마치며 윤용기 대표가 보는 중국, 그의 사업 마인드에서 ‘희문락견(喜闻乐见)’ 기쁜 마음으로 보고, 듣고, 반기다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그의 중국 사랑은 중국 지방정부가 명예시민으로 인정할 정도로 뜨겁다. 많은 기업이 중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윤용기 대표는 한국기술이 앞서 있는 업종이라면 중국에는 아직도 기회가 있다고 강조한다. 윤용기 대표 오랜 제자이며 현재 함께 일을 하고 있는 형요룡 과장과 거인스마트크레인 설비 현장 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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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국 크레인업계 선두, 하남거인그룹(河南巨人集团) 한홍쥔(韩红军)회장중국에서 하남성(河南省)은 철강 생산기지로 유명하며, 특히 철강산업 중 중국 전역의 크레인 공급의 약 70%가 하남성 창웬지역에서 제조되고 있다. 거인그룹 역시 1987년, 하남성 창웬에서 설립되었고 회사이름이 도로명(거인대로)이 될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2017년 한국 포항제철과 스마트화 크레인을 합작개발하여 현재는 중국 크레인 업계에서 자동화, 스마트화, 무인화의 선두업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거인크레인은 무인 스마트당직 크레인, 유럽식 크레인, 전기호이스트, 다리형 크레인, 문식 크레인, 주조크레인, 브리지크레인, 소형 크레인 등 연구개발에서 제조, 설치, 판매, 서비스까지 원스톱으로 오랜 경험과 신기술력으로 업계에 큰 차별화를 이끌고 있다. 거인크레인은 중국 내수를 포함 동남아, 아프리카 등 10여개 국가로 크레인을 전문 수출하고 있다. 거인그룹이 한국기업과 합작하게 된 계기는? 중국말에 “차별화가 없으면 가게를 열지 말라(没有特色别开店)”는 말이 있다. 거인그룹은 창업이래 항상 업계와 다른 차별화를 모색하며 성장해 왔다. 시대 변화에 따른 스마트화 크레인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사업파트너 윤용기 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은 일찍이 무인 스마트크레인이 도입되었지만 중국은 당시 설비에 무인화 개념이 보급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2017년부터 한국과 합작을 하게 되었고 거인그룹은 빠르게 중국 크레인 시장에 스마트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한중합작 성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우 만족한다. 한국의 신기술을 도입해 중국에서 최초로 시멘트크레인, 폐기물크레인, 스테인리스크레인 등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사람을 대신해서 크레인을 작동한다는 의식이 없다보니 고객들이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고객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무인화가 대세로 거인크레인의 스마트화는 전체 30%를 차지하며 빠른 발전속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업계에서도 우리 기술은 인정받고 있다. 외국기업 중국진출을 위한 조언 3가지를 말해 준다면? 첫째, 성공하려면 반드시 좋은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想要成功要找好的合作伙伴) 둘째,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문화를 많이 이해해야 한다.(双方互相尊重,多了解双方的文化) 셋째, 넓은 아량을 가지고 따지지 않고 서로 이해해야 한다.(要有宽阔的胸怀,不计较,互相理解) 한국 파트너 윤용기 대표와 대화를 나눌때 자주 듣는 말이있다. “좋은 뜻인가요? 좋은 뜻이면 됩니다.(好的意思吗? 好的意思就可以了)” 업무적으로 소통을 할 때나 의견조율이 필요할 때 그는 크게 따짐이 없다. 서로의 신뢰가 가장 기본이기에 우리는 긴 설명이 필요없이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된다. 사업을 하면서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나의 스트레스 관리는 평범하다. 등산을 하던가,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잔다. 보통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있으면 잠을 못잔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있으면 잠이 온다. 그리고 잠을 푹 자고 나면 정신이 맑아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인생에 3대 슬픔이 있는데, “돈이 많아도 다 쓰지 못하는 것, 잠이 와도 이루지 못하는 것,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有钱花不完,有觉睡不着,有酒喝不醉)이다” 다행히 나는 이런 슬픔으로 괴롭지는 않다. 후배 사업가들에게 한 마디 반드시 부지런 해라! 과거 젊은 시절 나 자신에게 항상 하는 말이 ‘힘들어 죽지 않으면, 죽을 힘을 다해라(累不死就往死里干)’ 였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성공이 가깝게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조급하게 일하지 말라. 지나치게 높은 곳을 보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며 나아가면 된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이 세 가지를 중시한다. 옷맵시(看衣服), 얼굴(看脸), 눈(看眼睛) 단정한 외모는 상대를 배려함과 동시에 나의 태도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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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 딱정벌레(隐翅虫)때문에 내 얼굴이 망가질뻔 했다’는 내용이 온라인에서 화제최근, ‘내 얼굴이 로브 딱정벌레 때문에 망가질 뻔 했다’는 내용이 온라인 실검에 올랐고 많은 누리꾼들은 자신의 사진과 경력을 공유하였다. ‘벌겋게 부어오르다가 물집이 생기고 나중에야 물집이 터졌는데 정말 많이 아팠다. 다행히 흉터는 남지 않았다.’ ‘이 벌레는 쳐서 죽이면 안된다. 체내에 산성 독액이 있기 때문에 피부에 닿았을 때 비눗물로 씻어 중화(中和)시켜야 한다.’ 로브 딱정벌레(隐翅虫)는 딱정벌레류에 속하며 개미처럼 생겼으며 몸 길이는 1cm를 넘기지 않는다. 로브 딱정벌레는 스스로 사람을 물지 않으나 피부에 닿았을 때 사람들은 쳐서 죽이는 경우가 많다. 이때 대량의 독액이 나오는데 산성이 높아 인체 피부를 부식하게 만든다. 때문에 로브 딱정벌레를 보았을 때 바로 죽이지 말고 털어내기만 하면 된다. 로브 딱정벌레 피부염은 일종의 급성 수종성 피부병이며 남방 지역에서 여름에 많이 발생하며 전체 피부과 질병의 9.3%를 차지한다. 로브 딱정벌레의 체내에 pH치가 1~2의 산성액체가 있으며 잡초가 많고 습한 곳에서 생존하며 날씨가 더울수록 활동이 빈번해진다. pH치가 1~2이면 이미 강산에 속하며 일상 생활속의 화장실 세정제의 pH치가 약 2좌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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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AI 분야 일자리 수요 폭발적 증가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따르면 챗GPT 열풍이 신규 고용주의 수요를 자극하면서 인공지능 산업이 중국 졸업생 취업시장의 하이라이트가 됐다고 보도했다. '2023학년도 대졸자 취업 데이터 보고서'에 따르면 AI분야에서 관련 일자리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2.5% 늘었다고 한다. 또한 알고리즘, 딥 러닝 및 자연 언어 처리(NLP)와 관련된 모든 작업은 ChatGPT와 같은 서비스를 개발하는데 필수적이며 대규모 언어 모델 분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업 중 하나라고 말했다. 최근 SNS에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 있는 전자과기대에서 자연어처리를 전공한 학생은 메이투안, 인인, 샤오미, 닝더(寧德)시대, 순펑(順丰) 등 5개 회사로부터 채용통보를 받았다고 글을 올렸다. 인공지능 외에 신에너지·신소재 업종도 전년 동기 대비 각각 93.9%, 30% 증가해 '2023학년도 대졸자 취업 데이터 보고서'에서 분석한 18개 신흥 분야 중 취업이 두 번째로 빠르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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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으로 인민폐 국제 영향력 개척해야올해 들어 인민폐의 국제준비통화, 지불통화 등 기능이 강화되면서 중국과의 통화 관련 조치를 적극 추진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 실제로 중국 경제의 성장과 대외 개방 수준의 향상과 함께 인민폐의 국경 간 결제, 투자 금융, 비축(储备) 및 가격 책정 등 국제 통화 기능이 전면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인민폐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현재 준비통화 기능에 대해 IMF가 발표한 공식 외환보유 통화 구성(COFER) 데이터에 따르면 2022 년 4 분기까지 전 세계 외환보유에서 인민폐가 차지한 비중은 약 2.7% 였고 주요 기축통화 중 5위를 차지한다. 2022 년 5 월 IMF는 위안화의 특별인출권(SDR) 가중치를 10.92%에서 12.28%로 조정해 인민폐의 자유로운 사용 확대에 대한 긍정적 신호로 해석된다. 지불 통화 기능면에서 국제은행통신협회(SWIFT) 데이터를 따르면 2023 년 2 월 위안화의 국제 지불 점유율은 약 2.19% 로 세계 5위 지불통화로 되었다. 투자 및 자금 조달 통화 기능면에서 “2022 년 인민폐 국제화 보고서”에 따르면 2021 년 말까지 해외 주체가 중국내 인민폐 주식· 채권· 대출· 예금 등 금융자산은 10 .83만 억위안으로 전년 대비 20.5% 증가했다. 중국 경외 인민폐 시장은 점차 회복되어 거래가 더욱 활발해졌다. 2021 년 말까지 주요 해외 시장 위안화 예금은 1.5만 억위안에 가깝다. 한편, 중국인민은행은 2021년 말 현재 40개 국가 및 지역의 중앙은행 또는 통화당국과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했으며, 총 금액은 4만억 위안, 유효금액은 3.54만억 위안에 달한다. 현재 중국은 인민폐의 국제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인민폐의 국제화를 부단히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제2대 경제체이자 제1대 화물무역국으로서 현재와 미래에 인민폐의 국제화에 넓은 발전 공간을 주었다. 중국은 현재 인민폐 국제화를 실현하는 유리한 환경을 넓히고, 국제통화시스템의 탈달러화 추세의 유리한 시기를 잡아 “일대일로”가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양호한 분위기를 만들며 인민폐가 더 많은 국가로 진입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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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산토우 고속철(广汕高铁), 9월 개통예정광저우-산토우 고속철도(广汕高铁)는 광동성에서 처음으로 건설을 주도한 시속 350킬로미터의 고속철도로 광저우(广州), 후이저우(惠州), 선산(深汕)특별합작구, 산웨이(汕尾)를 경유한다. 전체 노선에 8개의 역이 있으며 산웨이역 외에 광저우(신탕)부터 산웨이여객전용선 신탕역, 정청남역, 뤄푸산역, 보로역, 후이청남역, 후이동남역과 심산역까지 총 7개의 역을 신설하였다. 선산역(深汕站) 선산역은 선산특별합작구 츠스진(深汕特别合作区赤石镇)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선산합작구 내의 고속철역에는 하선철도 허먼역(鲘门)이 하나 있다. 2017년에 광저우-산토우 고속철이 착공되어 선산 합작구에 선산 터미널이 설치되었다. 올해 9월 30일, 광저우-산토우 고속철이 개통되면 광저우에서 선산합작구까지의 출퇴근 시간은 한 시간 이내로 단축될 것이다. 광저우-산토우 철도 외에 선산역은 동시에 선산 고속철도를 도입할 것이다. 계획에 따르면 광저우-산토우 고속철도와 선산 고속철도가 선산역에서 합류하며 심산역의 총 규모는 5대 13선이며, 그중 선산장(深汕场)은 2대 6선, 광산장(广汕场)은 3대 7선이다. 선산합작구는 선산역을 중심으로 선산종합교통중추를 건설할 계획이며, 프로젝트는 선산합작구 계획 "1주, 1부, 3역" 중추 체계의 주요 중심이며 선산합작구에서 "심천과 30분 거리, 광저우와 1시간 교통권"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담체라고 밝혔다. 2025년에 선산 고속철이 개통되면 선산 합작구에서 난산 시리(南山西丽)까지의 운행시간이 30분 이내로 단축되고 핑산(坪山)까지는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신탕역(新塘站) 광저우시 정청구(广州市增城区)에 위치해 있으며 역 규모는 7대 17선이며, 일반철도, 도시간 위주로 고속철도를 보조로 하며, 남쪽은 수완심도시간 철도의 신탕남역과 인접하여 환승하면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앞으로 신탕역은 광저우 동역, 광주역과 연결되고 구이광, 남광, 광저우, 심무철도 및 경광통로와 연결되며 주삼각 핵심지역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광동성 서부, 남부 지역까지 연결된다. 정청남역(增城南站) 증성남역은 광저우 정청구(广州市增城区)에 위치해 있으며 신성대로와 인접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역의 총 건축면적은 9,997평방미터이며, 그중 통신, 정보, 전력 등 설비용 건물로 병합되었다. 역의 길이는 163미터이고 깊이는 60미터이며, 인원이 가장 많을 때 약 1,000명 정도 되며 중형철도 여객터미널이다. 후이청남역(惠城南站) 후이청남역은 후이저우시 후이청구(惠州市惠城区)에 위치해 있으며 광저우-산토우 철로 연선 신축역 중 가장 큰 역이며 후이저우 핵심구 종합 교통 중심지이기도 하다. 뤄푸산역(罗浮山站) 뤄푸산역은 후이저우시 보로현 창닝진(惠州市博罗县长宁镇)에 위치해 있으며 시정부대공사 부지규모가 8,500평방미터이며, 그 중 역 광장, 시정도로와 1만 6,000평방미터의 지하주차장, 주차공간 500개가 포함된다. 현재 역의 본체는 이미 완성되었고 마지막 바닥 공사를 하고 있다. 보로역(博罗站) 보로역은 후이저우시 보로현성구(惠州市博罗县城区) 서남측 7.5킬로미터에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총 건축면적은 약 8만평방미터이고 수용할 수 있는 최고 인원수는 800명으로 중형철도 여객터미널이다. 현재 보로역 건설 공사가 질서있게 진행 중이며 열차가 개통되면 보로에서 산웨이까지의 통행 시간이 1시간 내로 단축될 것이다. 후이동남역(惠东南站) 후이둥난역은 후이저우시 후이둥현(惠州市惠东县)에 위치해 있으며 역의 건축면적은 7990.6평방미터이다. 역 건물의 본체는 지상 1층, 일부는 2층, 본체의 높이는 18.5미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