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목록
-
중국 내륙 임산부, 홍콩에서 14개월 징역 받아최근, 중국 내륙의 모 여성이 홍콩 입경수속을 진행할 때 홍콩 입경처 직원에서 임신한 사실을 숨겨 홍콩입경처로부터 기소되었다. 3월 22일, 홍콩 샤틴(沙田)재판법원은 상기 여성에게 징역 14개월을 처했다. 피고는 올해 26세이며 여행객신분으로 홍콩에 도착해 예약하지 않는 상황에서 홍콩 병원의 응급실에서 아이를 분만하였고 홍콩 입경사무처는 이로 인해 그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인원은 피고인이 홍콩 도착전 중국 내륙에서 산전검사를 진행한 것을 발견하고 내륙에서 받은 검사기록을 증거로 확보하였다. 나중에 피고는 '홍콩으로 온 목적은 홍콩에서 아이를 출산하기 위한 것이고 입경수속을 받을 때 홍콩입경처에서 임산한 사실을 숨겼다'며 인정하였다. 홍콩입경처 관계자는 '현행 법률규정에 따르면 홍콩 입경시 입경처직원에 거짓을 하면 법을 위반한 것에 속하며 벌금금액은 최고 15만 홍콩달러 및 14년 유기징역을 받을 수 있다'며 전했다.
-
생전에 85만 위안 대출해 인플루언서에게 다샹(打赏), 남은 채무 어떻게 할까?최근, 광동 불산의 이여사는 '어머니가 생전에 남성 인플루언서에게 85만 위안 다샹(打赏)하고 거액의 채무를 남겼다'며 제보하였다. 이여사는 '어머니는 올해 54세이며 지난주에 사고로 돌아갔으며 유품을 정리할 때 80여 만 위안의 채무를 보았다. 어머니는 여러 루트를 통해 돈을 빌렸으며 돈의 행방을 확인하면서 카이쇼우플랫폼(快手平台)의 한 남성 인플루언서에게 약 85만 위안을 다샹했다'며 밝혔다. 그러면서 '지난해 5월부터 인플루언서의 개인 위챗을 추가하고 자주 연락했으며 어머니에게 누님으로 부르면서 라이브방송실로 자주 초대했다'며 전했다. 이여사는 '어머니는 생전에 독거하였으며 가족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신용카드도 여러개 있어 매달 1만 여 위안을 갚아야 하는데 많이 부담스러워 상대방에서 다샹금액을 돌려줄 것을 바랬지만 성인들의 행위다며 거절당했다'며 말했다. 콰이쇼우플랫폼에서 선물을 보내려면 충전을 해야 하는데 충전금액은 6~298위안이며 특별한 선물의 단가는 3,000위안이였다. 이여사가 제공한 단서로 보면 그녀의 어머니는 2022년 6월 한달동안 콰이쇼우플랫폼에 45만 위안을 충전했으며 가장 많을 때는 한번에 6,666위안을 충전했다. 콰이쇼우플랫폼에서 사건 연루 인플루언서의 팬들은 131만 명이 되며 작품내용은 주로 노래와 복싱이였다. 콰이쇼우플랫폼은 '현재 바로 다샹금액을 돌려줄 수 없으며 경찰에서 연락이 오거나 경찰에 연락해 처리해야 하며 관련 상황을 확인하고 경찰 조사에 협조하겠다'며 밝혔다. 변호사는 '플랫폼에서 인플루언서에게 다샹하는 것은 법률상 소비행위에 속하므로 당시 당사자의 정신상태를 보고 결정해야 한다'며 전했다. 그러면서 '이여사 어머니 명의로 된 부동산이 있는데 만약 이여사가 부동산을 상속받으려면 채무를 갚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채무를 갚지 않아도 된다'며 지적하였다.
-
Q열은 무엇일까? 사람과 동물 모두 걸릴 수 있어최근, 섬서 서안의 한 68세 노인은 39℃ 고열로 일주일 동안 앓고 있었고 복통, 근육통, 흑변 등 증상도 나타났다. 의사의 검사결과, 환자는 리케치아(立克次体) lgGM가 양성으로 나타났고 Q열로 진단되었으며 집의 애완견에게 감염된 것이다. 서안시 대흥병원 류머티즘(风湿)면역 전문가는 ‘노인이 애완견을 길렀고 얼마 전에 동물내장, 뼈를 깨끗하게 처리하지 않고 애완견에게 먹였는데 나중에 복통 증상이 나타났다’며 소개했다. 전문가는 ‘집에서 애완동물을 기를 때 애완동물의 자체 청결외에도 음식, 물도 깨끗해야 하며 기타 동물과의 과도한 접촉을 피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Q열은 사람이나 소, 염소 같은 동물이 세균인 콕시엘라 브루네티(Coxiella burnetii)에 감염되어 생기는 질병이다. 구체적인 증상으로는 추위를 타고 발열, 심한 두통, 근육통 등 증상이 있으며 폐렴, 뇌막염을 유발할 수 있고 일부 환자는 간염, 심내막염, 심근염, 혈전성 맥관염(血栓性脉管炎), 관절염 및 떨림성 마비 등 증상이 발생한다. 의사는 ‘신체상태가 좋은 젊은이들은 Q열에 감염된후 면역계통이 스스로 병원체를 이기고 회복할 수 있다’며 소개하였다. 하지만 노인, 면역력이 약하거나 기저질병이 있는 인원들은 Q열에 감염된 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만약 제때에 진단받고 치료하지 않으면 Q열은 차츰 만성, 엄중한 바이러스 감염으로 발전해 신체건강을 해치고 폐렴, 만성 폐렴, 간염, 심내막염, 균혈증(菌血症) 등 증상이 나타난다. 급성 Q열은 발열, 두통, 추위 타고 허리가 아프고 전신통 증상이 나타나며 만성 Q열은 지속적인 발열 혹은 반복 발열, 발열이 선명하지 않는 증상이 있다.
-
2023 재외한국학교 온라인 공동 입시설명회 개최광저우한국학교(교장 김성희)에서는 3월 22일과 23일 양일간 실시간 원격회의와 텐센트 동시 송출 방식으로 학생, 학부모, 교사를 대상으로2023학년도 재외국민특별전형 안내를 위한 온라인 공동 입시설명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재외한국학교 온라인 공동 입시설명회는 재외교육지원센터 주최로 광저우한국학교를 포함한 23개교의 학생, 학부모, 교사를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서울대, 서강대, 한양대 등 9개교가 참여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학교에서, 학부모들은 가정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대학의 입시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장시간 이뤄지는 텐센트의 회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유료방을 임대하는 등 재중한국학교들의 협력이 있었다. 올해 광저우한국학교 진학부장 김정균교사는 이번 온라인 공동 입시설명회가 재중 한국학교 부장교사들의 요청에 의해 기획되었다며, 이번 공동 설명회는 그 동안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일정을 가지고 진행되었던 각 대학들의 입시설명회를 집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에 학생들이 변화하는 재외특례 입시에서 실질적이고 정확한 입학 정보를 얻길 바라며, 참여하는 각 대학교의 자격별 학과별 지원전략 및 평가 중점요소를 파악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재외국민 특례전형이란? 대학입시의 재외국민특별전형은 70년대 경제 개발 시기 각 기업의 해외 주재원이 생기면서 그 자녀들이 외국에서 어렵게 우리나라 초중등교육에 상응하는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되므로, 국내의 학생들과는 다른 방법의 전형을 실시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현재는 전 지구를 누비고 도전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국민이 많아졌고, 불가피하게 동반하게 된 그 자녀들 역시 다양한 삶을 살아내는 인재들이기에 국내의 정규교육을 이수한 학생들과 다를 것임을 기대하며 특별전형이 실시되고 있다. 출처: 광저우한국학교
-
여행객이 주자이거우(九寨沟) 모 식당에서 술을 마신 후 메탄올 중독으로 1사1상3월 16일, 누리꾼은 '여행단을 따라 사천 주자이거우관광지로 여행갔다. 한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나서 여러 명이 메탄올 중독증상이 나타나 한 사람은 사망하고 한 사람은 실명하였다'며 '가짜 술로 우리를 접대한 것 같다'며 반영하였다. 3월 17일, 주자이거우현 문화체육과 여행국은 '현지 경찰이 이미 개입하였다'며 밝혔다. 주자이거우에서 여행업에 종사하는 한 마을 사람은 '듣기로는 복무원이 연료 알코올(燃料酒精)을 손님상에 백주로 잘못 올렸다'며 전했다. 요해에 따르면, 그들은 2월 23일에 하북에서 출발하여 청두에 도착한 후 현지에서 주자이거우로 가는 3일 여행단에 가입하였고 인당 비용은 480위안이였다. 2월 24일에 주자이거우로 출발하여 25일 10시쯤에 주자이거우에 도착하였고 가이드는 현지 티베트식당(雪域卓玛藏家乐)으로 데려 갔으며 술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도중에 가이드는 다른 상에서 건너와 술을 권했고 그는 자기 술잔 속의 술을 마셨다. 26일 오전 7시 경에 여행단은 황롱관장지(黄龙景区) 근처의 쇼핑점으로 갔고 몇몇 여행객은 몸이 불편해 차에서 내리지 않고 쉬고 있었다. 2시간이 지난 후 여행단은 다시 호텔로 돌아왔고 그리고나서 신체상황이 좋지 않던 여행객은 병원을 찾아갔으며 병원에서는 '메탄올중독'으로 진단하였다. 여행객 중 한 사람은 중독해 사망하였고 한 사람은 실명되었다.
-
길거리에서 여성이 쇠사슬로 무릎 꿇고 있는 남성을 끌고 가는 영상이 온라인에서 화제3월16일 저녁, 한 여성은 길거리에서 무릎 꿇고 있는 남성을 쇠사슬로 끌고 채찍질하며 라이브방송까지 진행했다. 다른 한 영상에서 남성은 이미 목에 있던 쇠사슬을 풀고 의자에 손을 기대고 있었다. 이때 여성은 쇠사슬로 남성을 때리며 '꼭 너를 때린다'며 말하였고 남성은 아픈 소리를 냈다. 근처에는 핸드폰으로 라이브방송을 진행하였고 여성은 가끔 누리꾼들과 소통하였고 길가던 행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거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었다. 근처 상가주인은 '플랫폼에 올라온 영상을 보았는데 라이브방송에서 주목을 받기 위해 도가 넘쳤다'며 말했다. 파출소 조사에 따르면 '정모(여성)과 시에모(谢某)는 모 동영상 플랫폼에서 내기하였고 진 사람은 벌을 받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내기에서 진 시에모는 스스로 애완동물 쇠사슬을 목에 걸었다. 정모가 플랫폼에 찍어 올린 영상은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일으켰다'며 통보하였다. 현재 정모와 시에모는 공공질서를 어지립힌 관계로 공안기관으로부터 5일 행정구속처벌을 받게 되었다.
-
[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8) 피난 온 임시정부 일행을 맞이한 채원개백범 일지에 김구 선생이 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를 먼저 떠나 광주에 도착한 후 이전부터 중국군 계통에 복직하던 이준식, 채원개 양인의 주선으로 동산(東山)의 백원(柏園)은 임시정부 청사로, 아세아여관은 전부 대가족을 수용케 되었으니”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던 동산백원은 현재의 쉬구웬로 12번지입니다. 임시정부 일행이 광저우에 도착한 날자에 대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제시의 일기』에 의하면 1938년 7월 17일 입니다. 김구선생은 7월 16일 광저우에 도착했고요. 동산백원에 머문 시간은 두 달입니다. 임시정부 요원과 가족들은 창사에서 후난성 주석 장즈중(장치중, 1890~1969)이 마련해준 열차를 타고 3일 만에 광저우 황사(黃沙) 기차역에 내렸습니다.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 1922~2016)은 『조국의 하늘을 날다』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광저우에 도착하니 당시 중국군이던 채원개 선생이 자동차를 몰고 마중을 나왔다. 평남 영원 출신인 채원개 선생은 나중에 광복군에 활동했고 해방후에는 국군 사단장을 지냈다. 선생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를 태우고 아세아여관으로 갔다. ” 채원개는 고향 평안남도 영월군(宁远郡)에서 안식일 교회 선교사들이 설립한 의명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임시정부 요원과 가족들이 광저우로 피난 올 무렵,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쉬구위안로후가 1-13호에 살고 있었습니다. 1940년 7월 말, 한국독립당 및 조선민족혁명당 등 주요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한 ‘7당 통일회의가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열릴 무렵, 채원개의 연락처가 군사우편함〔‘廣東軍郵 72局 劍字 89號 附’〕인걸 보면 임시정부 일행이 광저우를 떠날 때, 채장군은 광저우에 남아서 중국군에 복무하고 1940년대 초반 광복군에 합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0년 8월 10일,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 창건을 준비할 무렵, 광복군총사령부 참모로 임명되고,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는 날, 채원개는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 처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40년 성립된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강제 해산한 대한제국의 군대를 계승했습니다. 광복군 창군식에서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은 성립 보고를 하면서 한국광복군은 1907년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대를 계승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일본군 병력과 맞서 일제의 국권 강탈을 막았고, 만주로 이동한 의병들이 독립군으로써 대한제국의 군대를 대신해 나라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채원개는 만주에서 의병들이 조직한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한 이래 27여년간 줄곧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니 광복군 참모 자격이 충족됩니다.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뒤 광복군 제1지대장 채원개 장군과 김구임시정부 주석과 찍은 사진.「秘話 第一共和國」, 『동아일보』, 1973년 8월 24일.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한 이후, 채원개는 고급참모에 임명되었습니다. 1944년 한국광복군 제1 지대장에 전임되어 후난(湖南), 간(赣)지역에서 적군 중 한적 군인의 귀순을 유도하고 적 후방교란 및 유격 작전에 전력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가족을 교포 일행과 한국으로 출발시킨 다음, 채원개는 광복군 제1지대를 인솔해서 한커우(漢口)에 도착하여 창사(長沙) 방면에서 이동해 온 전 일본군 내 한적사병(韓籍士兵)으로 구성된 1개 대대 규모의 한인부대와 합류해서 구강(九江)을 거쳐 난징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였기에, 부대를 해체한 다음, 1946년 초, 난징을 떠나 상하이에서 선편으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부산항에 도착하여 세관창고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열차편으로 서울로올라 와 가족과 재회한 그는 서울역 앞 수용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장충동에 있는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남산 밑 한미호텔로 숙소를 옮겼습니다. 참고자료 김학민 이병갑 주해, 『백범일지』, 학민사, 1997년3월.김신,『조국의 하늘을 날다』, 돌베개, 2013년 12월.채원개 공적자료, 국가보훈처.「총사령부 기구의 변화」,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국사편찬위원회, [DB/OL]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7) 채원개 장군의 광저우 활동채원개 장군이 황푸군관학교에서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황푸군교 부임 후 그 다음 해, 국공결렬로 인해 황푸군관학교가 문을 닫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1927년 4월 18일, ‘4.18 사변’으로 불리는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의 반공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황푸군관학교 구락부에서 회의 도중 갑자기 공산당원과 혁명 학생 200여 명이 체포되어 중산함(中山舰)에 억류되거나 난스터우(南石头) 감옥으로 호송되어 구금되고 일부는 사살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많은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해서 학교를 떠나고 800여 명이나 되던 한인 혁명가들도 광저우를 떠나고 광저우에는 70여 명이 남았습니다. 황푸군관학교의 한인들은 우한으로 이동하고 황푸군관학교도 일부 학생들을 난징(南京)으로 이동시켜 졸업시키고 황푸군관학교를 대신하는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또 그해 12월 발생한 광저우 코뮌으로 인해 국공합작에 기대를 걸었던 한인의 희망은 다시 한번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채원개는 광저우에 남아 중국군에 입대했습니다. 국민당 군대의 중교(중령)신분으로 광둥수정공서(广东绥靖公署)에서 우전(邮电) 검사를 하는 한편 광저우에 남은 교민들을 결속했습니다. 1928년 1월 채원개는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중산대학 법학원 강당에서 개최한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임시대회에 참여했습니다. 종래에는 동회의 입회자를 청년으로 제한했으나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남녀노소를 차별하지 않고 다수의 동지를 결속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유월한국혁명청년회’ 명칭을 ‘유월한인혁명회’로 변경했습니다. 1927년 12월 공산당 폭동으로 인해 줄곧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황푸군관학교는 이듬해 5월부터 교무를 회복했습니다. 1929년 9월 교장의 명령으로 학교명을 ‘국민 혁명군 황푸군관학교’로 개명하고 1930년 9월 제7기생을 졸업시켰습니다. 웬만한 실력으로는 중국군대의 참모장이 될 수 없는데, 1930년, 채원개는 재직했던 황푸군관학교 교관에서 중국군 59사(師) 작전참모로 전임하였고, 이듬해 봄 제2사 교도 단장으로 전직했습니다. 1931년 중국군 제1군에 전직하여 참모처장, 교도단장 등 직을 맡고 공산당 토벌 작전에도 참가했습니다. 1932년 상하이사변(上海事變)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 침공이 본격화된 이후, 중국군 독립 제4사 참모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1932년 윤봉길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사건 이후 광저우에 다시 한인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지사들이 하나 둘 광저우로 피신을 오고, 중산대학에도 약 3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입학했습니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1934년 6월, 채원개는 한국독립당 광둥 지부(소재지, 廣州市 東山瓦窑後街 41호) 간사였습니다. 채원개는 유월한인광복회 명의로 광저우를 찾아오는 유학생들에게 학교를 소개했습니다. 유월한인광복회는 중산대학과 협력했는데 중산대학은 한인 학생이 입학할 수 있도록 정원 수를 남겨 두고 비밀경로를 통해 한국독립당이 추천하는 학생들을 수용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까지 중산대학의 한인 학생은 80여 명이었는데 이들의 학비 일부를 ‘유월한인광복회’가 부담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보면 유월한인광복회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 활동을 대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채원개는 중국군 제 19집단군(총사령 香翰屛)에 배속되어 작전 참모로서써 상하이, 난징(南京) 방위전에 참가했습니다. 1938년 봄 제4로군(路軍)으로 복귀하여 고급참모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던 중 전 정의부 중앙군사위원장을 지낸 이준식(李俊植)이 4로군 총사령부 작전참모로 광저우에 부임해 왔습니다. 1938년 3월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채원개는 유월한인광복회 명의로 4월 15일 장사(长沙)에서 거행되는 안창호 추도회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하는 안내장을 중국 각 기관에 발송했습니다. 애도를 표시하는 완장의 접수처가 곧 광주시 동산(东山) 쉬구위안로(恤孤院路) 1~13호 채씨댁(蔡宅)이었으니 채원개의 집이 곧 유월한인광복회 연락처로 보입니다. 참고자료안병무, 《칠불사의 따오기》, 범우사, 1988년 5월.채원개, 「자필이력서」, 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년 조은경, 《1930년대 중국 광주지역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형성과 변천》,《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81호 2014년.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6) 황푸군관학교 교관1926년 봄, 채원개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육군주만주참의부 군무부장직을 사임하고 황푸군관학교로 파견되었습니다. 신해혁명 때부터 숙부 천치메이(陣其美, 1878~1916)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종사하던 천궈푸(陳果夫1892~1951)가 프랑스조계지 내에 새로 개업한 허타이신(河泰新)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비밀히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황푸군관학교는 임시정부에 입교생 추천을 의뢰했고, 임시정부의 조소앙(趙素昻, 1887~1958)과 박찬익(朴贊翊, 1884-1949)이 한인청년을 황푸군관학교 학생 모집 책임자 천궈푸에게 소개하면 춴궈푸는 소개신과 배삯을 주어 광저우로 보냈습니다. 한인청년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상황을 보면 3기에 5명, 4기에 24명, 5기에는 200여명이나 입교를 합니다. 게다가 쑨원의 국공합작에 고무된 한국 청년들까지 유입되어 1926년 말 광저우에는 한인 800여 명이 집결했습니다. 이들 중 400명은 만주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에 소속된 독립군 출신이었으며 모두 황푸군관학교 학생대에 입교를 원했습니다. 1926년 겨울, 채원개는 임시정부로부터 안경근(安敬根, 1896~1978)과 황푸군관학교 파견 명령을 받고 참의부 3중대의 ‘함(咸), 장(張)’ 두 학생과 함께 광둥으로 왔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광저우까지 오는 길도 만만치 않네요. 환런현(桓仁縣)을 출발하여 푸순(撫順)을 지나 펑톈(奉天)에서 중국 국적(中國 國籍)을 취득하고 신사와 학생으로 변장한 다음, 경봉선(京奉線) 열차 편으로 톈진에 도착하여, 다시 윤선(輪船)을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조계지 최석순(崔錫淳?~1925)의 집에 머물며,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안창호(安昌浩, 1878~1938), 김구(金九, 1876~1949),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이유필(李裕弼, 1885~1945)을 방문해 만주 정세를 보고하고 1주일 정도 머문 다음, 프랑스 윤선을 타고 산터우(汕頭)를 경유해 3일 만에 광저우 바이어탄(白鵝潭)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렵, 황푸군관학교에는 윈난강무학당을 졸업한 양림(楊林, 1898~1936, 김훈)과 최추해(崔秋海, 崔庸建, 1900~1976),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손두환(孫斗煥, 1895~?), 공주선, 김철남(金鐵南, 1895~1952) 등이 교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기술주임 교관 양림의 안내로 교장대리 겸 교육장 팡징잉(方鼎英, 1888~1976)을 접견하고 5기생(1926 . 11.15.~1927. 8) 제1학생대 부대장직을 맡았습니다. 채원개의 회고에 의하면, 6기생이 입교할 무렵, “외국인 학생 600여 명을 독립 학생대로 별도 3개 중대로 편제했는데 1개 중대 병력은 200명이었다. 제1중대는 한국인, 제2중대는 베트남인, 제3중대는 말레이시아인으로 편성되었다”고 합니다. 채원개가 독립 학생대 학생대장이었고 4기 졸업생 박효삼(朴孝三)이 한인들로 구성된 제1중대 중대장직이었습니다. 채원개는 독립학생대 대장 외에도 편집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참고자료채원개, 「자필이력서」, 박정신 외, 『희산 김승학선생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주)문학과 지성사, 1994년3월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
-
[중국한인역사] 채원개 장군(5) 육군주만주참의부 군무부장1925년 봄, 채원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 군무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참의부가 조직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만주 대한통의부내에서는 복벽주의파와 공화주의파가 적대관계로 대립하여 분열되었습니다. 양기탁(梁起鐸, 1871~1938)을 비롯한 공화계 인사들이 대한통의부의 많은 요직을 차지하고 복벽주의 대표인 전덕원(全德元, 1877~1943)에게는 권력 없는 참모부 부감이라는 직책이 주어진데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습니다.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파 인사들은 1923년 2월 ‘의군부’라는 새로운 독립군단을 만들어 대한통의부를 이탈했습니다. 전덕원 계열이 이탈하고 또 일부 세력이 지도층의 노선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1922년 10월 14일, 전덕원 휘하의 독립군 병사들이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1885~1923)를 살해하고 양기탁을 비롯한 공화계 주요 간부들을 포박하여 구타하는 참혹한 동족상잔이 발생했습니다. 통의부와 의군부가 무력 충돌을 불사하면서 상대를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蔡燦, ?~1924, 백광운)을 비롯한 박응백, 김원상 등이 1923년말 상하이 임시정부를 방문해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 소속되어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전력하겠으니 임시정부가 구심점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이를 수락하고 통의부 군사 활동의 기반이 되어 왔던 의용군 1.2.3.5 중대가 이탈해 나가 육군주만주참의부를 결성했습니다. 1925년 8월, 통허현(通河縣)에서 임시정부 산하의 ‘육군주만주참의부’를 결성하고 채원개가 임시정부의 군무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육군주만주참의부가 성립된 것은 동족 간의 갈등을 피하고 광복전선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의도였으나 역효과도 있었습니다. 통의부 간부들은 남만주 군단이 임시정부에 복종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참의부를 질시하는 성토문을 발표하고 음력 7월 2일 밤, 참의부 제5중대를 공격했습니다. 참의부 대장 김명봉(金鳴鳳, ?~1924) 외 1명이 암살당하고 무기도 강탈당했습니다. 또 암살단을 사방으로 보내 중앙부의 참모장 채찬을 사살했습니다. 압록강변에서는 조선에 가서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만주로 돌아오는 참의부 일행 5명을 사살하고 무기 및 군자금 3만 원도 탈취했습니다. 이후 통합운동이 재개되어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결성되어 1920년대 만주 지방의 실질적인 정부 역활을 합니다. 만주의 민중들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중 어느 부에나 소속된 인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부민 확보를 위해 싸워야 할 적은 그냥 두고 동족끼리 대혈투를 치르는 상황이 발생하자 혁명지사뿐 아니라 일반 민중중에도 독립운동 자체에 환멸을 느끼는 자들이 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내무 총장 이유필(李裕弼, 1885~1945)이 유혈 충돌 조정 임무를 띤 임정 대표 자격으로 만주 지역에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부장 이유필 씨는 비서 채원개 씨를 데리고 지난 5월 2일경 흥경현 하남(河南)에서 일박하고, 길림성 반석현(盤石縣) 반석으로 향하였는데, 그 임무는 당지에 있는 정의부와 중동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 있는 신민부 사이에 조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바, 본시 정의부는 산업중심주의(産業中心主義)요, 신민부는 군사중심주의(軍事中心주의)이므로, 두 단체가 늘 충돌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우려하던 임시정부에서는 오는 7월 10일에 개최할 독립당 대회에 □만한 집합을 만들기 위하여 그와 같이 분주히 조정에 노력한다고 한다”. 채원개는 각 부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한인사회를 순방하며 통의부와 참의부 두 단체의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참고자료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년, 134-135쪽. 「정의, 신민의 갈등과내무 총장의 조정, 독립단 대회의 원만을 도모」, 『시대일보』, 1925년 6월 4일. 글: 한국독립운동역사연구회 강정애